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암고택은 김담의 6세손 김우익이 살림날 때 지은 집
김우익의 본관은 선성, 호는 두암, 삼판서고택에서 태어났다

우금이란 지형이 거문고 닮아 거문고(琴)를 벗(友) 삼는다는 뜻
​​​​​​​백성을 섬긴 목민관으로 영원군수, 한성부서윤, 해미현감 역임

영주시 이산면 신암2리, 내성천에서 바라본 우금촌
영주시 이산면 신암2리, 내성천에서 바라본 우금촌

우금촌 두암고택

두암고택은 영주시 이산면 신암2리 우금마을에 있다. 최근 이전 복원된 이산서원에서 반포의 언덕을 넘으면 우금마을이 보인다. 고택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500년 수령의 늙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우금마을의 오랜 역사를 귀띔해 주는 듯하다.

고택 솟을대문 앞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1호」라고 새긴 나지막한 표석이 있고 그 옆에는 「우금촌 두암고택」 표지판이 있다.

표지판에 “우금촌 두암고택은 ㅁ자형의 정침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사당, 죄측에는 독립된 사랑채인 함집당(咸集堂)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침은 조선 선조 23년(1590)에 두암(斗巖) 김우익(金友益, 1571〜1639)이 19세 때 분가하면서 지은 집이며, 사당과 함집당은 후대에 지어졌다.

함집당은 김우익의 손자 김종호(金宗灝)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이 고택은 조선시대 살림집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조선시대 가옥과 생활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적었다.

마을 앞에는 내성천이 북-남으로 길게 흐른다
마을 앞에는 내성천이 북-남으로 길게 흐른다

역사 속의 우금마을

우금은 지금 행정구역상 영주시 이산면 신암2리에 속한다. 마을 앞은 남북으로 길게 내성천이 흐르고 그 주변은 넓은 이산평야가 눈이 모자랄 정도다. 평야 동편 기슭 야산 구릉(丘陵)을 배경으로 형성된 우금마을은 예로부터 사족(士族)이 터를 잡을 만한 조건을 잘 갖추고 있다.

이곳은 조선 태종 13년(1413)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에 속했고, 1650년경 군(郡)의 행정구역을 방리(坊里)로 정비할 때 영천군 말암리(末巖里) 우금방(友琴坊)이라 부르다가 1750년경 면리(面里)로 개편되면서 말암면 우금리가 됐다.

1896년(고종33) 행정구역을 8도제에서 13도제로 개편할 때 경상북도 영천군 말암면 우금리가 됐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이산면 신암2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을 둘러싼 지형이 거문고를 닮아 우금(友琴)이라 부른다
마을을 둘러싼 지형이 거문고를 닮아 우금(友琴)이라 부른다

우금과 두암의 지명유래

입향조 김우익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이곳 지명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짐작해 보건대 김우익이 자신의 호를 두암(斗巖)이라 한 것은 이곳에 말(斗) 모양을 한 ‘두암(斗巖)’이라고 부르는 상징적인 바위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진다.

실제 마을 앞 들판에 말 두(斗)자 두암(斗巖)이 우뚝 서 있었는데 19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농지정리를 할 때 땅에 묻어버렸다는 안타까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어느 마을이든 오랜 역사를 가진 마을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마을 이름도 여러 번 바뀐 것으로 전해진다.

이 바위를 아주 옛날에는 말(斗)과 같다 하여 두암(斗巖), 멀리서 보면 끝만 보인다고 말암(末巖), 바위가 멀리 있다고 원암(遠巖) 등으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신암(新巖)으로 개칭됐다.

우금(友琴)이란 지명은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역임한 김우익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이곳 지형이 거문고를 치는 형상이므로 ‘거문고(琴)를 벗(友)으로 삼는다’는 뜻에서 우금(友琴)이라 했다고 전한다.

두암고택은 1975년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81호로 지정됐다
두암고택은 1975년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81호로 지정됐다

김우익은 누구?

김우익(1571∼1639)의 본관은 선성(宣城), 자는 택지(澤之), 호는 두암(斗巖)이다. 우익은 삼판서고택의 세 번째 판서인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 1416〜1464, 이조판서)의 현손인 윤의(允誼)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한양조씨로 충의위(忠義衛) 양(諒)의 딸이다.

그는 영천(榮川, 옛 영주) 읍내 구성산 아래에 소재한 삼판서고택(三判書고宅)에서 태어나 19세에 장가들어 살림을 날 때 이곳 우금에 터를 잡았다.

그는 광해군 4년(1612)에 문과에 급제하여 영원군수, 인조 16년(1638)에 한성부서윤, 해미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함집당을 지은 김종호는 두암의 손자로 자는 심원, 호는 함집(咸集堂)당이다.

두암의 관직생활

김우익은 십여 세에 권우(權宇, 世子師傳지냄)에게 경서를 배우고 뒤에 김대현(金大賢, 호:유연당)에게 배웠다. 21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처참한 난리통에 늘 소년 우익의 슬기로 난민을 구하고 가문을 지켰다. 이 무렵 부친이 역질을 만나 위독할 때 변(便)을 맛보아 증세를 가늠하며 효성을 다했다.

상사를 당해서는 손수 장사를 지내고 십리가 넘는 길을 3년동안 날마다 성묘를 다녔다. 그는 난리가 평정되자 가사(家事)는 부인에게 맡기고 글공부에 전심하여 광해4년(1612) 문과에 병과 제2인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學諭)에 보임되고, 학록(學錄) 학정(學正) 박사(博士)를 거쳐 거산도찰방(居山道察訪)이 되었다. 동8년 황해도사 겸 춘추관기주관, 이듬해 영원(寧遠) 군수에 부임했다.

1614년 형조‧병조정랑, 그 이듬해 진주‧안동의 제독(提督:교육감독관)이 되었다. 인조 2년(1620) 이괄(李适)의 반란에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왕이 있는 공주를 향해 행군을 서둘던 중 난리가 평정됨에 군사에 쓰려던 곡식과 포목을 고스란히 나라에 바쳤다.

인조16년(1638) 봄 봉상시주부(奉常寺主簿), 여름에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에 옮겼으며, 가을엔 해미현감(海美縣監)이 되었다가 물러났다.

백성을 섬긴 목민관

두암은 영원군수, 해미현감, 황해도사를 역임했는데 부임한 지 몇 달이 안 되어 칭송이 뜨거웠다. 영원(寧遠, 평안남도 대동강 상류) 군수 시절 본 고을은 관북과 관서의 틈에 끼어있어 땅이 구석지고 백성이 적었다. 유민(流民)이 들어와 사는 것을 ‘입작(入作)’이라 했는데 그들은 잘 보살피면 안주하여 생업에 힘쓰고, 그렇지 않으면 흩어지곤 하였다.

광해 때 정사가 어지러워 연달아 무변(武弁)이 수령으로 와서 탐학(貪虐)이 심했기에 토민들도 차츰 흩어지고 유민은 자취가 끊겨 마을들이 온통 황폐해 있었다. 그가 군수로 부임할 때 민호가 겨우 30호로 관에 비축된 곡식이 보름을 지탱하기 어려웠고 창고는 부정하게 축낸 것이 수천 석에 이르고 있다. 그가 부임한 지 두어달이 지났을 무렵 어진 다스림(善政)을 듣고 백성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온 고을이 안심하고 부지런히 살림을 가꾸었으며 민생에도 걱정이 없고 검소 절약으로 관용도 넉넉해졌다.

얼마 아니하여 해묵은 포흠(逋欠)을 모두 채워 메우매 감사(監司)가 그 치적을 조정에 알렸다. 그중에도 특별한 공적은 그곳에서 처음으로 논농사를 짓게 한 일이다. 당시 그곳 사람들은 논농사를 모르다가 군수가 가르쳐준 방법으로 물을 끌어들여서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니 3년이 지나자 곡식이 창고에 넘칠 지경이었다.

어진 다스림(善政)을 베풀다

해미(海美:현 서산)에서는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나왔으나 백성들이 깊이 우러렀다. 해미는 충청도 해변의 작은 고을로 땅이 좁고 백성이 가난하여 예로부터 다스리기 어렵기로 알려진 곳이다.

그는 부임하자 피폐한 민생의 안정을 위하여 베푼 시책이 상사에 거슬려 얼마 아니하여 체직되어 떠나올 때 백성들이 울었으며, 한평군(韓平君) 이경전(李慶全:이상해의 아들 판서)은 시를 주어 만류했다. 이경전은 그때 예산 별업에 머물고 있었는데 해미는 예산에서 한나절 길이라 그의 치성(治聲)을 익히 들어 알았기 때문이다.

김우익(金友益)이 황해도사(黃海都事)로 부임했을 때는 최기(崔沂, 해주목사)의 옥사를 겪은 직후여서 그곳 황해도 지방에 귀양살이하는 인사들은 모두 최기의 일파로 지목된데다가 황해감사 백대형(白大珩)이 부추겨 그 지방에 유배되어 있는 인사들은 일망타진으로 불측한 화를 당할뻔했는데 그가 남모르게 주선하여 피화(被禍)에 직면된 많은 사람들을 구원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뒤 판서(判書) 남이공(南以恭)이 비로소 그런 사실을 알고, 그(友益)를 중요한 자리에 천거하려던 중 부음을 듣고 여러 대신들과 함께 못내 애석히 여겼다.

그는 효성과 우애가 두터워 그의 형이 중년으로 죽으매 형수를 어머니처럼 섬겼고, 그 조카들을 친자식처럼 돌보았으며, 난리에 어버이를 잃은 생질들도 모두 거두어 길러 성취시켰다.

그가 향리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는 선조 선양사업으로 문절공(文節公) 담(淡) 선조의 신도비(神道碑, 글 張顯光)를 세우고 그 아래 4대의 묘표(墓表)를 세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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