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되찾기 위해 뭉친 사람들

김성규(金性奎), 1904~1946

1927년 영주청년동맹과 신간회 영주지회 창립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일어난 영주 격문투쟁에 앞장섰다. 신간회 영주지회 집행위원, 총무간사와 영주 청년동맹 집행위원장을 맡아 지역 항일운동을 전개하며, 이를 통해 반군국주의 운동을 촉진하려 했지만, 일제 관헌에 발각되어 금고 8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후 무섬마을에서 교육 활동을 전개한다. 1928년 10월에 문맹 퇴치, 우리글 교육, 민족정신 앙양 등을 교육방침으로 하는 아도서숙(亞島書塾)을 설립하고 운영위원으로 활동한다. 함께 한 운영위원은 김화진·김종진·김종규·김계진·김명진·김광진·김희규·박찬하 등이다.

1929년 한해(旱害)가 발생하자, 신간회 영주지회와 사회단체 및 언론기관이 한해 구제연설회를 구성할 때, 동대(東隊)에 편성되어 영주면과 이산면을 담당하였다.

청록파시인 조지훈(본명 조동탁)은 김성규의 사위이다. 신혼 때에 이 마을에 머무르며 남긴 시 ̒별리̓가 유명하다.

신간회(新幹會) 영주지회

신간회는 일제강점기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통일전선에 의해 성립된 민족운동 단체이다. 1927년 2월 결성을 하며, 전국의 사회운동 단체들이 지지 운동을 전개하는 등 민족운동이 활성화되고, 전국적인 지회 설립으로 이어진다.

영주는 신간회 설립에 앞서 유림단(儒林團)의 독립청원운동, 제2차 유림단의거, 영주청년회, 영주청년동맹, 풍기소작조합 등 민족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해왔다. 신간회 영주지회는 이러한 단체들의 활동을 기반으로 설립되었다.

신간회 영주지회는 1927년 8월 29일 신간회 본부에서 온 홍명희(洪命憙)가 참석한 가운데 설립되었다. 서무부·재정부·정치문화부·조사연구부·조직선전부 등 5개 부서를 두고 활동하였는데, 회원 수가 많을 때는 500여 명에 달했다.

대표적인 활동이 구제 활동이다. 1928년 영주 지역에 가뭄으로 인해 큰 피해가 발생하고, 이재민이 속출하자, 영주청년동맹 등 지역 사회단체들과 함께 구제 활동을 전개한다.

구제비 모금을 통해 피해 주민에게 지원하는 등 많은 성과를 내기도 하였지만, 1928년부터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서 준비하던 행사가 무산되는 등 활동이 위축되었다. 특히 영주격문사건과 영주청년동맹을 비롯한 결사 활동으로 말미암아 신간회 영주지회의 전·현직 간부들이 검거되어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유적지와 축제

아도서숙
아도서숙

아도서숙(亞島書塾)
·문수면 무섬로 250

일제 강점기 무섬 사람들이 계몽활동과 항일운동을 벌인 근거지로 문맹퇴치, 우리글 교육,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던 곳이다. ‘아도(亞島)’는 ‘아세아의 조선반도 내 수도리’란 의미이다.

아도서숙 현판
아도서숙 현판

1931년 왜경 1개소대가 몰려와 무섬 청년들을 굴비처럼 한 오랏줄에 엮어 외나무다리를 건너 압송한다. 결국 1933년에 이곳에 불을 질러 강제로 폐쇄한다. 현재의 건물은 옛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무섬외나무다리축제
무섬외나무다리축제

·무섬외나무다리축제
2022년 10월 1일(토), 2일(일)

‘한국의 아름다운길 100선’ ‘한국관광의 별’로 선정된 외나무다리와 무섬마을을 배경으로 개최하는 축제이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가마와 꽃상여를 통해 생(生)과 사(死)를 연출하며 인생사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해우당과 만죽재 고택 등 ‘□’자형 가옥과 까치구멍집, 겹집 등 다양한 형태의 집과 거기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삶의 지혜로움을 느끼게 해 준다.

※ 참고 자료: 영주디지털문화대전

[미니픽션]
외나무다리 건너편 세상

“아부지요. 아도서숙에 불이 났다이더.”
“불이라이! 그게 뭔 말이로.”
“그 자슥들이 불을 질렀다니더.”
“누가?”
“읍내 순사들이 보초를 서고, 면소골에 사는 그 앞잽이 놈 있잖니껴. 그놈이 찔렀다니더.”
“뭐라꼬! 얼러 가 보자.”

시동생을 앞세우고 아버님이 나서자, 식구들이 모두 따라 나섰다. 집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샛방에 우두커니 앉아 바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꽉 닫은 방안은 후덥지근하기만 하다. 모두 배를 곯아 힘든 마당에 무얼 그리 배불리 먹었는지, 매미 소리만 그칠 기색이 없다.

안마당으로 내려 가본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일을 시작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처녀 적엔 ‘어느 집이든 복을 데려간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살아왔지만, 막상 시집 와보니, 시누이만 졸졸 따라다니는 신세이다.

문득 어제 시동생과 아버님의 대화가 생각이 났다.

“그래, 잘 갔냐?”
“예! 멱실까지 같이 갔다가 왔니더. 거기에 누가 와서 기다리더이다. 형님하고 비슷한 또래로 보였어요.”
“그래….”

그리고 아버님은 말이 없었다.

“아버님요. 그럼 만주로 가느….”
“쉬……”

아버님은 입단속을 하시는지, 시동생의 말을 막았다. 아마도 오늘 일을 눈치 채고 어제 밤 먼 길을 떠난 것 같다.

“집에 누구 아무도 없니껴?”

사랑 앞에서 소리가 났다.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서다가, 사랑마루에 걸터앉은 낯선 사람이 있어, 얼른 문을 닫았다.

“아이고! 새댁일세. 서방님은 지금 없을 거고…. 그래 어디 간다는 말도 못 들었지요? 들었다 해도 말 않겠지요? 하지만 협조하는 게 좋을 게시더.”

그때였다.

“이놈! 여기가 어데라고 얼씬거리노.”
아버님이 돌아오신 모양이었다.
그렇게 시집 온지 열흘도 못되어 남편과 생이별을 했다.

남편은 예전이라면 과거에 급제는 충분히 했을 거라고했다. 서울 유학까지 다녀온 마을에서 몇 안 되는 인재라고 했다. 하지만 서울 생활도 계획보다 일찍 관두고, 영주 읍내에서 어떤 단체를 결성하고, 그 일을 하다가, 5년 전에 마을로 들어와 마을 청년들과 아도서숙을 만들고 아이들을 가 르치는 일을 해 왔다고 한다.

그리고 이태 전에도 급습한 왜경들에게 잡혀 곤욕을 치룬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도 낮에 온 그 앞잡이가 순사들을 몰고 외나무다리를 건너 왔었다고 했다.

“마을 청년들을 다 잡아 갔어. 한 오랏줄에 굴비처럼 엮어 매고는 끌고 갔는데, 그땐 외나무다리가 그렇게 밉더라니까.”

그 후 ‘굴비처럼’이란 말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굴비가 된 남편을 보지 않은 것이 늘 고마웠다.

그 다음해 봄에 아들 용이가 태어났다. 모두들 남편을 빼어 닮았다고 했다. 용이를 키우랴 집을 돌보랴 바빴지만,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남편의 안부가 늘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가끔 시동생이 남편의 기별을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늘 긴가민가했다. 속이 깊은 시동생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얘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주변은 모두들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특히 집안의 동서들의 배려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밤에 시간 날 때 읽으라고 전해주는 두루마리는 나의 마음을 바로 잡기에 충분했다.

부인언행록도 즐겨 읽는 것이었지만, 화전가나 시집살이를 적은 내방가사, 사돈지는 늘 베껴 쓰곤 했다. 그 내용은 내가 겪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내가 가보지 못한 삶을 얘기하는 늘 가슴을 울리는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용이가 이제 일곱 살이 되었다. 용이는 늘 강가에 가서 놀기를 좋아했다. 친구들과 어울릴 때는 아주 활달했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때엔 무언가 불안했다. 항상 먼 데를 바라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때쯤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어멈. 미안하구나. 아범 올 때까지라도 버티려고 했는데…. 용이를 부탁한다.”

그때부터 모든 집안일을 스스로 감당해내야 했다. 시동생이 많이 돌봐 주었지만, 이제 장가를 가서 한 가정을 꾸리는 입장이라 내 스스로가 조심을 했다. 조심을 하는 것이 또 하나 있었다. 용이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끼니때가 되면 용이를 찾아다녔다.

이젠 용이도 내가 왜 그렇게 하는지를 아는 것 같다. 하루는 밭에 나갔다가 헐레벌떡 집으로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사랑마루에 앉아 먼 데를 바라보고 있는 용이를 보았다. 그때 그 용이는 일곱 살 아이가 아니었다. 응석을 부려야 할 아이인데….

“형수님. 용이를 너무 그렇게 키우지 마세요.”
“서방님 왜요? 용이가 뭔 일을….”

“아니 아니요. 점심 때, 밥을 먹고 가라하고 밥상을 차리는데, 없어졌지 뭡니까? 형수님의 뜻을 잘 알아요. 하지만 용이가 너무 안쓰러워서요. 그리고 내년엔 학교도 보내야 하고….”
“학교요? 왜놈들이 하는?”

“왜요? 집에 그냥 두려고요? 용이도 이제 사회에 적응을 해야 해요. 앞잡이 놈들이 상전처럼 설치는 세상을 용이도 알아야 해요. 저 외나무다리 밖의 세상을 알아야 해요. 세상이 그런데 우에니껴!”

그 다음해 용이는 학교에 갔다. 하지만 학교에서 어떤 것을 배우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용이가 얘기를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이가 6학년이 되었다. 광복을 맞이하던 그해였다. 하지만 용이 아버지의 소식은 없었다. 용이 아버지가 떠날 무렵 마을을 떠났던 윗마을 사람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그녀도 그 후 용이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용이는 요즘 부쩍 강가로 자주 나간다. 강변에 앉아 무얼 그리는 것 같은데, 가까이 가보면 다 뭉개고 없다. 그래서 이젠 나도 멀리서 용이의 뒷모습과 그 너머의 외나무다리를 볼 뿐이다.

김덕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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