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과 후진 양성의 삶

정태진(丁泰鎭), 1876~1959

정태진
정태진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노수(魯叟), 호는 외재(畏齋) 또는 서포(西浦)이다.

안정면 줄포에서 정규덕(丁奎悳)과 영양남씨 남석동(南錫東)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정(東亭) 이병호(李炳鎬)와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14년 이승희(李承凞) 등과 함께 봉천부의 요중현(遼中縣)에서 독립운동기지 덕흥보(德興堡)를 개척하였으며, 그해 8월 조정규(趙貞奎), 이광룡(李光龍)과 함께 중국의 곡부(曲阜)에서 열린 공자의 성탄대회에 참가하는 등 공교회운동(孔敎會運動)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19년 고종의 인산(因山)에 함께 참여했던 김창숙 등이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장서’를 작성할 때, 137명 중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고, 이로 인해 대구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다시 만주에 들어갔으나 여의치 않자 귀국하여, 다시 국외로 나가지 않고 선조와 스승의 글을 정리하며, 제자를 양성하였다. 그 대표적인 학자가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이다.

덕흥보(德興堡)

곽종석과 정태진은 나라가 무너진 뒤부터 요동으로 가고자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그 후, 밀산(密山)에서 독립운동기지 한흥동(韓興洞)을 개척했던 경험이 있던 이승희를 중심으로 요녕성(遼寜省) 심양시(瀋陽市) 양사강진(楊士崗鎭)에 독립운동기지인 덕흥보(德興堡)를 개척한다. 이승희(李承凞), 조정규(趙貞奎), 정돈섭(丁敦燮), 김사진(金思鎭) 등과 함께 참여한다.

당시 만주에는 이상룡(李相龍), 이회영(李會英) 등이 주도하는 경학사(耕學社)‧부민단(扶民團)‧한족회(韓族會)로 이어지는 정치 행정조직과 신흥무관학교와 서로군정서라는 군사조직이 있었다. 하지만 덕흥보는 앞 단체와 성격이 달랐다. 독립운동기지 건설 사업이기는 하지만, 공교회(孔敎會)로 이어지는 모습은 유교를 근본으로 삼고 도(道)를 지켜나갈 터를 확보한다는 데 초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유적지

검암정사
검암정사

검암정사(儉巖精舍)
·영주시 줄포길 116-8

검암(儉巖) 정언숙(丁彦璛, 1600~1693)이 원주 치악산 아래 세웠던 검암정사가 쇠퇴해지자, “옛 자리는 아니지만, 검암이 애상하여 머물었던 곳이고, 손수 심은 나무가 지금도 있으니, 치악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며 1925년 외재는 이곳으로 옮겨 짓고 학술 장소로 이용하며 제자를 길렀다. 연민이 외재에게 글을 배울 때 이 정사에서 공부했다.

정언숙은 나주정씨의 영주 입향조이다. 안동 판관의 임기가 끝날 무렵, 원주로 돌아가는 도중에 영주를 지나다가 산천이 수려함에 이끌려 이곳에 살게 되었다. 그러다 다시 치악산 아래에 검암정사를 짓고, 윈주로 이주하였지만, 아들은 줄포에 그대로 남아 집성촌을 이루었다.

모우재
모우재

모우재(慕愚齋)
•영주시 줄포길 77-14

‘모우재’는 2019년 ‘제1회 대한민국 선비대상의 수상자’인 전 성균관대학교 총장 중당(中堂) 정범진(鄭範鎭) 기념관이다. 이 이름은 정범진의 10대(代) 선조 '우담(愚潭) 정시한'을 숭모(崇慕)한다는 의미이다. 1층엔 옥(玉)·상아(象牙)·대나무·도자기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든, 전 세계 30국을 돌며 40년간 수집한 600여 점의 필통이 진열돼 있고, 2층엔 커다란 병풍, 액자, 족자(簇子·걸그림) 등이 전시돼 있어, 옛사람들의 정취를 체감할 수 있다.
 

[미니픽션] 성리학의 숲을 지킨 참다운 학자

“멀리서부터 보내주신 서찰을 받았는데 내용이 정성스러워 비록 이역(異域)에 헤어져 있는 와중이지만 오랜 벗을 버리지 않고 돌봐주신 마음을 대략 볼 수 있었습니다.”

정태진은 김사진의 서신에 답장을 썼다. 지난 몇 해 동안 덕흥보에서의 생활이 절로 떠올랐다. 덕흥보 땅부터 구매했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1914년에 봉천(심양)의 서탑으로 옮겨가서 덕흥보에 새로운 터를 잡았다. 이곳은 토지 구매가 가능했다. 그래서 이승희는 여러 동지와 논의한 끝에 100호 남짓한 사람들이 생계를 꾸려갈 만한 토지를 사들였다. 하지만 땅이 습지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고난의 시작이었다. 한인 정착촌의 개척은 직접 농사를 짓는 일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16년 봄에 이승희는 생을 마감하였다.

“…. 저는 봄부터 여름까지 연이어 어버이께서 병을 앓으셔서 두려웠다가, 근래에 들어 비로소 조금 덜해지셔서….”

만주에서 귀국할 때만 해도 바로 돌아갈 요량이었다. 하지만 집안 사정도 만만하지가 않았다. 부모님 간호를 마칠 즈음엔 이제 정태진 자신이 병치레하게 되었다.

“… 그곳의 근래 형판은 어떻습니까? 덕흥서 농사짓는 일은 과연 염려 없이 추수할 수 있겠습니까? …… 황무지를 개간하는 비용은 제가 감당할 재주는 없지만, 우리 형이 이미 변방 먼 땅에 계시면서 이렇게 오롯이 부탁함이 있는데 어찌 힘껏 주선하지 않겠습니까?”

김사진의 부탁대로 돈을 보내면서, 인편을 통해 받았는지 아닌지를 알려달라고 적고는 문을 나섰다. 캄캄했다. 날을 짚어보니 6월 그믐이었다. 개구리 울음소리만 천지를 꽉 채우고 있었다.

정태진의 스승 곽종석은 병자년(丙子年)과 을사년(乙巳年)을 지나면서, 무너지는 나라의 미래를 위하여 요동(遼東)으로 가서 준비하자고 했다. 태진도 스승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그때부터 덕흥보로의 계획은 시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움직임은 쉽지 않았다. 자금이나 인력 등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이었다.

6월 초, 덕흥보에 큰비가 내려 수해를 입었다고 한다. 그래서 파종할 시기가 되었지만, 씨를 심어야 하는 이들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해결책이 없었다. 태진은 돌아갈 시기를 자꾸 놓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종황제가 승하했다는 비보(悲報)가 전해졌다. 독살되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리고 3월 1일이 인산일(因山日)이라고 했다. 심산 김창숙에게서 서울서 만나자는 기별이 왔다. 심산(心山)은 함께 곽종석의 문하이기도 했지만, 이승희를 각별하게 따르던 인물이었다.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문 낭독으로 시작된 이 날 만세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비폭력 평화적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민족지도자들은 미국의 월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함과 한민족 독립의 당위성을 세계 곳곳에 알리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범 종교적·범민족적 연대를 조직하여 전국적인 봉기와 시위를 계획했다. 인구 2천만 명의 약 10분의 1이 참여한 기미년 만세 항쟁은 3월부터 약 2개월 동안 전국에서 1,200여 개의 봉기와 시위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1월 22일 고종의 서세(逝世) 이후 서울로 모여든 유림은 만세운동의 준비단계에서 유림이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황제의 죽음을 슬퍼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논의한 것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긴 글(長書), 즉 독립청원서를 보내는 일이었다.

김창숙은 3월 5일 곽종석이 직접 서울로 보낸 김황(金愰)과 곽윤(郭奫)을 만나 독립청원서 작성을 논의하였다. 청원서는 곽종석에게 집필을 부탁하기로 하고, 서로 지역을 나누어 서명자 모집에 나섰다.

영주에서는 가흥면 서구대 옆에 있는 김택진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부석 상석의 김동진과 성밑에 사는 권상두에게는 먼저 일러두었다.

“국경(김동진의 자). 잘 오셨습니다. 이렇게 보자고 한 것은 심산(김창숙의 호)에게 기별이 왔기 때문입니다.

“심산이라면?”

“네. 김창숙이라고 곽종석 선생의 문하이지요. 이제 약관인데 활동력이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지난 8일에 서울에서 출발했는데, 성주와 거창을 거쳐 벌써 영주랍니다.”

심산은 우리가 왜적의 노예가 된 것도 유림의 부패한 까닭이고, 3월 1일, 독립선언서에 유림 대표가 참가치 못한 것도 우리들의 수치라면서, 곽종석의 뜻을 전했다. 전국 유림이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여 우리의 독립을 국제여론에 호소하자는 것이었다. 영주에서는 그날 정태진‧김동진‧김택진‧권상두가 서명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이 일로 함께 체포되어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조사를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다. 출소 후 다시 만주에 들어갔으나 여의치 않자 다시 귀국한다.

왜경의 감시는 이때부터 본격화되었다. 다시 국외가 아니라도 어디를 가든 감시를 받았다. 그래서 태진은 그동안 벼르던 일을 시작했다. 바로 검암정사(儉巖精舍)의 중건이었다. 검암정사는 태진의 11대 선조인 검암(儉巖) 정언숙(丁彦璹) 치악산 골짜기에 지은 2칸 띠집이었다. 그런데 검암이 운명하자 그 집도 무너졌다.

‘정사가 폐해진 지 이제 백 년이 되었는데도 중건할 겨를이 없었으니, 어찌 후손들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이곳이 정사의 옛터는 아니지만, 선조께서 아끼고 좋아하시어 거니시던 곳이다. 그때 심은 뽕나무와 가래나무들을 바라보면 아직도 머물고 계시는 것 같아 그립고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그렇게 1925년 줄포에 검암정사를 다시 짓는다. 그해 태진의 나이는 지천명(知天命)이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독서와 강학뿐이었다. 그런데 두 해 후, 뜻밖의 인연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과 만남이다. 연민의 외가가 줄포였다. 이가원은 외재의 제문에서 “제가 선생을 따라 공부한 것이 전후 20여 년으로 가장 오래”였을 뿐만 아니라 “가장 사랑을 받았다.”라고 고백하며, “선생의 덕을 어느 날인들 감히 잊겠는가?”할 정도였다.

연민은 12살 때에 검암정사에서 『논어』를 읽었으며, 16세에 『시경』을, 17세엔 『대학』, 19세엔 『서경』, 21세엔 『맹자』를 공부한다. 그뿐만 아니라 시가(詩歌)‧전장(傳狀)‧사부(辭賦) 짓는 법까지 배운다. 연민은 외재를 “경사(經師)”라 일컫기는 하였지만, 경전(經典)뿐 아니라 시문 창작의 기법까지 배운다.

하지만 일제는 정태진을 가만 놔두지 않는다. 결국, 1940년경에 문경군 마성면 모곡리로 거처를 옮긴다. 그리고 1959년 5월 21일 세상을 떠난다. 그해 나이가 84세였다.

글 김덕우 작가

참고 ⌈외재 정태진의 생애와 학문⌋ 보고사, 허권수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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