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재산을 이웃에 바친 참사람

강택진(姜宅鎭) 1892~1926

호는 하연(何然). 강재기(姜在琦, 1857~1938)와 김열(金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개성 출신으로 서울에서 살다 『정감록(鄭鑑錄)』에 따라 십승지를 찾아 풍기로 왔다.

1917년부터 중국 길림성과 국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19년 10월에 서울에서 상해 임시정부 산하 연통제(聯通制) 기관인 조선 13도 총간부를 조직하고 교섭부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일제시대 '동아만화' 만평에 실린 순경, 지주, 마름
일제시대 '동아만화' 만평에 실린 순경, 지주, 마름

이 활동으로 잡혀 2년간 옥고를 치루고, 출옥 후 풍기로 돌아와 풍기소작조합 결성에 참여하면서, “지주권을 포기하고 소작인 제군에게 고백하노라”라는 글을 남기고, 자신의 토지 9,000여 평을 소작조합에 기부한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가 중학동의 어느 집 문간방에 세 들어 살면서 아이스크림 장사를 한다.

이때 인터뷰를 요청한 신문 기자에게 ‘박애·평등·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소유욕’을 버리고 ‘참사람’의 ‘참살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전 재산을 기부한 것이라고 소신을 밝힌다.

그 후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르고, 1926년 2월 병보석으로 출옥하여 요양하던 중, 1926년 10월 24일에 사망하였다. 강택진의 장례식은 사회운동단체연합장으로 치러졌다.

금계1리 마을회관
금계1리 마을회관

풍기소작조합

풍기소작조합(豊基小作組合)은 1923년 3월, 소작농의 경제적 이익 옹호와 농민계몽 운동을 위하여 풍기·봉현·안정 등 3면을 중심으로 창립하고, 10월엔 수확기에 맞추어 임시총회를 열고 “지세는 전부, 소작료 5할 이상은 절대 불응”과 “지주가 만일 무리하게 소작권을 이동할 때는 일반 소작인은 결속하여 소작권 옹호를 주장하고 어떠한 소작인이든지 경작치 말 것” 등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소작료 감면, 강택진의 토지 기부, 지세불납동맹 투쟁 등의 소작 운동을 전개해 나가며, 1929년 풍기농우동맹으로 확대되었다가, 영주농민조합으로 발전하였다. 영주농민조합은 당시 경북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농민조합이었는데, 1930년대 혁명적 농민조합운동과 반제 운동으로 계승되면서, 농민운동의 확대 발전에 이바지했다.

1923년 5월에 강연회를 개최하였는데, 500~600명의 농민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이 강연회에서 김동필(金東弼)은 「노동자와 소작인의 억울한 과거와 현재」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소작인은 조선시대에도 있었지만 일제엔 더 크게 늘어났다. 그 원인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 조사 사업이었다.

1920년대 토지 거래 건수는 3년 전보다 56%나 늘어났다. 이러한 매매는 글자를 모르는 이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작에서 소작인으로 변하기도 했다. 토지의 쏠림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지주와 소작인의 갈등이 더 깊어졌는데, 1920년 12건이었던 소작쟁의가 1928년에 1590건으로 늘어난 수치로 그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강택진 유택에서 내려다 본 임실마을 전경
강택진 유택에서 내려다 본 임실마을 전경

유적지
풍기읍 금계리 임실마을
·풍기읍 무릉길 42번길 9

선생이 거주하던 임실천변의 집은 일제 때엔 공회당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 그곳엔 금계1리 마을회관이 들어서 있다. 유택은 임실을 내려다보는 공원산 허리에 있는데,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가 2005년 찾아서 관리하고 있다.

[미니픽션]

“지주권을 포기하고 소작인 제군에게 고백하노라!”

중학동을 찾은 건, 단오가 며칠 지난 뒤였다. 두 달쯤 전, 신문에 보도를 한 후, 이 영웅을 한 번이라도 만나보고 싶은 생각에 영주로 가는 인편이 있을 때 마다 풍기에 사는 강택진의 안부를 물어왔었다. 하지만 들을 수 있는 것은 4월 26일 신문 보도 후, 풍기를 떠났다는 소식 뿐이었다.

4월 13일은 마음이 무거운 날이었다. 임시정부 수립 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자신을 탓하며 무교동에서 늦도록 술을 마셨다. 이튿날 신문사에 들어서는데, 급사가 편지 한 통을 주었다.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에서 온 편지였다.

“영주군 풍기면 금계리에 사는 강택진씨는 자기의 전 재산을 우리 소작인에게 주시고, 자신의 감상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주시니, 우리는 공포치 아니할 수 없어서, 귀사에 보내어 게재하여 주심을 바라나이다.”

그리고 첨부한 글이 “지주권을 포기하고 소작인 제군에게 고백하노라!” 란 장문의 글이었다. ‘전 재산을 소작인에게?’ 하면서 첨부한 글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그 글에는 자신이 가진 재산을 포기한 동기와 이유가 적혀 있었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국장님, 국장님! 지주권을 포기했답니다. 지주권을요….”

“누가? 없는 땅도 만드는 세상에….”

“아! 글쎄. 여기 보세요.”

국장도 그 글을 담배를 든 채, 불을 붙일 새도 없이 읽어 버린다. 그리고 천정을 쳐다본 채로 한숨을 한 번 뱉더니 툭 던진다.

“실어, 다 실어.”

“예?”

“전체를 게재하란 말이야.”

신문을 본 사람들은 모두가 놀라워 했다. 부자는 땅이 만든다던 말이 돌던 시절이었다. 지주들 사이에는 땅 늘이기 경쟁을 하던 때였다. 전체 인구의 80%가 농업에 종사했던 농업사회에서 논을 중심으로 한 토지집중이 극성이었다. 그러면서 지주와 땅이 없는 소작인 간에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양측은 서로 조직을 만들어 지주는 더 많은 이익을 거두기 위해, 소작인은 가족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서로 싸웠다.

소작인은 조선시대에도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수가 크게 늘어났다. 가장 큰 원인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었다. 근대적 토지소유관계를 확립했다는 토지조사사업은 땅 매매를 한결 쉬워지고 잦아지게 만들었다. 토지대장에 세세한 정보가 들어 있어 직접 가보지 않고도 거래할 수 있게 되자 투기매매가 한반도 곳곳에서 벌어졌다. 1920년 토지 거래 건수는 3년 전보다 56%나 늘었다고 한다.

지주들은 돈을 은행에 맡기기보다 땅을 사들이는 편이 더 수지맞았다. 정기예금 이자보다 토지투자수익률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 쌀값은 오르내려도 공산품 가격보다 변동이 크지 않았다. 그래서 생소한 산업에 투자하느니 계속 땅을 쥐고 있겠다는 마음이 많았다. 또 일제가 밀어붙인 산미증식계획도, 일본의 앞선 농법을 전파한다며 데려온 일본 농민도 우리 농민들에겐 대적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그 대행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적군의 소굴로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다가 못된 지주들은 소작료 인상도 모자라 세금이며 이런저런 부과금을 소작인들에게 떠넘기기 일쑤였다. 소작료가 수확량의 70~80%나 되기도 했다. 한 해 농사지어 소작료 내고 빚 갚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자작농이 땅을 잃고 소작인으로 추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1월 27일자에 소개된 전남 순천군 농민들의 결의사항은 소작인들의 고충을 역으로 알게 해주었다. ①소작료는…총수확의 40% 이내로 하라 ②지세와 공과금은 지주가 부담하라 … ④지주는 소작인에게 무상노동을 요구하지 말라 … ⑥지주는…소작인을 멸시하지 말라 ⑦소작권은 함부로 옮기지 말라 ⑧지주는 몰상식한 마름을 쓰지 말라 등이었다.

이런 가운데 경북 영주의 지주 강택진이 땅 9000여 평을 소작인회에 기부한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강택진은 글에서 “그것을 내가 가지고 있던 까닭에 한없는 죄를 지었다. 이제부터 양심의 비판대로, 제힘으로 살아보겠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강택진은 나에게 영웅이었다. 그래서 영주로 가는 인편이 있을 때마다 소식을 물어오며, ‘나의 영웅’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보통인물은 아니었다.

25살에 중국 안동현(安東縣)을 거쳐 봉천(奉天)의 해천양행(海天洋行)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모색한 것도 살필 수 있었고, 1920년 10월 서울 가회동 ‘취운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연통제 기관으로 조선13도총간부를 조직하고, 교섭부를 맡아 경상북도에서 애국금 3,000원을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냈고, 그 일로 이듬해 3월 일제 관헌에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언도 받았고, 지난해 5월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 건강 악화로 가출옥하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중학동에 와서 산다는 것은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가족들이 셋방을 얻어 사는데,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간다는 이야기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물어물어 중학동을 찾았다. 양력 6월의 햇볕은 따가왔다. 매년 날씨는 더 더워지는 것은 저놈의 돌집 때문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해를 머금은 조선총독부 돌집은 주변의 공기를 더 후덥지근하게 데우고 있었다.

강택진을 만나는 것을 포기하고, 그늘을 찾아 인사동 골목길을 따라 걷다가 종각쯤에서 만날 수 있었다. 아이스크림 통을 메고 가는 한 중년인을 보며, ‘나의 영웅’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강한 눈초리 그리고 걷어 부친팔에 드러난 힘줄은 그의 첫인상이었다. 인사를 드리니 손사래를 쳤다.

“빼앗긴 나라의 빼앗긴 땅을 부둥켜안고 있어 보았자, 누구 겁니까? 붙이는 사람, 일꾼들이 그 땅의 진정한 주인이 아닙니까? 참사람이 참살림을 해야하지 않습니까?”

하고 되물었다. 그래서 그 말을 이렇게 적어 보았다.

“자유 ‧ 평등 ‧ 박애, 소유욕, 참사람, 참살림.”

그 만남 이후, 나는 무소유란 말에서 쉽게 헤어나올 수 없었다. 하지만 강택진은 계속 무언가의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산문 보도를 통해 알 수 있었다.

1924년 4월 6일 풍기소작 간부 소환, 6월 20일 노동총연맹 강택진 의거…. 1925년 1월 22일 노동총연맹 집행위원장 강택진 구인, 2월 23일 강택진 방면, 8월 22일 풍기 소작 쟁의 존부 예심 ……. 그리고 ‘1926년 10월 26일 강택진 서거’라는 기사가 올라왔다.

풍기는 처음이었다. 김천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풍기에 내릴 때, 나를 반긴 것은 바람이었다. 바람 속에 소백산이 보였다. 그런데 같이 차를 타고 온 이들은 모두 행선지가 같아 보였다. 긴 행렬로 걷는 이들 중에는 파란 눈의 외국인도 있었다. 소백산 아래 이런 넓은 들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일행을 따라 걸었다. 추수가 끝난 논엔 벼 대신 군중들이 꽉 채우고 있었다. 금계 들판에 하얀 물결이 바람에 따라 일렁이고 있었다.

글 김덕우 작가

참고자료 김인순 『일제강점기 영주』, 동아일보사 『동아플래시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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