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을 중시하면서 현조 선양에 힘써 온 ‘안협댁’ 사람들

안협공의 4대손 정해창이 2011년 중건한 안협댁 현재 모습
안협공의 4대손 정해창이 2011년 중건한 안협댁 현재 모습

의철이 희현당 처음 짓고-1882 대직 중수-2011 해창 중수
안협댁, 가훈 충신독경·학문으로 영남 명가·가족 문집 발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는 가흥1동 하한정과 문수면 고랑골에 이어 가흥2동 줄포(茁浦)로 올라갔다. 나무고개 넘어 비상활주로(신재로) 중간지점에서 좌회전해 줄포길로 접어들어 농로를 따라 1km쯤 들어가서 상줄교회 앞을 지나면 곧바로 안협댁과 모우재를 만나게 된다.

지난 5월 21일 안협댁 사랑채에서 정해창 희현당 주손을 만났다. 사랑채 도서장은 현조(顯祖) 선양사업으로 발간한 우담전집, 해좌집, 우담정시한선생연보, 왜재 정태진의 생애와 학문, 우담정시한선생 추모한시집, 안협댁 가족문집 등 서책이 벽을 이루고 있다.

정 주손은 “줄포는 나주정씨 400년 세거지로 희현당(안협댁), 검암정사, 봉강서당, 검암종택 등 유적이 남아 있고 최근 설립된 모우재가 있다”고 설명했다.

줄포마을의 유래

줄포는 영주시가지에서 서북쪽으로 약 10리(4km)쯤 떨어진 곳에 있다. 소백산의 힘차고 수려한 줄기가 동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면서 기복을 거듭하다가 차츰 야산으로 변하여 멈추게 된 곳이 이곳이다. 응봉산과 송령산을 배산으로 하여 앞에는 넓은 들녘이 펼쳐져 있고, 소백산에서 발원한 남원천이 주변의 산세와 조화롭게 흐르고 있다. 여기가 나주정씨 400년 세거지 줄포(茁浦)이다.

지금의 동명은 영주시 가흥2동이지만 전에는 영주읍 상줄리 1구라고도 했고, 관아 서쪽에 있다 하여 서포리(西浦里)라고도 불렀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속칭 줄포라고 불러 온지는 무척 오래되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 때는 영천군(榮川郡) 가흥리(可興里) 줄배방(茁排坊)이라 불렀는데 줄풀이 무성하게 자라 줄밭을 이루고 있어서 ‘줄포(茁浦)’라 부르게 됐다는 지명유래가 전한다.

도정공 정의철이 1856년 설립한 봉강서당(鳳岡書堂)
도정공 정의철이 1856년 설립한 봉강서당(鳳岡書堂)

나주정씨 줄포에 터 잡다

나주정씨가 줄포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내력을 정해창 주손에게 들었다.

나주정씨 줄포 입향조는 검암(儉巖) 정언숙(丁彦璛, 1600〜1693)이다. 그는 조선조 인조 13년(1635) 때 안동 판관을 그만두고 원주로 귀향하던 중 이곳(줄포)에서 주위 산수의 아름다움에 반해버렸다. 그래서 창보에 사는 나매음(羅以俊) 공의 농막을 빌려 한동안 유숙하였는데, 그때 마침 병자·정축 2년의 호란이 일어나 나라가 어수선함에 사로(仕路)의 뜻을 접고 줄포에 집을 짓고 살게 됐다.

줄포는 풍광이 명미(明媚)할 뿐만 아니라 공에게는 매음(梅陰) 나이준(羅以俊)과 근향에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등이 있어 좋은 벗이 되었으며, 결국 그들과 더불어 시서(詩書)로 화창(和暢)하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되었다. 그 후 후손들이 줄줄이 줄포 땅에 정착하여 오늘날까지 세거해 오고 있다.

1882년 안협공 정대직이 중건한 안협댁 희현당  옛 모습
1882년 안협공 정대직이 중건한 안협댁 희현당  옛 모습

희현당(希賢堂)의 유래

줄포에 와서 처음 만난 유적지가 안협댁이다. 한옥 사랑채에는 ‘희현당(希賢堂)’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희현당’ 현판의 내력을 여쭈었다. 정 주손은 “희현당(휘 丁義轍, 1791〜1871) 할아버지는 저의 6대조로 희현당(고택)을 지으신 분이시다. 희현당은 호(號)이면서 당호(堂號)이기도 하다”면서 “돈녕부 도정을 지내셨으며, 다산(茶山) 정약용(정약용, 1762〜1836) 선생과 같은 항렬로 학문적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사료된다”고 말했다.

희현당 고택은 나주정씨 23세손 도정공(都正公, 義轍,1791〜1871)이 처음 지었다. 공은 일찍이 원주에 있던 종숙부 해좌공(풍기군수, 형조판서)에게로 가서 학문을 익힌 다음 줄포로 돌아와 낡은 집을 헐고 와옥을 신축하여 당호를 ‘희현당(希賢堂)’이라 했다. ‘희현’이라 한 것은 ‘선비는 현인(賢人)의 경지에 이르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도정공은 안팎으로 효도, 우애, 화목, 구휼 등에 힘을 쏟는 한편 봉강서당(鳳崗書堂, 1856)을 지어 풍부한 학식으로 자제들을 교육함으로써 향리의 번영을 도모하는 등 명실상부한 향토 선비로서 역할을 다했다.

영남의 명가 안협댁(安峽宅)

도정공의 손자 대직(大稙, 1847〜1933)은 1882년 2월 구옥을 헐고 입구(ㅁ) 자형 본채 22칸과 부속건물 11칸을 중건했다.

대직은 사마시에 급제(1892)하여 의금부 도사, 안협현감(安峽縣監)을 지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후 낙향하여 희현당 뒤 언덕에 정자를 지어 송오대(松梧臺)란 편액을 걸고 자선(慈善)을 너그럽게 베풀어 원근 각지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어느 날 옹기장수가 안협댁 앞을 지나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넘어짐으로써 옹기를 모두 깨트리고 말았다. 대직은 옹기장수를 불러 “오늘 운수가 나빠서 그랬지만 우리 집 앞에서 당한 낭패(狼狽)이니 어찌 나에겐들 연관이 없다 하겠소”라며 옹기값 전부를 보상해 주었다.

그 무렵부터 안협댁은 가문의 명성이 널리 전해져 영남의 명가로 자리 잡았다. ‘안협’이란 택호는 대직의 임지였던 안협(현, 강원도 철원군 산하)에서 얻어진 것이다. 그로부터 130년의 세월이 흘러 안협댁은 낡고 허물어졌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오던 중 희현당의 6대손이고 안협공의 4대손인 정해창(丁海昌, 1942〜 ) 주손에 의해 원형(본채 22칸)이 보존된 목조 와가를 2011년 중건했다.

현조(顯祖) 선양사업으로 발간한 문집들
현조(顯祖) 선양사업으로 발간한 문집들

줄포 안협댁 가족문집

안협댁 사랑채는 벽이 모두 도서장이다. 선조 선양사업이 끊이지 않은 듯 출간된 도서로 가득차 있다. 그중에서 「줄포 안협댁 가족문집(茁浦 安峽宅 家族文集)」이란 책을 발견하고, 정 주손께 뵙기를 청했다. 정 주손은 책을 펴 주면서 “책머리에 나오는 가훈 해설은 정범진(전 성균관대 총장) 숙부님께서 쓰셨다”고 소개했다.

책에 “우리집 가훈(家訓)은 충신독경(忠信篤敬)으로 증조부(휘 大稙)께서 정해 주신 것으로,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편에 ‘언충신 행독경(言忠信 行篤敬)’이란 말에서 따온 것”이라며 “자장(子張)이 스승 공자(孔子)에게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통할 수 있는 도리(道理)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이에 공자께서 답하시기를 ‘말에 충실함과 믿음성이 있고, 행동에 돈독함과 존경심이 있으면, 오랑캐의 나라에서도 통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언사가 충실 정직하지 못하고, 행실이 돈독 공손하지 못하면, 비록 질서 있는 주리(州里)에서인들 통하겠느냐?’라고 하셨다. 여기서 공자는 ‘언사(言辭)에는 진실하고 믿음이 있어야 하고, 행동(行動)에는 두터운 인정(人情)과 공손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고 적은 후 ‘우담 선조 10대손 범진(範鎭) 근해(謹解)’라고 썼다.

가족문집 속에는 세계표(世系表), 정범진(전 성균관대 총장)의 서(序), 할아버지 세대의 글, 큰집 가족들의 글을 비롯하여 2,3,4,5,6,7째 집 가족들의 서간문·제문·가사·일기·시·추모문 등 가족 글이 실려 있다.

안협댁 사람들

안협댁 사람들은 교육을 중시하면서 선조의 선양(宣揚) 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가고 있다.

희현당 정의철(丁義轍, 1791〜1871)은 정해창 주손의 6대조로 종조부 해좌 정범조 선조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돈령부 도정에 올랐다. 평소 관대를 반드시 갖추고 행동을 법도 있게 하였으며, 오로지 소학(小學)에만 전념하였다. 교육에 뜻을 둔 그는 향리에 서당을 지어 이름을 봉강서당(鳳崗書堂)이라 하고 집안의 자제들을 모아 배우게 하였다.

정대직(丁大稙, 1847~1933)은 희현당의 손자이고, 정 주손의 고조이다. 진사시에 급제하여 선공감 감역에 임명되고, 이후 의금부 도사, 공조좌랑, 사헌부 감찰, 안협현감, 이천현감을 역임하였다. 1906년 줄포 희현당 뒤 언덕에 송오정을 지어 두문불출하고, 서책과 자연을 벗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정후섭(丁厚燮, 1878〜1927)은 대직의 아들이고 정 주손의 증조부다. 박재형 등과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을 지원하고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참여하던 중 왜경에 발각 채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안협댁 사람들 중에는 현대 인물로 중당 정범진 박사가 있다. 그는 안정국교, 영주농고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학사, 대만사범대 석사, 성균관대 중어중문학 박사, 성균관대 교수, 중국국립정치대학 교환교수, 성균관대 제16대 총장, 동양대 석좌교수, 한국중어중문학회 회장, 한국한시협회 회장, 연민학회 회장, 소수서원 원장, 한국선비연구원 원장, 나주정씨 대종회장, 우담정시한기념사업회 회장, 청조근정훈장 수상, 영주시 주최 제1회 대한민국 선비대상 수상 등 영주가 낳은 자랑스러운 학자요 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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