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비치는 아름다운 ‘천운정(天雲亭)’

번계들에서 바라본 천운정과 하늘 빛
번계들에서 바라본 천운정과 하늘 빛

천운정은 백암 김륵 선생이 만년을 보내기 위해 처음 지어지고
백암의 차자 번계공의 6대손 익련이 1762년 구지의 남에 이건

10여 년 전으로 기억된다. 이산면 번계들 대축제 날 낮에는 메뚜기 체험행사에 참여하고, 저녁에는 천운정에서 열린 고택음악회를 감상한 적이 있다. 그 후 이산로를 지날 때마다 천운정(天雲亭)에는 어떤 보물이 숨겨져 있을까?’ 늘 궁금해하다가 그해 가을 추억을 떠올리며 천운정을 다시 찾았다.

천운정과 번계들

농부가 그린 그림, 아름다운 번계들 금빛들판을 상상하며 이산로를 달린다. 이산면 석포리 석포교를 지나자 황금물결 일렁이는 번계들이 보인다. 그 옛날 번계들 축제 날도 이랬던 것 같다. 산모롱이를 돌자 저 멀리 천운정이 보인다. 고택 뒤로는 바람을 막아 줄 야트막한 산이 있고 야산에는 송림이 울창하다. 다시 본 번계들은 예나 지금이나 풍요로움이 넘실거린다.

이산면 석포리는 조선시대 때는 영천군(榮川郡) 말암면(末巖面) 지역이었다. 영주지에 보면 말암리에는 흑석(黑石)과 이곡(伊谷)과 우금(友琴)과 반포(反浦)와 지동(池洞)이 있다고 나온다.

지금 천운정이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의 옛 이름은 반포(反浦) 즉 영천군 말암면 반포리였다.

번계의 옛 이름이 ‘반포’로 기록된 것은 백암 선생이 내성천을 영천의 동쪽을 흐르는 하천이라 하여 동포(東浦)라고 불렀는데 백암 선생의 아들 번계공(樊溪公)이 동천을 돌려 치수(治水)함으로써 개(浦)를 돌렸다 하여 반포(反浦)라는 지명이 생겼다 한다.

이때 번계공이 소바우 앞으로 흐르던 내성천 줄기를 서쪽으로 밀어내고 농토를 개척하니 마을 사람들은 번계공의 공덕(功德)에 감사하면서 공의 호를 따 마을 이름을 ‘번계’라 부르게 됐다고 전한다.

백암 선생이 명나라 옥화관에서 쓴 시비
백암 선생이 명나라 옥화관에서 쓴 시비

명나라 옥화관에서 쓴 시

천운정 마당에 차를 세우니 시비 하나가 첫눈에 들어온다. 시비 앞에 섰다. 백암 선생을 만난 듯 예를 표하고 비문을 읽어 보았다.

제목은 ‘옥화관에서 양진재를 생각하며…’이다.

만리 관문을 꿈결같이 지나 옥회관에 도착하고 보니 양진재의 근황은 어떠할고 멀리서 생각하니 얼어붙은 눈 쓸 사람 없어 텅빈 뜰에는 달빛만 머물러 있겠지

이 시는 백암 선생이 임인년(선조35 1602) 겨울에 하절사(賀節使)로 명나라 연경에 갔을 때 고향집 양진재(養眞齋)를 그리워하면서 지은 시이다. 한시(漢詩) 비문 아래 번역문이 있어 누구나 쉽게 감상하도록 했다.

구름 그림자가 비치는 천운정 앞 연못
구름 그림자가 비치는 천운정 앞 연못

천운정에 올라

천운정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57호로 지정됐다. 천운정 앞 연못을 한 바퀴 둘러보고 천운정 대문 앞에 서니 안내판이 있다.

읽어 보니 “천운정은 선조 31년(1598) 백암(栢巖) 김륵(金玏, 1540~1616)이 만년을 보내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김륵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도 안집사의 명을 받고 전란을 평정하는 데 이바지한 공헌으로 선무원종공신이 되었다. 벼슬은 이조 참판을 역임하였다.

효종4년(1653)에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정조12년(1788)에 민절(敏節)이란호를 받았다. 정자 좌측에는 본채인 양진재가 있다. 천운정은 처음 건립된 후 2차례 옮겨 지금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고 적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 천운정 마당에 들어섰다. 건축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2통 칸 온돌방과 마루 1칸을 연이어 놓았고, 전면과 우측면에는 계자각헌함을 돌려 누마루처럼 보이게 꾸몄다. 마루에 올랐다.

남쪽 들녘을 내려다보니 황금물결이 넘실거린다. 예전에는 내성천이 내려다보였다고 하나 지금은 제방 위로 도로가 나 운치는 옛날만 못한 것으로 짐작된다. 정자에는 중건천운정기와 천운정 현판, 중수기, 동포서당 현판 등이 걸려있다.

양진재에서 내려다 본 번계들의 가을 풍경
양진재에서 내려다 본 번계들의 가을 풍경

천운정 중수기(重修己)

중건천운정기(重建天雲亭記)는 한문으로 쓰여있어 읽기가 어렵고, 15대손 김종환(金宗煥) 후손이 2018년 한문과 한글 혼용으로 쓴 중수기가 있어 읽어 볼 수 있었다.

중수기에 “천운정은 백암 선조의 정자이다. 영조 38년(1762) 백암 선조의 차자 번계공(樊溪公)의 6대손 익련(益鍊)께서 구지(舊地)의 남에 세 번째 이건했다.

천운정이라 한 것은 「관서유감(觀書有感)」이란 시구 중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하네.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란 구절에서 천(天) 자와 운(雲)자를 따 정자 명을 천운정(天雲亭)이라 명명하신 것 같다.

천운정 현판은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글씨이고, 동포서당 글씨는 선원(仙原) 김상용(金尙容)의 글씨다. 연못을 만든 것은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를 감상하려는 선조의 뜻이 담겨 있다. 후손들은 선조를 잊지 말고 유업을 보존할 것을 당부하면서 자자손손 번창하기를 바라노라”고 적었다.

백암 김륵은 누구?

백암 김륵은 자는 희옥(希玉)이고 호는 백암이다. 아버지는 형조좌랑 김사문(金士文)이고 어머니는 인동장씨 장응신의 따님이다. 1540년(중종35) 경상북도 영천 백암리에서 태어난 김륵은 16세에 명문 출신인 인동장씨(仁同張氏)와 혼인하고, 25세가 되던 1564년(명종1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이때 함께 합격한 사람 중에는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오리 이원익 등 당대의 뛰어난 인재들이 두루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묶어 용호방(龍虎榜)이라 부르기도 했다. 사마시 합격 이후 생부 김사명(金士明)과 스승인 퇴계 이황이 상사를 당하여 고향에 머물던 김륵은 퇴계의 위패를 이산서원에 봉안하는 일을 주도하는 등 영천 지역 사림의 중심인물로 부상하였고, 흑석사와 소수서원 등지에서 학업에 열중하며 과거를 준비했다.

문과급제 후 요직 두루 역임

37세가 되던 1576년(선조9)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한 김륵은 곧이어 승정원 가주서와 예문관 검열을 지낸 뒤 성균관 전적·예조 좌랑·사간원 정언 등 조정의 주요 문한직(文翰職)을 거치며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1580년 잠시 고산찰방(高山察訪)에 보임되었던 김륵은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병조 좌랑·사간원 정언·사헌부 지평·홍문관 수찬·이조 좌랑 등 언론을 담당하는 삼사(三司)와 조정의 인사를 주관하는 이조·병조의 낭관(郎官) 등 핵심 요직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584년(선조17) 영월 군수로 부임해서 5년간 재직하는 동안 노산군(魯山君)의 묘에 사당을 세우고 위판(位版)을 봉안하는 등 절개와 의리를 지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589년(선조 22) 김륵은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어 다시 조정에 돌아온 뒤 사헌부 집의와 승정원 우부승지·좌부승지 등을 역임하며, 16세기 후반 중앙의 정치무대에서 영남 사족을 대표하는 핵심 인물 중 하나로 큰 활약을 보였다.

임진왜란 극복에 큰 공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도 안집사에 임명된 김륵은 초모문(招募文)을 집필하여 도내의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집경전(集慶殿)에 봉안되어 있던 임금의 초상을 청량산에 임시로 봉안하게 하고, 의성·예안·안동 등지에서 왜적을 격파하는 등 공로를 세워 이듬해 안동부사에 제수되었다.

김륵은 안동에 머물며 가난한 백성의 구제 대책을 마련하고 군량을 수송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경상우도 관찰사에 올랐다가 곧이어 조정으로 돌아가 승정원 도승지·사간원 대사간·성균관 대사성에 연이어 임명되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594년(선조27)에는 사헌부 대사헌·이조 참판·홍문관 부제학 등 요직을 역임했으며, 1595년(선조 28) 부체찰사에 올라 수원·전주·남원·거창·진주·대구·창녕 등지를 순시하며 군졸들을 위문하고 전황을 살폈다. 이때 한산도와 거제도에 들러 이순신을 비롯한 수군의 활약상을 조정에 보고하고 이들의 전공을 치하하였다.

1598년(선조 31) 다시 대사간과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된 김륵은 선조의 경연(經筵)에 참석하여 학문을 강론하고 시세(時勢)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진달하였지만, 영의정으로 있던 유성룡의 무고함을 변호하다가 파직되어 고향으로 잠시 물러나기도 하였다.

1599년(선조32)에는 형조 참판과 예조 참판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게 되었는데, 이때 이순신의 공로를 조정에 아뢰며 그 집안의 조세 부담을 감면해 줄 것을 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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