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흥동 줄포에 세워진 정범진 기념관 모우재(慕愚齋)

가흥2동 줄포마을 소재 모우재와 희현당(안협댁)
가흥2동 줄포마을 소재 모우재와 희현당(안협댁)

모우재는 정범진이 그의 10대조 우담 선조를 흠모해 지은 서재 이름
현대 학자의 위상과 행적 후학에 알려 장래 모범적 지식인 양성 꿈
40년 동안 모은 세계 필통 600개 「필통박물관」으로 전국에 소개돼

모우재는 영주시 가흥2동 줄포마을에 있다. 2021년 10월에 개관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최근 필통박물관이 유명세를 타는 바람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희헌당(希賢堂)이란 현판을 단 고택(안협댁, 安峽宅) 옆에 현대식 건물로 지어진 2층 건물 외벽에 모우재(慕愚齋)란 간판이 걸려 있다.

모우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중당 정범진 기념관’이란 간판도 걸려 있는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모우재’는 무엇이고, ‘정범진’은 누구일까? 또 ‘필통박물관’에는 어떤 필통이 있을까? 궁금해 하면서 전시관으로 들어선다.

정 총장의 생애를 알 수 있는 가승관(家乘館)
정 총장의 생애를 알 수 있는 가승관(家乘館)

정범진은 누구?

전시관 1층에 들어서면 맞은편에 대형 「慕愚齋」 액자가 걸려 있고, 좌우로 정범진을 소개하는 전시물이 여럿 있다. 먼저 중당(中堂) 선생 선계도(先系圖)를 살펴봤다. 정범진(丁範鎭)은 나주정씨 시조 윤종(允宗, 고려 검교대장군)의 28세손이다. 선계도에 나타난 눈에 띄는 인물로는 우담 정시한, 다산 정약용 등이 보인다.

이 가승관(家乘館)에는 정범진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약력표, 총장취임 사진, 총장명패, 훈장증 등이 전시되어 있다. 처음 온 사람들은 가승관을 둘러보고 나서야 정범진 총장은 영주 출신으로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세계적인 학자요, 현대 선비의 표상이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모우재 개관식(2021.10.28)
모우재 개관식(2021.10.28)

모우재(慕愚齋)란

1층 전시실 모우재 액자 아래에 모우재에 대한 설명서가 붙어있다.

「모우재는 조선 중기의 명유(名儒, 이름난 선비)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의 삶과 그의 학문을 숭모(崇慕)하는 뜻을 담고 있다. ʻ모우재ʼ 명칭은 성균관대학교 총장과 소수서원 원장 등을 역임한 중당 정범진 박사가 지었으며, 글씨는 청와대 춘추관(春秋館)과 경복궁 인수문(仁壽門), 운현궁(雲峴宮) 등의 현판을 쓴 예천 출신의 서예가 초정(艸丁) 권창윤(權昌倫)의 작품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보충 설명하면 정범진 박사가 그의 10대조인 우담 선생의 높은 학문을 우러러 사모하여, 숭모(崇慕)한다는 뜻에서 모(慕)자를 따고, 우담(愚潭) 선조의 호에서 우(愚)자를 따 ‘모우재(慕愚齋)’라고 이름 지었다는 것이다.

모우재는 현대 학자의 위상과 행적을 후학들에게 알림으로써 장래 모범적 지식인을 양성하고자 하는 국가 사회적 시책에 조그마한 기여를 하고자 하는 뜻과, 후학들이 학문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만든 기념관이다.

정 총장이 아이들에게 '필통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정 총장이 아이들에게 '필통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우담 정시한은 누구?

중당 정범진 선생이 그토록 숭모하는 우담 정시한은 어떤 분일까? 국역 「우담집」에 나타난 우담의 생애를 살펴보니 다음과 같다.

우담은 인조3(1625)년에 서울 회현방(會賢坊)에서 태어나 숙종33(1707)년 원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부친(彦璜)이 관찰사를 지냈듯 대대로 벼슬하여 서울의 양반가 중 명문이었다. 그 시대의 관습에 따라 14세에 결혼(부인 柳氏)한다. 25세에 부친을 모시고 경관이 수려한 강원 원주 법천마을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이 무렵 소학, 중용을 비롯하여 논어, 근사록, 심경, 주자서절요 등을 익혔는데 그는 늘 홀로 공부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는 철학적 재능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긴 〈논어〉만은 10여 년 동안 되풀이하여 익혔다고 한다. 그는 부친의 권유로 여러 차례 벼슬길로 나갈 기회가 주어졌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친 시중을 들면서 학문에만 매진했다. 그의 〈사칠변증(四七辨證)〉은 한국 철학사상사에서 상당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그의 철학적 이론을 다산 정약용의 평을 인용하면 “퇴계를 준거로 하였으되 분석이 정밀하여 세미한 부분까지 들어갔다. 참으로 한강(寒岡) 정구(鄭逑),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이래로 진정한 학자요 순수한 학문은 선생 한 분뿐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가장 적절한 평가로 인식되어 왔다.

시골소년 대학총장이 되다

정범진은 지금으로부터 88년 전인 1935년 모우재 바로 옆 희현당에서 태어났다. 아직 사리도 분별하지 못했을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가서 약 2년간 지내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4월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 후 안정초등학교, 영주농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간 민족의 비극인 6.25를 겪었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대만으로 유학을 가 2년간 학업을 마치고 귀국했다.

그 후 성균관대에서 1999년 정년퇴임하는 날까지 옆 돌아볼 겨를도 없이 대학발전에만 전념했다. 그러는 동안의 약 30년 사이 성균관대 직선제 총장으로 당선(1995)되었고, 또 비교적 이른 시기에 북한을 방문 개성 성균관대학교와 자매결연에 합의하고 돌아오는 등 한국 교육사에 길이 남을만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

이렇게 바쁘게 지내다 보니 고향에 대해서는 그리움만 가슴에 품고 살았지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해 늘 미안하고 아쉬웠다. 그러던 어느 날 동양대학교 창립자인 최현우 이사장이 정범진 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고향으로 내려와 동양대학교 인성교육을 맡아 달라”고 부탁한다.

최 이사장은 우리나라 교육이 어딘가 방향이 잘못되어 가고 있으니 정 총장에게 바로 세워 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고, 정 총장은 총장 4년 동안 심신이 지쳐있고 이제 나이 들어 책임 있는 일은 힘들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로부터 여러 날 동안 서로 밀고 당김이 계속되다가 결국 정 총장이 최 이사장의 제안을 받아드리게 된다.

이후 동양대 석좌교수, 한국선비연구원장, 한국한시협회장, 소수서원 원장 등을 수행하였고 영주시청, 소수서원, 대한노인회영주지회 등 기관단체에서 부탁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건강이 허락하는 한 주저하지 않고 고향을 위해서 봉사하는 심정으로 기꺼이 응했다. 그 세월 또한 어언 20여 년이 흘렀다.

제1회 한국 선비대상 수상

정범진 총장은 2019년 영주시 주최 제1회 대한민국 선비대상을 수상했다. 그는 늘 선비란 “도덕적 지식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선비가 한평생 살아가면서 어떠한 환경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으며, 어떤 발자취를 남겼는가 하는 경험은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보배와 같은 것”이라며 “평소 경험으로 얻은 지혜와 덕망이 몸과 마음에 점절(點綴)되어 있다가 그것이 고금 사회에서 전방위로 전달됨으로써 효과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사실을 세계 위인들의 전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것이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는 교육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모우재를 세운 뜻은

정범진 총장은 “평생 보물처럼 모아 지식을 얻으며 고락을 함께했던 4천 권의 서적들, 국내외를 두루 다니면서 취미로 수집했던 애장 필통들 그리고 국내외 석학들로부터 선물로 받았던 귀중한 서화들, 이 모든 것들은 비록 남들이 볼 때는 ‘보잘 것 없는 것’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귀중하고도 귀중한 것으로 어느 한 가지도 결코 버릴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정 총장은 “부족한 사람이 무슨 명분으로 감히 기념관을 지을 생각을 했겠습니까만은 첫째 평생토록 내가 아끼고 정을 들인 애장품들을 포기할 수 없었고, 둘째는 요즈음 도서관이나 박물관에서 기증품을 거의 받아 주지 않으며, 셋째로 어려움이 있지만 일단 지어놓으면 지역사회의 문화공간으로서 다소간에 기여하는 바도 있을 거라는 우직한 생각에서 결국 건축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절차탁마하는 문화공간

정범진 총장은 “기념관이 작심에서 준공에 이르는 동안 단 한 순간도 저나 우리 문중 소유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며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지식을 얻어 견문을 넓히고, 많은 학우를 사귀어 즐거움을 누리는 한편 지역 사회가 공유하는 휴식처로 서로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아담 정숙하고 즐거운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소박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선생께서 40여 년 동안 애장품으로 모은 필통 650점은 ‘필통박물관’이란 이름으로 전국에 널리 소개되고 있다. 지난 5월 말 공예주간에는 ‘나만의 필통 만들기 프로그램’에 지역 어린이와 엄마 아빠 250명이 참가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한편 모우재 필통박물관은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아동미술교육연구소와 협업하여 아이들의 정서 함양과 문화예술 역량을 높이기 위해 ‘융합형예술교육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하니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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