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영주 주거건축 중 가장 오래된 가옥 ‘두암고택’

두암고택 솟을대문-문간채
두암고택 솟을대문-문간채

두암고택은 영남지방 ㅁ자형 뜰집의 대표적 주택으로 가치 인정
영주 현존 주거건축-가옥 중 가장 오래돼 경북유형문화재 지정
두암의 후손들 학문에 힘써 문과 8장, 생원ㆍ진사시 22장 급제

두암고택(斗巖古宅)

두암고택은 1975년 12월 30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1호로 지정(등록)됐다. 우리 고장(영주)에 현존하는 주거생활-주거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가옥으로 그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영주 최초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고택 솟을대문 앞에 섰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바로 이런 집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된다. 430여 년 전 당시 영천군(영주의 옛 이름)의 한 두메에 이런 큰 집이 지어졌다는 설명에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대문에서 “이리 오너라!”고 큰소리를 쳐 봤다. 누군가 나올듯한데 대문 안쪽은 조용하다.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솟을대문 안은 넓은 마당이 있고, 고래등 같은 기와집은 ㅁ자형 정침(正寢, 본채)을 가운데 두고, 우측으로는 사당이 모셔져 있고, 좌측으로는 별당인 함집당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고택은 영남지방 ㅁ자형 뜰집(庭, 뜰이 있는 집)의 대표적인 주택으로 입향조 김우익이 18세에 장가들어 19세 때(1590년) 삼판서고택에서 분가하면서 지은 건물이라고 하니 1590년 작품이다.

우금마을 입향 일화

김우익이 구산(龜山, 구성산) 아래 성저마을 삼판서고택에서 태어나 19살에 분가하면서 우금에 터를 잡게 된 일화(逸話)가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다.

1590년 정월 어느 날 김 공이 아침에 세수하고 있는데 학(鶴) 한 마리가 알을 입에 물고 삼판서고택 위를 날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기이하게 여긴 김 공은 급히 말을 달려 학을 따라 나섰다.

학은 읍치를 벗어나 동쪽으로 날아가 산 넘고 물 건너 지금의 두암고택(斗巖古宅) 정침(正寢) 자리에 둥지를 틀고 알을 품고 있는 게 아닌가. 이를 본 김 공은 무릎을 ‘탁’ 치며 “아! 여기가 길지(吉地)로다”라며 여기에 터를 잡기로 작정하게 된다.

이곳의 본래 지명은 말(斗) 모양의 바위가 있어 두암(斗巖)으로 불리었고, 마을 주변의 산세(山勢)가 거문고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금산(琴山)이라 불렀는데 그 후 후손들이 ‘거문고(琴)를 벗(友) 삼아 풍류를 즐기는 곳’이란 뜻에서 ‘우금(友琴)’이라 부르게 됐다 한다.

삼판서고택-두암고택

김우익은 삼판서고택에서 태어나 우금으로 분가할 때 두암고택을 건립했다고 하니 삼판서고택과 두암고택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삼판서고택은 고려말부터 조선 초까지 세 분의 판서가 연이어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주택의 첫 주인은 고려 공민왕 때 형부상서(조선시대 형조판서)를 지낸 정운경(鄭云敬, 1305~1366)이다.

정운경은 사위인 공조판서 황유정(黃有定, 1343~1421)에게, 황유정은 다시 사위인 영유현령 김소량(金小良, 1384~1449)에게 이 고택을 물려주었는데 김소량의 아들 김담(金淡, 1416~1464)이 이조판서에 오르게 됐다. 이때부터 김 판서의 후손들이 이 고택에서 대를 이어 살게 되자 사람은 ‘삼판서고택’이라 부르게 됐다.

삼판서고택은 세분의 판서를 비롯하여 조선 개국 일등공신 정도전, 사헌부 지평 황전, 집현전 학사 김증 등 수 많은 학자와 명신들을 배출했고, 경향 각지의 많은 선비들과 교류해 조선시대 명문가로서 명성이 높았다. 두암고택을 지은 김우익은 삼판서고택의 세 번째 판서 김담의 6세손이다.

위엄의 상징 두암고택 정침(正寢, 본채)
위엄의 상징 두암고택 정침(正寢, 본채)

위엄의 상징 본채

건물의 배치는 정침(正寢)을 가운데 두고 동쪽에 사당 서쪽에 별당인 함집당(咸集堂)을 두었다. 정침이란 ㅁ자형 본채를 말한다. 본채는 또 안채(正寢)와 사랑채로 구분된다.

마당에서 ㅁ자형 본체를 바라보면 ‘웅장하다’ 해야 할까? ‘대단하다’ 해야 할지? 규모와 높이에 감탄하여 저절로 나오는 말이다. 기단은 큼직한 물돌을 3∼4단 쌓았고 그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아 네모 기둥을 세웠다. 그 옛날 김우익이 이 집을 지을 때 내성천 물돌을 주워와서 단을 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마당에서 사랑채로 오르려면 돌계단 다섯 계단을 올라가서 묵직한 댓돌을 디디고 나서야 사랑채 마루에 설 수 있다. 사랑채 마루에 서면 담장 밖으로 넓은 들과 내성천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그 옛날 사랑채 대감께서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를 외치던 곳으로 위엄의 상징이기도 하다.

또 마당에서 중앙 돌계단을 올라 중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가면 좌측에 소죽 쑤는 아궁이가 있고, 우측은 외양간이다. 안채 중문에서 또 5계단을 오르면 대청마루다. 여기는 안방마님께서 “여봐라!”를 외치며 하인들을 부리던 곳이다.

별당채 함집당
별당채 함집당

화목을 당부하는 함집당

별당인 함집당(咸集堂)은 정침채 보다 한 단계 아래 좌측 앞에 자리 잡고 있다. 홑처마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6칸 집이다. 내부는 마루를 깐 대청이 4칸이고 방은 나머지 두 칸을 차지하고 있다. 대청 남쪽 창은 띠살무늬 여닫이 분합문 두 짝을 달았다.

함집당은 김우익의 손자 진사(進士) 김종호(金宗灝)가 마련하였는데, 두암 선조의 뜻을 받들어 자손과 형제들이 길이 화목하게 지낼 것을 당부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편 강학을 위한 서당의 역할 또는 강회를 여는 장소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불천위(不遷位) 사당
불천위(不遷位) 사당

불천위(不遷位) 사당

정침 동쪽 약간 뒤편에 있는 사당(祠堂)은 입향조 김우익의 사후에 조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전면에 툇간을 설치한 맞배지붕이다. 본채에서 사당으로 통하는 옆문이 있고 툇간은 도리의 접시받침 등 건축양식이 특이하다.

한성부서윤을 지낸 김우익은 백성을 섬긴 목민관으로, 어진 다스림을 베푼 선비로 사림의 인정을 받아 불천위로 지정됐다. 두암고택 불천위 사당에서는 고위(考位, 아버지로부터 윗대 할아버지) 10월 15일, 비위(妣位, 어머니로부터 윗대 할머니) 5월 6일 불천위 제사를 지내고 있다.

김우익의 문과급제 교지(敎旨)
김우익의 문과급제 교지(敎旨)

두암후손 문과8장, 사마22장

두암의 후손들은 한성부서윤을 지낸 두암 선조를 서윤할배라고 칭한다. 서윤할배의 후손들은 학문에 힘써 문과 8장, 사마시 22장이 나와 가문이 크게 번성하여 영남 명문 반열에 올랐다.

서윤할배(金友益)는 광해 4년(1612) 문과 병과 제2인으로 급제해 성균관 학유(學諭), 학록(學錄) 학정(學正) 박사(博士)를 거쳐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에 올랐으며, 해미현감(海美縣監)이 되었다가 물러났다. 서윤할배 후손 중 문과(대과) 급제자는 다음과 같다.

김만주(金萬柱)는 1690년(숙종16) 식년시 병과 제9인으로 급제하여 병조정랑, 사헌부지평, 강원도사를 지냈다. 김방(金埅)은 1738년(영조14) 식년시 병과 제16인으로 급제해 예조정랑, 사간원정언, 자인현감을 지냈다. 김위(金㙔)는 1750년(영조26) 식년시 을과 제7인으로 급제해 사헌부지평, 이조정랑, 종부사정을 지냈다.

김약련(金若鍊)은 1774년(영조50) 증광시 병과 제15인으로 급제해 병조참의, 승정원좌부승지를 지냈다. 김영범(金永範)은 1804년(순조4) 식년시 병과 제13인으로 급제하여 사간원정언, 호일간을 지냈다.

김낙주(金樂周)는 1810년(순조10) 식년시 갑과 제2인으로 급제하여 양천현감을 지냈다. 김낙연(金樂淵)은 1825년(순조25) 식년시 병과 제1인으로 급제하여 돈녕도정을 지냈다. 김휘병(金輝柄)은 1888년(고종25)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지냈다.

서윤할배 후손 중 사마시(司馬試) 급제자는 다음과 같다.

김종호(金宗灝) 현종1(1660) 증광 진사, 김가주(金可柱) 숙종7(1681) 식년 생원, 김동주(金東柱) 숙종7(1681) 식년 생원, 김세렬(金世烈) 경종1(1721) 식년 생원, 김지(金墀) 경종3(1723) 증광 생원, 김정렬(金鼎烈) 영조9(1733) 식년 생원, 김훈(金壎) 영조14(1738) 식년 생원, 김기(金㙨) 영조16(1740) 증광 생원, 김시렬(金始烈) 영조29(1753) 식년 생원(일의), 김기(金夔) 영조39(1763) 증광 생원, 김상련

金象鍊) 영조47(1771) 식년 생원(일의), 김호(金土虎) 정조1(1777) 증광 생원(일의), 김구련(金龜鍊) 정조1(1777) 증광 생원(일의), 김준련(金駿鍊) 정조16(1792) 식년 생원(일의), 김락운(金樂澐) 철종6(1855) 식년 진사 (일부), 김휘숙(金輝璹) 고종7(1870) 식년 생원(일의), 김휘택(金輝澤) 고종16(1879) 식년 생원(일의), 김동규(金東奎) 고종22(1885) 식년 생원(일의), 김하진(金河鎭) 고종22 (1885) 증광 생원(이의), 김위규(金緯奎) 고종22(1885) 증광 생원(이의), 김락인(金樂仁) 고종22(1885) 식년 생원 (일의), 김홍규(金洪奎) 고종25(1888) 식년 진사(이부) 등이다.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