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상점은 항일독립운동 지원처

박제선(朴齊璿), 1878~1938

풍기읍 산법리에서 출생했다. 1908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08년 3월 30일 한성사범학교 부속 보통학교 본과 훈도에 임명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때, 학생들에게 강제 병합의 불가함을 주장하다가 일제의 감시를 받게 된다. 1913년 영천공립보통학교 훈도, 1917년 풍기공립보통학교 훈도로 근무하였다.

1915년 9월 11일, 봉화공립보통학교 훈도로 있던 처남 류명수, 풍기에서 서당을 운영하고 있던 정응봉, 영주 지역의 부호 자제였던 제자 권영목·이교덕 등과 함께 대동상점을 설립한다. 대동상점은 대한광복회가 만주지방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필요한 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개설한 전국 100곳의 상업 조직 중 하나였다.

1917년 8월 이주지 선정을 위해 만주지방을 시찰한 뒤, 만주 봉천(奉天)으로 이거를 할 준비에 착수하다가, 1918년 3월 영주 주재 일본헌병대에 발각되고, 1918년 5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는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이교덕·권영목 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1938년 세상을 떠났다.

1915년 영주
1915년 영주

대동상점사건(大同商店事件)

1915년 8월 대한광복회의 결성 초기에 개점한 잡화점이다. 1913년 결성된 풍기의 ‘대한광복단’과 1915년 결성된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은 1915년 7월 15일 대한광복회로 힘을 합친다. 대동상점은 이 대한광복회의 연락 및 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영주에 설립된 조직이다.

1917년 12월에는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朴尙鎭) 등과 협의하여 만주에 무관양성소를 세우기로 하였다. 이후 군대교육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였으며, 1918년 3월 일본 경찰에 발각될 때까지 수차례에 걸쳐 1만여 원의 군자금을 조달해 항일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1918년 3월 권영목이 영주 헌병분견소(憲兵分遣所)에 발각 체포되면서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대동상점사건의 중심인물은 박제선과 권영목이다. 박제선은 만주, 경성, 영주를 내왕하며 만주 이주를 모색하였다. 특히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대한광복회가 이미 설립된 만주의 독립운동기지를 후원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독립운동기지의 건설을 모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장소인 대동상점이었던 현 동림당 한의원 자리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장소인 대동상점이었던 현 동림당 한의원 자리

 

유적지 및 공연 안내

대동상점 자리
․영주로 230 동림당한의원

대동상점은 신한은행 앞에 있었다. 해방 이후 월성상회가 되었다가, 삼성전자대리점이 들어서면서 옛 건물을 헐었다. 현재 동림당한약방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신한은행은 1942년 한성은행 영주지점으로 시작한다. 곡물검사소 자리에 새 건물을 짓고 업무를 시작한 이 은행은 1943년 조흥은행으로, 2006년 신한은행으로 이름을 바꾼다. 신한은행이 되면서, 옛 건물은 헐고 새 건물을 지었다.

뮤지컬 '의열'의 한 장면
뮤지컬 '의열'의 한 장면

 

뮤지컬 「의열」

․최대봉/작, 한전기/연출
․일시: 2022년 6월 9일 오후 7시, 10일 오후 4시․7시
․장소: 영주예술문화회관(까치홀)

대한광복회의 결성과 투쟁을 그린 작품이다. 대한광복단의 채기중, 조선국권회복단의 박상진을 비롯해 고종, 이상룡, 안중근 등, 40여 인물이 등장하여 시대의 아픔을 이야기한다. 2019년 첫 공연 후, 2년 만에 다시 올리는 앙코르 공연이다.

 

[미니픽션] 이 나라 이 민족 광복을 찾으리라

“오늘도 다녀갔느냐?”

“예. 아침나절에 한 번 왔다가 갔지요. 지난 여름 선생님께서 만주에 갔다가 온 이후로 매일입니다. 지금도 저쪽에 있을걸요?”

박제선은 권영목이 턱으로 가리키는 쪽으로 보았다. 곡물검사소 인부들 사이에 쪼그려 앉아서 이곳을 향해 힐끔거리고 있는 놈을 볼 수 있었다. 왜놈 순사의 앞잡이 질을 하는 놈이었다. 말투로 보아 서울 쪽 사람인 것 같았는데, 언제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르는 악질이었다. 놈은 제선과 눈이 마주치자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제선은 지난여름 만주를 다녀 왔었다. 꼬박 두 달이 걸린 긴 일정이었다. 3월 7일 중국이 간도에 한국인 거주권과 토지 소유권을 인정한다는 것을 공포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갔다가 왔었다.

이태 전인 1915년 문을 연 대동상점은 표면상 잡화점이지만, 사실은 만주를 중심으로 해서 국권 회복의 활동을 개시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대동상점의 중심인물은 박제선과 권영목이었다. 한성사범학교 훈도로 있던 제선이 1913년 고향에 세워진 영주 공립보통학교 훈도로 와서 근무하며 만난 사제 간이었다. 그리고 봉화 공립보통학교 훈도로 있던 처남 류명수와 풍기에서 서당을 운영하고 있던 정응봉, 영주 지역의 부호 자제였던 또 다른 제자 이교덕이 참가를 하였다.

이들은 영주에서 상업을 경영하다가 남만주로 이동하여 조선인을 규합하여 국권 회복을 위해 거사한다는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이것은 당시 국권 회복 운동이 표방하던 독립운동기지의 건설이라는 방략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대한광복회를 비롯한 국내 독립운동단체들의 활동 목적과도 같았다.

제선이 만주를 다녀온 뒤로 일은 빨리 진행되었다. 이듬해 3월까지 만주로 옮길 것을 결정하고 조용히 상점의 물품들을 처분했다. 1917년 12월에는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朴尙鎭) 등과 협의하여 만주에 무관양성소를 세우기로 하고, 권영목을 우선 만주로 보내 군대교육을 받도록 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군사교육은 중국 길림성(吉林省) 독군(督軍)에 맡기기로 했다. 그곳의 책임자인 맹사원에게 약속을 받아낸 터였다.

“풍기 채 선생님이 보내신 겁니다.”

응봉은 품속에서 돈 봉투를 꺼내어 인삼 꾸러미와 같이 전한다. 밖을 살피던 제선은 교덕한테 눈짓했다. 교덕은 봉투를 받아 품속에 감춘다.

“권상수, 송주찬에게 받은 것이랍니다.”

“이제 일 만원이 다 되었지?”

“예! 교덕이 어른께 받은 것 합치면 그렇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이 하늘 이 땅을 다시 찾으려는 마음이다. 왜놈들 침탈에 나라를 뺏겼다고, 울분의 세월만 한탄하면 누가 이 나라 백성을 보듬을 수 있을까? 우리가 이것으로 도리를 다하지 못하면 원통하고 또 원통할 것이다. 응봉! 교덕! 우리 명심하자.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 내려보아도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응봉과 교덕은 어금니를 문다. 그때 순사 앞잡이가 거들먹거리며 가게에 들어섰다. 모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응봉은 얼른 가게를 구경하듯이 딴짓을 한다.

“박 사장님 어젠 어딜 다녀오셨나요? 샘요~ 요즘 출타가 아주 잦으십니다요. 무슨 재미진 일이라도 꾸미십니까?”

“와? 장사치가 전국팔도 어딜 못 댕기나? 내가 어디로 가서 장사하든지 말든지 그건 니가 상관할 바가 아니고. 그런데 어디 따라 할 게 없어서 왜놈 콧수염이나 따라하노.”

“아 이 수염 멋지지 않아요?”

하더니 “다무라 경부님이 이 대동상점에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라며 낄낄거리면서 나간다. 교덕과 응봉은 놈이 나간 문 쪽을 보며 분해한다.

“자, 자. 이군! 이거 저 뒤 창고에 넣어놓고…. 그리고 영목 편에 만주로 보낼 물건들 채비 좀 해주시게.”

“예, 선생님.”

“그래, 이제 다들 들어가 쉬게나. 아 참, 정군! 이번에 상해에서 들어온 권총도 몇 자루도 가져올 걸세. 채기중 선생께 바로 전하겠다고 말씀드리게.”

“예, 선생님. 그럼 전 이만…. 채 선생님께 말씀 잘 전하겠습니다.”

“그런데 영목 군한테서 다른 소식은 없었나? 서울에 갔던 박상진 총사령이 돌아오시면 바로 만주로 같이 떠나야 하는데….”

“네. 아직….”

응봉은 나가면서 인사를 하는데, 유명수가 급하게 들어 온다.

“샘요, 샘요. 크, 큰일 났심더.”

“뭐고? 무슨 일이고?”

“영목 동지가, 영목 동지가 영주헌병대에 잡혀 갔심더. 지금 고문당하고 있다 캅니더.”

“뭐라? 영목 군이 자세히 말해 보시게.”

“단양에서부터 꼬리가 잡힌 거 같심더. 제천 지나면서 연통이 왔는데 해지기 전에 우리 상회에 줄 물건 놓고, 풍기로 가겠다고 했는데…. 주재소가 시끌벅적 해 가지고, 염탐을 나갔다가 저 영목 동지가 다쳐가 잡해 갔다고….”

“선생님! 제가 구출하러 가겠심더. 교덕아 총알 한 통 가져오너라.”

응봉은 소리친다. 교덕은 총알 통을 건네며 같이 가겠다고 나선다. 망이라도 보겠다고 한다.

“잠깐만, 잠깐만….”

제선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책상에 기대선다.

“안된다. 응봉! 자네는 빨리 채기중 선생께 전해라. 만약을 준비해야 한다.”

제선의 머릿속엔 원통함이란 생각만 스쳐 지나갔다.

1917년 8월 이주지 선정을 위해 만주지방을 시찰한 뒤, 1918년 3월경부터 만주 봉천(奉天)으로 이거할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울의 매동공립보통학교 훈도 김노경도 참여하였다.

하지만 1918년 3월 영주 주재 일본헌병대에 권영목이 체포되면서 관련자들도 함께 체포되었다. 이에 박제선은 1918년 5월 3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공소를 신청하여 1918년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금고 6월을 받았다.

1918년 조직망이 발각되고 주요 인물들이 검거되어 조직이 크게 와해 되었으나, 그 후에도 일부 조직원들이 만주로 건너가 암살단, 의열단에 가입하면서 독립운동을 끝까지 펼쳐나갔다.

글 김덕우 작가

참고자료 송지향 『영주영풍 향토지』, 영주디지털문화대전, 최대봉/작 뮤지컬 「의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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