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신교육의 발상지, 소흥학교

소흥학교(沼興學校)

소흥학교 1호 졸업장
소흥학교 1호 졸업장

소흥학교는 신교육의 발상지(發祥地)이다.

서울의 보성(普成)학교와 대구의 계성(啟聖)학교는 같은 해이고, 대구의 신명(信明)학교 보다는 한 해, 안동의 협동(協東)학교보다는 두 해가 빠른 영남지역에서 최고 오래된 학교이다.

1906년 3월 고종의 「흥학조칙(興學詔勅)」과 경상북도 관찰사 신태휴의 「흥학훈령(興學訓令)」이 발표되면서, 순흥군수 정재학에 의해 1906년 4월 7일 신식학교인 흥주소학교(興州小學校)가 설립되었다가, 새로 부임한 김창수가 관립(官立)이었던 흥주소학교를 사립(私立) 소흥학교로 개칭한다.

그 후 1911년 일제(日帝)는 이 학교를 폐교하고, 순흥공립보통학교로 이름을 바꾼다. 그리고 1938년엔 순흥심상소학교, 1941년에 순흥국민학교, 1996년에 순흥초등학교가 된다.

3년제였던 소흥학교는 1909년 첫 졸업생을 배출시켰다. 그런데 이 학교는 신교육을 제공뿐만 아니라, 장차 신교육을 주도할 교사를 양성하는 사범(師範) 과정도 있었다. 이 ‘사범속성과’의 교과 과정은 한문, 작문, 수신, 지지, 역사, 물리, 경제, 산술, 어학, 체조 등이었다.

1930년 신축하여 1984년 철거
1930년 신축하여 1984년 철거

학교를 만든 사람들

소흥학교 초대교감 정호익(1937년)
소흥학교 초대교감 정호익(1937년)

초창기 학교를 운영한 사람들은 제1호 졸업장에 나타나 있다.

1909년 6월 30일 발행한 제1호 졸업장은 ‘순흥군 내죽면 성북리 2통 8호’에 주소지를 둔 이호인(李灝仁)이었다.

졸업장엔 수업과목과 가르친 사람들이 있었다.

교장 김병호(金秉浩), 교감 정호익(鄭鎬益), 교사 이윤갑(李潤甲)·이만하(李晩夏)·송주면(宋柱冕)이었다.

이윤갑은 1903년 한성사범학교를 입학하여 졸업한 뒤, 1905년부터 교동보통학교와 계동보통학교를 거쳐 소흥학교에 온 교사였고, 이만하는 고종 때에 진사였는데, 1907년 탁지부측량견습생과 탁지부 기사를 하다가 온 신교육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 후 교감 정호익과 이 교사들은 1908년 조직된 교남교육회에 참여하며, ‘인재양성이 나라를 살리는 국권 회복의 밑거름’이라는 계몽운동에 참여한다.

100주년 기념탑(2006년)
100주년 기념탑(2006년)

계몽운동과 신교육

한말 계몽운동은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국가의 독립을 보호·유지·회복하고, 다른 한편으로 국내 보수지배세력의 횡포로부터 기층민의 인권을 보호하고 신장하기 위해 기층민의 의식을 계발하기 위한 조직적인 운동’이다.

이 운동은 1904년 국민교육회로 시작하여,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하면서, 1906년 4월 설립된 대한자강회의 지방지회가 전국 각처에 설립되어 유력한 유생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참여하였고, 1907년 11월 대한자강회를 계승한 대한협회가 설립되어 활동하였다.

그리고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는 1908년 서울에서 활동하던 영남 지방 인사들이 상호 간의 친목과 출신 지역에 계몽사상의 보급을 위하여 조직한 모임이다. 여기에 영주·순흥·풍기의 선각자도 여럿 참가한다.

이들은 1906년 고종의 흥학조칙(興學詔勅)에 힘을 얻어 신교육 구국운동을 전개하면서, 영주 지역에 신교육기관인 1906년 소흥학교(紹興學校), 1908년 안정학교(安定學校, 풍기초), 1909년 강명학교(綱明學校, 영주초), 1909년 조양학교(朝陽學校), 1910년 내명학교(內明學校, 내명초) 등을 설립 또는 운영을 한다.

■ 유적지

봉서루(현재)
봉서루(현재)

봉서루(鳳棲樓)
·순흥면 지동리 538번지

고려 시대 건립된 누각으로 영남에서 가장 유서 깊다. 순흥의 주산인 비봉산(飛鳳山)의 봉황이 날아가면 고을이 쇠퇴해진다고 하여 ‘봉황(鳳)이 쉬어(捿)가는 누각(樓)’을 지었다고 한다.

순흥면사무소가 된 봉서루(1937년)
순흥면사무소가 된 봉서루(1937년)

1906년 소흥학교를 개교하며 이 누각을 교사(校舍)로 사용하였는데, 1927년 교사를 증축하다가 화재가 발생하여, 누각 일부를 순흥면사무소 건물로 사용하다가, 2005년 본래의 위치인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겨 지었다. 고려 공민왕의 친필 “흥주도호부아문(興州都護府衙門)” 현판이 있었다.

참고「순흥초등학교 백년사」
 

[미니픽션] 소흥학교를 만든 사람들

교림은 소흥학교 교감 장호익을 봉도각에서 만나자는 기별을 넣고,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집에서 봉도각으로 갈 때마다 늘 지나는 길이지만, 허물어진 관아를 볼 때마다 한숨만 나온다. 재작년 왜병들이 의병들을 토벌한답시고 불을 질러 버리지 않았던가? 그리고는 의병들이 한 짓이라고 공포를 했었다.

‘나쁜 놈들!’
호익은 벌써 나와 있었다.

“선생님!”
“아, 이 사람아! 선생이라니….”

“하지만 저희에겐….”
“아닐세. 호칭이 뭐 그리 중요한가. 서로 분별만 하면 되지. 난 참봉이면 족하네.”

“그래도…. 그런데 오늘 달리하실 말씀이라도?”
“내일이 우리 소흥학교의 첫 졸업식이 아닌가?”

교림은 품 속에서 봉투를 꺼내 호익에게 건넨다. 호익은 몇 번 숨을 들이켜며 하늘을 한번 쳐다보더니 봉투를 받는다. 그리고 교림에게 묵례한다.

“너무 그러지 말게나.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 말고 뭐가 있는가? 난 그저 자네들한테, 고마울 따름이네.”

“요긴하게 잘 쓰겠습니다. 한양 볼일 잘 보셨는지요?”

“내가 뭐 특별한 일이 있는가? 세상 돌아가는 걸 공부나 하려는 거지. 참! 교남교육회 회원이시고, 한성사범학교 나온 박- 뭐더라?”

“아! 박성길 선생 말씀이지요?”
“맞아! 박 선생. 근데 요즘 일이 쉽지 않은가 봐.”

“아니, 왜요? 고향에 학교를 세운다고 들뜬 편지를 며칠 전에 받았었는데요.”
“지난해 8월, 사립학교령이 내렸잖는가. 그래서 이제는 학교 설립인가를 내는 게 만만치가 않은가 보네.”

“그렇지요? 얼마 전 안정학교 장상희 교감을 만났는데, 5월에 개교한 게 여간 다행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하더군요.”

“점점 조여오는 게 심상치가 않아.”

햇살이 어느새 가슴까지 밀려왔다. 나무 그늘로 자리를 옮기며 교림은 재작년 정미년(1907년) 항쟁 때에 불타지 않은 이 왕버들이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엔 기차를 타 보셨나요?”

“남대문역까지 갔다가 돌아섰다네. 김천에서 순흥까지 길도 그렇지만, 왜놈들이 그 철길을 만든 까닭을 생각하니 영 내키지 않더구먼. 참, 이만하 선생은 잘 지내시고?”

“예! 이 선생은 참 침착하지요. 어떻게 그렇게 꼼꼼한지….”

“정부의 재무를 총괄하던 탁지부에서 일하던 사람이 아닌가. 초창기 학교에 필요한 사람이지. 재작년 초군청직인을 받으러 갔을 때, 내가 조정에서 누굴 알겠는가? 이 선생이 앞장서서 다 해주었지. 그때 소흥학교 이야길 넌지시 했었지. 큰일 할 사람한테, 몹쓸 짓을 한 거야.”

“아, 아닙니다. 이 선생은 고향에 돌아온 걸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는데요.”

“송주면 선생은?”
“송 선생은 학생들에게 열정이 각별하지요. 하루는 원두들(봉화읍 문단리)에 사는 학생에게 일이 생겼다고, 밤새 50리 길을 다녀왔다고 하더군요.”

“그렇지. 대단하시지. 이윤갑 선생도 늘 미안한 분이야. 그때 근무하던 곳이 서울 계동학교였지?”

“예. 요즘은 교육 과정에 대해선 저희의 선생님이지요. 요즘은 교과서 검정제도에 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합니다.”

“그래서 늘 미안하고 고마운 게지. 작년 교남교육회에 참가했을 때, 와서 인사를 허더구먼. 속수 사람이라고.”

“지금쯤, 올 때가 되었는데요. 집에 잠시 다녀온다고 했는데….”

둘은 속수마을 쪽을 바라보았다. 산모퉁이를 돌아오는 신사가 보였다.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게, 멀리서 보아도 이윤갑이었다.

“오랜만이오, 이 선생.”
“예, 선생…. 아니 참봉님.”
“그래요! 그냥 참봉이라 하세요. 하하하.”

다 같이 웃었다. 교림은 웃다가 문득 얼마 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웃음을 잃어버린 세월, 누구를 탓할까?

“자! 갑시다.”

교림은 죽계천 둑으로 나섰다. 물 건너 사현정 마을이 보였다. 사현정(四賢井) 우물 앞에 훤한 공터가 바람이 되어 가슴을 휘젓고 갔다. 정축년에 빈터만 남기고 사라진 안축의 집터였다. 몇 번 복원할 계획만 세우다가 말아서 여길 지날 때마다 늘 마음이 헛헛했다. 사현정으로 가는 돌다리를 지나자, 죽계를 막은 보(洑)가 보였다. 이 보에서 모은 봇물은 작은 도랑을 따라 봉서루 앞들까지 흘렀다.

“지난해 초군청 사람들과 이 보를 보수하면서, 수고들 많이 했지.”
“우리 모두의 숙원사업이었지요.”

윤갑의 말이 끝나자, 호익은 바로 지난해 연말에 세워진 동양척식회사에 대한 걱정스러움을 얘기한다.

“왜놈들이 이 물 가지고 장난질이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물은 농민들의 목줄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정 교감은 늘 혜안이 있어. 소흥학교도 정 교감이 길을 가르쳐 주고, 이끌어 온 것이 아닌가.”

“아이고, 무슨 말씀을요. 참봉님 없었으면 무슨 일을 했겠습니까.”
“그해 11월이었던가? 장지연이 ‘이날에 목 놓아 우노라!’라며, 황성신문에 글을 올린 게.”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000만 동포여, 노예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하면서, 원통하다고 했던 그 글 말이지요?”

“그래! 그때도 정 교감이 그랬지. 우리 백성을 지키는 건, 백성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그때 자네가 한 말이지 않은가?”

“아이고,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런데 그자가 이제 그 기개가 없어지는 듯하다고….”

“그 글을 쓴 게, 이제 겨우…. 설마.”
“이번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한 것이지만, 뜻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은 세상이 점점 오고 있는 것 같아.”

호익과 윤갑은 길게 숨을 내쉰다.

“그런 것 같아. 또 다른 무언가를 대비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학교가 보를 막은 것이라면, 학도는 봇물이 아닐까?”

물레방앗간을 돌아서니, 아직 반쯤 쓰러져 가는 집 사이로 너른 들과 봉서루가 보였다. 눈가로 모이는 눈물을 어금니를 물며 삼켰다.

“정 교감은 오늘도 학교인가? 태장 집에는 언제 다녀온 거야?”

호익은 씩 웃는다. 집은 여기서 10리도 안 되는 곳이었지만, 호익에게 집은 늘 학교였다.

글. 김덕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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