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는 금계를 “그의 진면목은 교육자”라고 밝혔다

황준량의 유풍이 남아있는 풍기 금양정사와 욱양단소
황준량의 유풍이 남아있는 풍기 금양정사와 욱양단소

단양군수, 향교 자주 침식-공이 옮겨 세우니 훌륭하고 아름다워
신령현감, 문묘증축 힘써 권면·학사(學舍) 창건 ‘백학서원’ 편액

성주목사, 영봉서원·향교중수·공곡서당·녹봉정사 등 건립 및 편액
황준량, 백운동서원 건립부터 깊은 관심·사촌 황빈 조미 75석 희사

금선계곡(錦仙溪谷)과 금선정(錦仙亭)이 아름다운 것은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이란 사람 때문이다. 그 옛날 이곳을 경영했던 황준량은 목민관으로서 ‘선정과 흥학을 제대로 실천한 선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금계가 47세에 별세하자 퇴계는 몹시 아끼던 제자를 잃은 것에 대하여 크게 비통해하면서 정성을 다해 그를 기리고 아까워했다. 퇴계는 명정(銘旌)을 직접 쓰고 만사(挽詞)와 제문을 짓고 행장(行狀)을 지었다.

퇴계가 쓴 금계 행장(行狀)

황준량은 1540년(중종35) 문과급제 후 성주훈도를 비롯해 상주교수·경상도감군어사·신령현감·단양군수·성주목사 등 주로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누구보다 흥학(興學) 즉 지역 교육 사업에 큰 관심을 두었고 상당한 성과를 보여준 인물이다.

「경국대전」에서 규정하고 있는 수령의 중요한 임무인 ‘학교흥’에 충실했던 그였다. 황준량의 교육 사업에서 주목할 것은 관학인 향교뿐만 아니라, 이 시기 퇴계에 의해 보급·확산되어 가는 사학인 서당·서원 교육에도 힘썼다는 점이다. 퇴계가 쓴 금계의 행장에 지방관 시절 건립·중수한 학교와 교육 관련 내용이 아래와 같이 수록되어 있다.

금계가 신령현감 시절, 학교에 더욱 유의하여 문묘를 새로 증축하였고, 힘써 권면하고 훈도했다. 또한 옛 마을에 나아가 학사(學舍)를 창건하여 ‘백학서원(白鶴書院)’이라 편액하고, 서적을 보관하고 전답을 배치하니 선비들의 마음이 흥기하여 사모하였다.

단양군수 시절, 향교가 산간(山澗)에 닿아있어 자주 침식되는 근심이 있었다. 공이 옮겨 세우라고 명하여 군치 동편에 자리를 구하니, 재목도 훌륭하고 제도 또한 아름다워 온 고을의 면목이 바뀌니 재물이 부족하다고 하여 풍화의 근원을 느슨하게 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또 군의 전현(前賢)인 제주 우탁의 경학과 충절이 모두 세상의 사표가 될 만하다고 여겨 문묘의 서편에 별도로 집 한 칸을 지어 제사를 드렸다.

성주목사 시절 학교를 일으키는 한 가지 일을 앞의 두 고을에 비하여 더욱 쏟고 정성을 다하였다. 이보다 먼저 목사 노경린(盧慶麟)이 영봉서원(迎鳳書院)을 예전 벽진(碧珍)의 터에 건립했는데, 공이 인하여 꾸미며 아름답게 하였고, 또 문묘를 중수하여 예전 규모를 확장하였다.

교관(敎官) 오건(吳健)과 함께 강학 활동을 할 때 마을 동편에 공곡(孔谷)이라는 터가 있었는데, 제생들이 서당을 세우기를 원하므로 인하여 공이 흔연히 집을 짓고 공곡서당(孔谷書堂)이라 편액하였다. 또 성주의 팔거현에 녹봉정사(鹿峰精舍)를 세우고 다양한 방면으로 훈도하니 각각 그 자질의 고하에 따라 성취한 사람들이 많았다. 처음에 상산(商山) 주세붕이 풍기군수가 되었을 때, 공이 후진으로서 오가며 많이 논의 하였는데 그 다르고 같음과 따르고 어긋나는 사이에 사람들이 벌써 그 견식이 명확함을 알았다.

퇴계는 그의 행장에서 향교중수, 서당·정사 건립, 서원 운영의 참여 등 그의 흥학에 대한 성과를 가장 많이 기록함으로써, 목민관으로서도 혁혁한 치적을 남겼지만 그의 진면목은 교육자였음을 밝히고 있다. 황준량은 뛰어난 학자였지만 특히 지방관 시절에 도학(道學)에 심취하여 당시 사림계의 주된 관심사인 서당·서원의 보급과 운영 등에서 큰 성과를 이루었다.

신령현감 시절 건립한 백학서당의 복원된 현재 모습
신령현감 시절 건립한 백학서당의 복원된 현재 모습

백학서당과 금계 황준량

황준량은 1555년(명종10) 지역 사림들과 더불어 경북 영천시 화남면 벽학산 아래 양강 위에 지역 자제들의 강학의 장소로 백학서당을 설립하였다.

황준량은 서당 건립 과정에서 당시 사림계의 향촌 내 교육활동의 방향을 이끌고 있는 이황에게 여러 차례 질문하여 절목(節目)을 상정(詳定)하고, 나아가 그 이름을 청하여 ‘백학서당’이라는 명호(名號)를 받았다. 이후 황준량은 퇴계가 정한 학규로써 학문을 권장하고 권면하는 본보기로 보였다. 아래의 글은 ‘백학서당’을 안내하는 글의 일부이다.

백학서당이 만들어진 시기는 금계 황준량의 신녕현감 재임기간인 1552년으로 추정된다. 처음 서당이 세워진 곳의 산 이름은 양각산(羊角山)으로 영천시 화남면 대천리와 화산면 가상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226m이며 산의 시작은 화산(華山)이다.

영천시 화남면과 신녕면에 걸쳐있는 화산의 한 자락이 급격히 남으로 방향을 틀면서 만든 백학산은 한 마리의 학이 날개 죽지를 펼친 형상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양각산에 퇴계와 금계 두 분이 오른 뒤로 이름을 백학이라 명명하였다 한다.

금계 황준량은 실로 퇴계 이황 선생의 빼어난 제자인데, 일찍이 선생의 문하에 우러러 품의하여 (서당의)이름을 여쭈었더니 퇴계 선생께서는 ‘백학서당’이라 명명하시고 손수 ‘백학서당’ 이라는 넉자의 큰 글자를 쓰셔서 편액 하셨다.

단양군수 시절 옮겨 세운 단양햑교의 현재 모습
단양군수 시절 옮겨 세운 단양햑교의 현재 모습

성주목사 시절

황준량이 지방관으로서 교육활동이 가장 두드러진 시기는 성주목사 시절이었다.

이 시절 황준량은 이전에 제향 인물선정과 위치 문제 등에 관여하였던 영봉서원(迎鳳書院)과 향교를 중수하였고, 나아가 공곡서당, 녹봉정사를 건립하여 활발한 교육활동을 전개했다.

황준량의 서원 활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성주의 영봉서원 건립 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봉서원은 이황의 서원 보급 운동 당시에 건립된 대표적인 서원이다. 영봉서원은 1558년(명종13) 8월에 성주목사 노경린이 성주 사림들의 서원 건립 요청을 수용하여 다음 해 여름 완공하고 편액을 영봉서원이라 하였다. 이 서원 건립에는 노경린과 함께 이황과 황준량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문묘를 중수하고 확장했던 성주향교 현재 모습
문묘를 중수하고 확장했던 성주향교 현재 모습

두 사람은 서원 건립 과정에서 논란이 된 제향 인물 선정과 위차 논쟁 및 ‘영봉지’ 편찬 문제 등 다방면에서 편지를 통해 서로간에 의견을 교환하고 이를 제시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특히 황준량은 영봉서원 건립에 있어서 노경린과 퇴계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퇴계의 뜻이 충실히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황준량은 1560년 고을 동쪽 공곡서당(孔谷書堂)을 세워 선비들을 가르치고 승려를 모집하여 수호하게 하였다. 경북 칠곡군 지천면 창평리에 녹봉정사 구지(舊地)가 있다. 여기에 표지판에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있어 소개한다.

「녹봉정사는 1561년(명종16)에 퇴계 이황의 고제(高弟) 금계 황준량이 성주목사로 부임하여 덕계 오건과 함께 향촌 사림의 협조를 얻어 녹봉사(鹿峰寺) 터에 창건한 강학지소이다.

남명의 제자인 오건이 직접 훈도를 담당하고 퇴계의 제자인 황준량이 지도·감독하여 성주를 중심으로 한 영남 중부지역 성리학 강학의 중심지로서 기능하였으나 이후 성쇠를 거듭하여 19세기 초에 다시 전면적인 중수가 이루어졌고 강학소의 기능을 회복하여 성주 칠곡 지역의 학문적 중심지역 역할을 수행했다.

황준량이 성주 팔거현에 세운 녹봉정사의 일부
황준량이 성주 팔거현에 세운 녹봉정사의 일부

황준량의 서원교육론

황준량은 퇴계의 서원교육론을 충실히 계승했다. 그는 관학은 제도와 규정에 얽메이고 과거와 관련된 곳에서 참된 성리학 즉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공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이를 위한 새로운 공간 즉 서원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는 퇴계의 서원제에 대한 인식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퇴계의 위기지학은 우리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로서의 지(知)・덕(德)・행(行)을 실천(實踐) 궁행(躬行)하는 것을 말하며, 학문의 본질적 목적을 추구하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황준량은 이러한 인식 속에서 그는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 건립에서부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황준량은 백운동서원 건립 후 주세붕을 따라 알묘한 바 있고, 서원과 관련한 다수의 시를 짓기도 하였다. 나아가 「죽계지」 편찬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는데 이에 주세붕은 황준량에게 답장을 보내 백운동서원은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모방하여 체제를 갖추었으며, 안향을 배향하는 것은 주자를 숭상하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밝혔다.

이를 통해 보면 황준량은 백운동서원 건립 당시부터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황준량의 서원 건립의 관심은 그의 사촌인 진사 황빈(黃彬, 황한충의 자)이 서원 운영을 위해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는 조미(租米) 75석 희사로 이어졌다. 황빈은 서원뿐만 아니라 향교를 이건할 때도 많은 협조를 한 사람이다.

황준량은 경상감사 안현이 백운동서원의 교육기관으로서의 안정적 운영을 위한 대책으로 ‘사문입의(斯文立議)’를 작성할 때도 6인 중의 1인으로 참여하였으며 나아가 서원 운영에도 일정하게 개입하고 있었다.

금계 황준량은 지방 목민관으로서 선정과 흥학을 제대로 실천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스승 퇴계로부터 크게 아낌을 받았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47세란 젊은 나이로 요서(夭逝)하는 바람에 스승으로부터 “하늘이여! 어찌 이리도 빠르게 이 사람을 빼앗아 가시나이까?…”라는 절규를 담은 제문을 짓게 하였다. 또한 관을 덮는 명정을 쓰고 행장을 지었으며 제문과 만사를 짓는 각별한 제자 사랑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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