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계 황준량이 자주 찾으며 찬탄했던 금선대(錦仙臺)

금선계곡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정자 '금선정'의 모습
금선계곡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정자 '금선정'의 모습

금계 황준량이 조선 명종 때(1550년경) ‘금선대’라 이름 지었다
영조 때(1756년) 풍기군수 송징계가 바위벽에 ‘금선대’라 새겼다
정조 때(1781년) 이한일 풍기군수 당시 금계 후손들 금선정건립

어릴 적 초등학교 시절 유적지가 있는 곳으로 소풍 갔던 기억은 누구에게나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나이 들어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된 후에도 유적지가 있는 곳으로 여행을 가곤 하는 것은 누구나 엇비슷할 것 같다.

우리가 유적지를 찾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결국 사람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곳을 경영한 사람으로 인해 의미가 더해지고 풍광이 빛을 더 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저절로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해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까?

풍기 금계동은 자연이 아름답다. 우리가 금계동의 자연과 함께하고 싶어 하는 것은 금계 황준량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여기서 태어나고 자라고 꿈을 키운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 만나는 나무 하나 풀 한 포기도 의미가 다르게 느껴진다.

비탈길 아래 쪽문을 열고 들어서면 '금선정'을 만난다
비탈길 아래 쪽문을 열고 들어서면 '금선정'을 만난다

금계 황준량

조선 중기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1517~1563) 선생은 퇴계 선생 문하로 약관의 나이에 대과에 급제한 후 관직에 나아가 선정을 베풀어 가는 곳마다 백성의 칭송이 자자해 영주 선비의 높은 절의와 품격을 드높인 인물이다.

단양군수 시절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5천 자가 넘는 상소를 올려 명종 임금의 마음을 움직였고, 단양군민들은 이후 10년간 가혹한 공납과 세금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미래를 위해 교육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백학서원(白鶴書院) 공곡서당(孔谷書堂) 녹봉정사(鹿峰精舍)를 세워 수많은 인재를 길러낸 점도 큰 업적으로 남아 역사에 길이 빛나고 있으며, 조선조 청렴의 표상으로 목민관의 모델로 칭송받고 있는 우리나라 대표적 선비다.

금계 후손과 마을 사람들이 가꾼 오백년 정원 '금선정 솔밭'
금계 후손과 마을 사람들이 가꾼 오백년 정원 '금선정 솔밭'

금선대와 금선정

금선계곡을 한자로 쓰면 錦仙溪谷이다. 줄여서 錦溪라고도 한다. 금선계곡에 흐르는 물을 옛 사람들은 금수(錦水)라고도 했다 한다. 금(錦)은 비단을 말한다. 선비들은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금(錦) 자를 많이 애용했다. 선(仙)은 신선(神仙)이란 뜻으로 선비들은 신비감을 나타낼 때 선(仙)이란 표현을 많이 썼다.

소백산 비로봉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산을 타고 계곡을 흘러내려 한바탕 휘돌아 소를 이루는 곳이 있다. 옛 사람들은 이곳 풍광이 ‘소백 제1경’이라고 손꼽으며 아끼는 곳이다. 이곳은 겹겹 암반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고, 협곡(峽谷) 양 벽면은 절벽을 이루고 있는가 하면 층층 절벽 위에는 정자를 지을 만한 ‘너븐바우’가 있기 때문이다.

금계 황준량은 관직에 있을 때도 고향에 오면 이곳을 먼저 찾아 금계의 풍광을 감상하고 찬탄(讚歎)하곤 했다 한다. 이 무렵 황준량은 이곳을 ‘금선대(仙臺)’라 이름 지었다고 하는데 이때가 조선 명종(明宗) 때라고 하니 아마도 1550년경이 아닐까 짐작된다.

그로부터 200여 년 후 영조 32년(1756) 풍기군수 송징계(宋徵啓)가 바위벽에 금선대

(仙臺)라고 삼대자(三大字)를 암벽에 새겼다. 그리고 25년 후 정조 5년(1781) 이한일(李漢一) 풍기군수 재임시 황준량 후손들이 선생을 추모하며 금선대에 정자를 세우고 금선정(仙亭)이라 이름하였다. 처음 지은 정자는 오랜 세월 속에 허물어지고 1989년 유림의 공의를 거쳐 후손들이 영풍군에 지원을 요청하여 중수했다고 한다.

錦仙臺 정자에 걸터앉아 읽어보는 황준량의 시 '유금선대' 
錦仙臺 정자에 걸터앉아 읽어보는 황준량의 시 '유금선대' 

금선정에 걸터 앉아

지난 7월 1일. 하늘을 쳐다보니 맑고 푸르다. ‘이때다’ 싶어 금선정으로 향했다. 차를 세우고 좁은 비탈길 따라 금선정으로 내려갔다. ‘삐그덕’ 대문을 열고 들어가 정자 위에 올랐다.

정자 마루에 걸터앉아 땀을 훔치다 보니 바로 눈앞 바위에 새겨진 시유금선대 (遊

仙臺)가 보인다. 황준량의 시다.

승지 찾는 마음에 골짜기 창문에 드니 시재를 어찌 꼭 반강에 빌리랴.
무지개 밝은 폭포에는 해맑은 눈이 날리고 비단을 깐 안개 속 꽃이 돌다리를 비추네.
소백산 구름 노을 어느 곳이 제일일까 금선대 달과 바람 짝할 때가 없으리.
봄옷 지어 걸치고 솔그늘에 기대어 술동이를 기울이네.
16대손 재국 근서

위는 금계 황준량의 유금선대 시다. 이 시를 16대손 재국(현 강원대 명예교수)이 썼다. 금선대의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한 시로 유명하다.

아래에 나오는 금선대 시는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 1723〜1801, 나주인, 줄포출신)가 풍기군수 재직 시 금선대(錦仙臺)의 아름다움을 쓴 시이다.

舊洞非難辨 (구동비난변) 옛 마을을 알아보기는 어렵지는 않으나
羣峰更覺幽
(군봉갱각유) 뭇 봉우리가 숨어있음을 새삼 깨달았네.
石靈如欲響 (석령여욕향) 신령스런 돌들은 울리는 듯하지만
潭定不爲流 (담정不위류) 고요한 연못은 흐르는 듯 마는 듯.
無愧基川守 (무괴기천수) 부끄럼 없이 금선대는 基川을 지키고
堪傳甲午秋 (감전갑오추) 늠름하게 갑오년의 가을 알리고 있네.
吾猶有餘恨 (오유유여한) 내 오히려 세상에 여한이 있지만
差却錦翁遊 (차각금옹유) 금선대에서 노니는 늙은이가 되려네.

1756년 풍기군수 송징계가 바위벽에 '금선대'라고 새겼다
1756년 풍기군수 송징계가 바위벽에 '금선대'라고 새겼다

금선정 솔밭

금선정을 중심으로 한 금선계곡, 더 좁게는 금선정 솔밭은 ‘오백년 정원’이다. 더 정확히는 ‘오백 년 마을 정원’이다. 정원이란 사람의 손길에 의해 가꾸어지는 장소를 말한다. 금선정 솔밭은 오백년 동안 소유주(금계 황준량의 후손)와 마을 주민들에 의해 가꾸어져 왔다. 이는 세계적으로 유사한 사례를 찾기 힘들다.

이 오백 년 정원은 금계 황준량이 세상을 위해 큰 족적을 남기고 너무 일찍 세상을 뜨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 금계 황준량을 추모하는 마음이 그의 유적을 보존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후손과 지역민들이 금계 황준량이 자주 찾고 찬탄한 금선계곡을 가꾸고 보호하고 유지하는 노력을 하게 된 것이다. 특히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 보호로 이어졌다.

금계의 ‘단양진폐소’

금계의 ‘단양진폐소’는 그 글자의 수가 5,001자로 그의 대표적인 명문장(名文章) 가운데 하나다. 단양군수 시절에 그가 올린 유명한 상소문을 들어 훌륭한 목민관이었다는 평가가 넘치고 있고, 이 상소문을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역사는 전한다. 이토록 유명한 상소문의 내용은 어떨까? 궁금하다. 그래서 동양대 강구율 교수가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학술대회’ 때 발표주제 ‘금계 황준량의 기념비적 발자취’ 논문 중 ‘단양진폐소’ 부분을 발췌해 요약 소개한다.

금계의 이 상소문에는 10가지 폐단 항목이 들어있다. 첫째는 재목(材木)에 대한 폐단으로 삼사(三司)에의 공납(公納), 벌채(伐採)의 부역(賦役), 중국 사신에의 비용과 잡물(雜物)의 폐단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단양지역의 40호 민가가 부담하기에는 너무나 과중한 부담이기에 이 폐단의 제거를 호소하고 있다.

두 번째는 종이의 공납에 대한 폐단으로 금계는 곡물을 견감(蠲減)하고 4년간 부세(賦稅)를 면제하여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세 번째는 산행에 대한 폐단으로 노루와 꿩의 숫자를 줄여서 정량을 충당하지 못해 과도하게 처벌받는 것을 면제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네 번째는 야장(冶匠)에 대한 폐단으로 야장의 폐단을 완전히 제거하고 2년 동안 궐한 가포도 면제해 달라는 내용이다.

다섯 번째는 악공(樂工)에 대한 폐단으로 역사를 도피한 악공을 감면하고 이정된 액수를 없애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여섯 번째는 보병(步兵)에 대한 폐단으로 허수(虛數)의 보병을 경감하고 가포(價布)의 징수를 면제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일곱 번째는 기인(其人)의 폐단으로 기인의 숫자를 절반으로 줄여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여덟 번째는 피물(皮物)에 대한 폐단으로 병영의 피물을 양감(量減)하고 배정된 우록(牛鹿)을 영원히 면제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아홉 번째는 이정(移定)에 대한 폐단으로 공주로 이정(移定)한 노비를 도로 본 고을로 돌려주고 다른 고을에서 이정한 제반 곡물도 도로 해당 고을로 돌려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마지막 열 번째는 약재(藥材)에 대한 폐단으로 갖추기 어려운 약재를 삭감하여 주기를 요청하고 있다.

황준량의 상소는 중앙정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피폐한 단양군의 실정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절실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상소가 논의된 지 열흘 만에 놀랍게도 10년간 일체의 부역을 면제시키는 상책이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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