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유림단의거에서 중추적 역할

송영호(宋永祜), 1903~1968

장수면 호문리에서 송인상(宋仁相)과 류하회(柳河回) 사이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우 송재호(宋在祜, 1906~1974)도 제2차 유림단의거에 함께 활동하였다. 12세 때 영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3월 졸업하였다.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5개월 만에 그만두고, 1924년 동생과 함께 중국 베이징 북경학원에 입학하여, 1925년 6월에 졸업하였다.

1925년 4월, 베이징에서 2차 유림단의거에 참여한다. 이는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기지 건설에 필요한 군자금 모금 활동이다. 송영호는 6월 말 가장 먼저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착수하며 자기 소유 토지 1천 두락을 매각하여 활동 비용을 부담한다.

또 신건동맹단(新建同盟團)을 결성하며, 조직을 모험단과 모집단으로 편성한다. 송영호는 모험단이었는데, 이 모임은 군자금 모집에 불응하는 부호들을 권총으로 위협하여 강제로 군자금을 모집하는 역할이었다. 조직을 강화하던 중, 1926년 일본 경찰의 본격적인 검거가 시작되면서, 4월 17일 마을 뒷산에서 형사대에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한다.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하며,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참여하였다. 자유당 정권 말기에는 민주당 고문으로 이승만정권에 대한 반독재 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1968년 8월 24일 사망하였다.

2차 유림단의거

1919년 3월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제1차 유림단의거)이 무산되면서, 독립운동은 독립전쟁으로 방향을 조정하며, 장기적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대 양성과 이를 위한 비용 마련에 힘을 모으게 되는데, 이때 필요한 자금은 국내 유림에게 협조를 받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 모금 운동이 2차 유림단의거이다.

1925년 베이징에서 활동하던 김창숙은 만주 군벌 펑위샹과 협상하여 오르도스(지린성 북부 지역에 있는 도시)와 바오터우(내몽골자치구에 있는 도시) 지역의 땅 약 3만 평을 받아 이를 독립군 기지로 개간하기로 하면서, 여기에 필요한 20만 원을 모금하게 된다.

제2차 유림단의거에 영주 지역에서도 다수 참여하였다. 그 가운데 송영호·송재호 형제와 김동진·김제직 부자의 활동이 돋보인다. 송영호는 신건동맹단의 모험단원으로 친일 부호 처단과 자금 모금 분위기 조성에 힘쓰는 동시에 영주·봉화·대구 지역 모집단의 책임자였다.

동생 송재호도 모금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김동진과 아들 김제직도 모금원으로 나서 활동하였다. 송영호는 김창숙을 도와 제2차 유림단의거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는데, 제2차 유림단의거로 모금된 자금은 뒷날 의열단 활동의 밑받침이 되었다.


유적지 및 콘텐츠

송영호 출생지인 장수 토계
송영호 출생지인 장수 토계

·장수면 호문리 토계

장수사무소에서 옥계로 따라 남쪽으로 2.7km에 있다. 현재는 들을 가로지르는 도로와 철도로 인해 작은 마을이 되었지만, 마을 앞을 흐르는 옥계천을 가진 넓은 들을 자랑하던 마을이었다. 현재 송영호가 살던 집은 없고, 마을 앞산에 송영호 묘소가 소백산을 바라보고 있다.

형제의 나라
형제의 나라

 

·쥬크박스 뮤지컬 형제의 나라

최대봉/작, 연출
·공연 연도: 2015년, 2017년
·장소: 영주예술문화회관(까치홀)

송영호, 송재호 형제가 2차유림단의거에 참여한 내용으로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며 만든 창작뮤지컬이다. 베이징에서 서울 그리고 영주를 오가는 애국 청년들을 통해 그 시대를 보여 준다. 주크박스 뮤지컬이란 '도넛 (doughnut)'이라고도 불리는 싱글 앨범이 가득 담긴 기계에 동전을 넣고 선곡 시 곡을 들려주는 음악상자(Jukebox)처럼, 흘러간 예전의 대중음악을 무대용 콘텐츠로 재가공한 뮤지컬을 말한다.


[미니픽션] 독립의 그 날을 위하여

“우리나라 독립은 대세이지만, 우리에게 힘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네. 그래서 만주와 몽고 사이에 200일경(一境) 정도의 땅을 조차(租借)하려고 협상을 했네. 만주 벌판에 뿔뿔이 흩어져있는 동포들이 모두 그곳에 모여 땅을 개척하고, 가축을 기르면서, 전초기지(前哨基地)를 만들 생각이라네. 그렇게 하려면 수십만 원을 모금해야 하는데, 그 일을 자네가 맡을 수 있는가?”

김창숙은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 깊이 들어왔다.

1925년 4월이었다. 1924년 2월 동생과 함께 베이징 북경학원 중등과에 입학하여 수료를 두 달 앞둔 때였다. 봉화에서 유학 온 김화식이 파리장서운동과 김창숙의 얘기를 듣고, 꼭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졸라서 만나는 자리였다. 송영호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6월 학원을 수료하자마자, 김창숙은 다시 명령을 내렸다.

“영호, 자네 손에 조선독립군과 나라를 잃고 떠도는 겨레의 명운이 달려 있네. 왜놈 밀정들의 감시를 조심해야 하네. 편지는 위험하니 인편을 통해 연락을 취하도록 하고….”

송영호는 6월 말, 국내로 잠입하였다. 입국하는 길에 일부러 만두를 휴대하였다. 국경에서 물품 검사 현황을 탐지해 보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귀국하자마자 송영호는 7월 10일에 150원을, 7월 12일에 450원을 자신의 영어 강사였던 윤동메를 통하여 보내며, 국경에서 체험한 탐지 내용을 알려 주었다. 김화숙은 7월 말에 입국하였다. 그때 갖고 온 권총과 탄환은 송영호의 정보 전달로 무사히 갖고 올 수 있었다. 여비도 그때 보내준 돈이었다.

모금 활동은 김창숙은 입국한 8월 이후 더 활발해졌다. 지방에서 올라온 유림과 접촉하며 그들과 함께 신건동맹단을 조직하였다. 이 이름은 베이징에서 송영호가 머물던 주소지인 신건호동(新建湖洞)에서 따왔다. 그리고 군자금 모집의 방법 수단 등 독립운동의 방향을 만들었다.

- 단명은 신건동맹단으로 한다.

- 인원은 2개 반으로 나누어 모험단과 모집단으로 삼는다.

- 모집단은 각자 구역을 정하고, 그 구역 내 부호에게 1,000원 이상을 요구하고, 불응할 때에는 모험단이 와서 살해할 것이라고 협박한다.

- 모험단은 권총을 휴대하여 모집단 요구에 불응하는 부호에게 직접 행동으로 옮긴다.

- 담당 구역은 각자가 뜻하는 장소를 선택한다.

- 아직 연락을 취하지 못한 유림단원에게는 수시로 김창숙의 소식을 전달하고, 활동에 가담시킨다.

- 단원 중, 김화식‧송영호‧정수기를 모험단원으로 하고, 기타는 모집단원으로 한다.

김창숙을 총지휘관으로 하고, 송영호는 실무 책임자로 정하였다. 담당 구역도 정하였다. 송영호는 영주와 봉화, 대구를 맡았다.

주 대상은 영남지역의 부호들이었다. 하지만 순조롭지는 않았다. 성공할 때도 있었지만, 실패할 때가 많았다.

“심산 선생께서 어르신을 찾아뵙고, 도움을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에 우리 겨레의 내일이 달렸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이곳 형편도 어렵소. 일본 놈들에게 뜯기고, 거느린 식솔도 많아서…. 그리고 남들에게는 부자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빈껍데기라오, 감시도 심하고…. 백 원이오, 이걸로 여비나 하시오.”

이 정도는 좋은 경우였다.

“아직 이런 정신 나간 젊은이가 있나. 지금이 어느 세상이라고 일본이 망할 것 같나? 일본은 앞으로 아시아 전체를 먹어 치울 거야. 뭐, 독립이라고? 조선이?”

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에는 희망이 없고 일본은 영원하리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자들이었다.

1926년 2월, 송영호와 재호는 함께 서울에 왔다가 재호는 먼저 내려갔다. 태기가 다 된 아내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주를 지나다가 왜놈 순경에게 검거되었다.

“미꾸라지 같은 놈. 네놈이 송영호지?”

“그렇다.”

재호는 부인하지 않고 잡혀갔다.

“김창숙, 그놈은 어디 있나?”

왜경의 고문은 심했다. 그는 고문을 이기지 못하여 면도로 자결은 시도했지만 이루지 못했다. 그때 집에서는 더 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왜경들은 집안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김창숙과 주고받은 편지를 찾아라. 권총도 집안 어디에 있을 거다. 샅샅이 뒤져라.”

왜경들은 “모른다.”라고 악을 쓰는 영호의 부인을 쓰러트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재호의 아내 유임이(柳任伊)는 “형님” 하며 쓰러진 영호의 부인을 감싸 안았다. 이때 재호의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왜경은 만삭이 된 유임이의 배를 발로 찼다. 유임이는 바로 하혈을 했다.

“형님, 제가…, 이렇게 갔다는 거…, 서방님껜 모르게 하셔요. 옥중에서….”

“이보게! 무슨 소린가? 정신줄 놓으면 안 되네. 이보게….”

그 일이 있고 난 뒤, 재호의 아내는 40세의 나이로 인생을 마감하고 만다. 동생의 하옥과 제수의 사망 소식을 들은 송영호는 부랴부랴 고향으로 왔다. 하지만 왜경들은 바로 급습하였다. 송영호는 4월 17일 집 뒤편 산중에서 체포되었다.

공판에서 일본인 재판장은 물었다.

“피고는 을축년 6월 북경을 떠났는데, 도중에 만두 한 개를 사는 척하며 검거상황을 탐색하여 알려주었느냐?”

“나는 학생이다. 그대가 말한 것처럼 장사치로 행동하며 검거상황을 알려주지 않았다. 만두를 산 건 사실이지만, 도중에 먹고 갔다. 한 번도 김창숙에게 편지를 전하지 않았다.”

“통지는 하였는가?”

“그렇다.”

“피고는 대한의 독립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독립? 우리 대한 사람 치고, 누가 기쁘지 않겠는가?”

이렇게 2차 유림단의거는 끝났다. 하지만 이 의거에 함께 했던 권상수, 송재호, 박제형 등은 신간회 활동을 하며 항일 민족운동의 의지를 이어갔다.

글 김덕우

참고 송상도 『기려수필』, 김인순 『일제강점기 영주』, 최대봉 『형제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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