평생 선비로 살아온 영주문화의 정신적 스승

유계(幽溪) 송지향(宋志香) 1918-2003

평안북도 박천군 동남면 동하동에서 송국훈(宋國勳)과 연안차씨(延安車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11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12살(1929)에 아버지를 따라 두 동생과 함께 풍기 금계리로 온다.

가정 형편상 학교교육은 받지 못했으나, 어려서 책을 좋아하였던 그는 주경야독하며 문학, 역사, 한의학 등을 독학으로 공부했다.

34살(1952년)에 금계중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18년간 국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22살(1939)에 조선일보 풍기지국을 운영하면서 ‘소백산 탐승기’ 등의 글을 조선일보에 게재한 바 있던 그는 1967년 영주향토지를 발간하고, 교직에서 물러나 역사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안동향토지(1983년), 영주영풍향토지(1987년), 순흥향토지(1994년)를 저술한다. 그 후 대한광복단기념비추진위원장에 취임하여, 1995년 11월 17일 대한광복단기념비를 건립한다.

공적으로 경북문화상(1987년), 자랑스런 경북인상(1989년), 안동MBC문화상(1993년)을 각각 수상한다. 유고집으로 19세인 1936년부터 86세인 2003년까지의 일기를 엮은 『유계일기』가 있다.

[저술 활동]

『안동향토지』
1983년 간행/ 1642쪽

『영주영풍향토지』
1987년 간행.
크기는 가로 19㎝, 세로 26.5㎝이고, 상권 1,030쪽, 하권 860쪽, 총 1,890쪽 분량이다.

상권은 총 2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편은 고장의 유래, 자연, 고적, 인맥, 민속을, 제2편은 오늘의 이 고장 편으로 자연·인문환경, 시군정 살림, 산업·경제·교육·종교·기타, 문화재 목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에서는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소개하고 있다. 하권은 이 고장의 씨족 인물과 옛 문헌에 오른 이 고장의 성씨로 구성되어 있다. 하권에는 영주 지역에 우거하고 있는 60개의 성씨를 망라했다.

『순흥향토지』
1994년 간행.
가로 19㎝, 세로 26.5㎝이고, 분량은 803쪽이다.

기존의『순흥지(順興誌)』를 토대로 70여 종의 참고문헌을 바탕으로 현장답사 등을 통해 현장감을 더했다. 1편은 옛 시대의 순흥으로 고을의 유래, 자연, 고적, 인맥, 민속, 씨족과 인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2편은 오늘의 순흥으로 개관, 경제, 사회와 문화, 부록으로 나누어져 있다.

『유계일기』

2016년 간행, 9세인 1936년부터 86세인 2003년에 사망할 때까지 쓴 일기(日記)이다. 67년이라는 기간 동안 33년에 걸쳐 기록한 편년체 기사 기록 방식을 근간으로 한 장편 일기이다.

풍기읍 전경(철도 왼편에 유택이 있다)
풍기읍 전경(철도 왼편에 유택이 있다)

[유적지] 
유계(幽溪)선생 기적비(紀蹟碑)

‘유계선생 기적비’가 풍기읍사무소 옆, 제운루 앞에 세워지게 된다. 유계(幽溪) 송지향(宋志香) 선생 기념사업회(회장 김창언)는 선비로 일생을 살아온 선생의 정신과 업적을 기리고, 후세교육에 크게 기여할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살던 집은 풍기북부초등학교에사 금계로 건너편에 있다.
 

[미니픽션]
현실과 꿈 사이 – 때로는 맑고, 때로는 흐림

맑고 차갑고 사나운 바람이 분다. 앙상해지는 몸이 무게는 날로 더해간다. 누워지내면서도 다섯 시면 일어나 세수를 하며 하루를 시작했는데, 오늘은 세수도 걸렀다. 며칠 동안 끊었던 탕약을 오늘부터 다시 준비하겠다고 한다. 이젠 약으로 회복을 기대하기 불가능한 생각이 들었지만, 아이들의 정성을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누워 지내다 보니 예전 생각만 꼬리를 문다. 문풍지가 운다. 풍기에서의 첫날 밤, 그날 문풍지 소리는 밤을 꼬박 세우게 했었다. 풍기 바람은 박천 바람보다 더했다. 풍기에 온 건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한 해가 지났을 때였다. 소상 겸 대상 제사로 복을 벗고 한식을 며칠 앞둔 날 아버님께서 풍기로 간다고 하였다. 그해 한식은 고향에서의 마지막 명절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는 밤차를 타고 떠났다.

우리 고향에서는 경상도를 남도라 했다. 어린 나에게 그곳은 환상의 낙원으로만 상상되었다. 겨울에도 산에 들에 꽃이 피고, 전쟁도 피해 가는 살기 좋은 곳. 거기서는 모두 쌀밥을 먹으면서 근심 걱정 없이 항상 즐거움을 즐기면서 살아가는 곳이라 여겼다. 내 또래들은 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남도로 간다는 나를 그렇게 부러워했다. 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또 김천에 내려 하룻밤 그리고 또 기차를 타고…. 예천에서 기차에 내릴 때, 그 기차여행이 아수했던 것은 남도에 대한 기대감으로 꽉 차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처음 눈에 들어온 풍경은 내 마음을 몹시도 어둡고 스산하게 했다. 어느 집이라 할 것 없이 돌담으로 벽을 두른 채 웅크리고 있었고, 마당에도 골목길에도 온통 돌투성이여서, 그지없이 삭막해 보였다. 사방을 둘러싼 하늘에 닿을 듯 드높은 산머리엔 아직껏 눈이 허옇게 남아 있었다. 거기에다 날씨조차 왜 그다지도 험상궂던가.

험상궂음은 풍경만이 아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삶은 열 두 살 아이가 견뎌 내기엔 너무 차갑고 모진 현실이었다. 거의 매일 산에 가서 나무를 해야 했던 힘겨운 노역은 나를 늘 지친 몸으로 만들었다. 유일한 낙은 등잔불 아래서 혼자 읽고 쓰는 일들이었다. 내일 있을 힘든 일도 생각지 않고, 혼자 즐기면서, 밤이 깊어가는 줄 몰랐다.

스무 살쯤엔 가출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살다가 인생이 그렇게 끝날 것 같은 초조함 때문이었다. 한여름이 지나던 어느 날, 나는 봇짐을 꾸려 집을 나섰다. 마음에 품어왔던 소원인 작가 수업을 해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잡지 소설 몇 권을 읽은 것이 전부인 내가 도전한 그 일은 무모하기 짝이 없었지만, 갈래사에서 만난 스님의 조언은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였다.

“이 시대의 젊은이가 산에만 있으면 되나. 도시에서 살아야 현실을 보지. 그리고 자유를 잃음은 남이 그 자유를 빼앗아서가 아니라 자신 스스로 자유를 내던졌기 때문이 아닐까?”

그때 집으로 돌아오며 ‘무릇 자유를 잃는다는 것은 빼앗는 쪽보다 빼앗기는 쪽이 죄가 더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 무렵 장가를 갔다. 이젠 식솔들을 책임져야 할 가장이 되었다. 주변의 도움으로 화전민 촌으로 들어갔다. 토질이 좋아 농사는 잘되었다. 어쩜 그때 몸과 마음이 가장 편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편함 속에는 미래가 없었다.

다시 풍기로 돌아왔다. 모두 반겨 주셨다. 나 스스로 할 일을 찾아 나서자, 동아일보 풍기 지국을 운영하던 집안 형님이 같이 일을 하자고 했다. 일을 배우다가 조선일보 지국 자리가 나서 직접 운영하게 되었다. 그 무렵 신문마다 ‘○○ 답사기’가 유행이었다. 그래서 탐사대를 조직하여 소백산을 답사하고 ‘소백산 탐승기’를 써서 6회로 나누어 조선일보에 실었다.

커다란 제목 아래에 풍기 지국 ‘송지향’이란 이름 석 자까지 실렸다. 만나는 사람마다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살아간다는 일이 벅차고 두렵기만 하여, 아무래도 잘못 태어난 운명인가 여겨왔는데, ‘잘만하면 그래도 살아볼 만한 세상이구나’란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일도 거기까지였다. 일제의 언론탄압으로 조선일보가 강제 폐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한약방을 운영하던 집안 어른이 일을 도우라 하였다. 덕분에 의사면허까지 따게 된다. 하지만 그 일은 나에게 맞지 않았다. 환자들이 약값을 주면 받고, 안 주면 그만인 영업을 하였으니,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한 번은 충남 서산 광천이라는 곳에 한약방을 차렸다. 환자를 살려 달라는 말에 안면도란 섬까지 가서, 치료해 준 적이 있었다. 생명의 은인이라며 보답하겠다고 했지만, 거절하고 집으로 왔다. 그 후, 가족들은 그 환자가 배가 몇 척이나 있는 선주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평생 나를 원망하기도 했다.

해방 후, 지역에서도 이곳저곳 학교가 세워졌다. 교사가 부족하던 시절 몇 년 교편을 잡기도 했다. 학교 교육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나였기에 한사코 거절하였지만, 교사를 찾을 때까지란 단서를 달고 했는데, 10년이 넘도록 그 일을 했다. 그리고 『영주향토지』를 만들면서, 이웃 고을과 연결되는 학맥과 인맥을 정리하다가 안동 향토 자료까지 모으게 된다. 그런데 나를 덮친 불면증은 매일 밤마다 시달리게 했다. 10년 동안 문 앞 한번 가지 못할 정도였다.

이제 생각해 보니, 그것은 평생 앓아왔던 갈등, 가보지 못한 세계가 무수히 많지만, 가난 때문에 가까이 갈 수 없다는 꿈과 현실의 갈등이 그때 폭발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니 이젠 더 미룰 수 없다는 초조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를 악물고 『안동향토지』, 『영주․영풍향토지』, 『순흥향토지』에 매달리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12月 27日 土 時請時曇(시청시담)”
날짜와 일기만 쓰고 다시 눕는다. 평생을 하던 일기를 멈출 수 밖에 없다. 이것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최근에 찾아 주었던 젊은 친구들이 그래도 대견하다. 원고 청탁을 차마 거절 못 해, 30여 장짜리를 며칠을 끄적이며 써 주었더니, 고급화선지 한 축을 사서 와서 원고를 찾아갔다. 아직 그 화선지도 다 쓰지 못하였다. 또 ‘영주 문화’란 잡지의 창간호에 나를 소개했던 그 친구들이 죽령옛길을 복원한다고 해서, 동행하기로 약속을 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몸이 너무 피곤했다. 전화로 길을 설명을 해 줄 수밖에 없었다. 중간에서 전화로 말을 전하던 진회 군이 참 고마웠다.

어느 날 진회 군이 그날 저녁에 문화원에서 광복단 기념비 건립계획 수립을 위한 모임이 있다고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날 ‘가야 하나?’라는 생각을 한참 했었다. 젊은이들이 향토 발전을 위하여 정열을 바치려 하는 마당에, 고장의 유지라는 사람들이 번영회니, 지역발전회니, 간판을 걸고는 기득권이 침해나 당할까 봐, 젊은이들 활동에 제동을 걸고 있는 꼴이 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열두 살, 영주에 왔을 때, 순흥에 있는 고분이 도굴되었다는 소문을 들으며 ‘뭐 이런 일이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어쩌면 평생을 살아온 숙명 같은 일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잘 되겠지 란 기대를 해 본다. 이 젊은이들을 믿기 때문이다.

(선생의 일기는 2002년 12월 27일이 마지막이었다. 선생은 2003년 1월 27일 소천하셨다)

글 김덕우 작가
(※ 참고자료/유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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