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과 6명 배출한 고랑골 마을의 상징 ‘육인수(六印樹)’

인문 계발 위해 8개 문중 협력 1671년 난고서당 설립
급제 홍패 동구 느티나무에 걸고 천지신명에 경축 고사
작은 마을 대과급제자 6명 배출은 난고서당 교육 덕분

육인수(六印樹) 유래 기사비
육인수(六印樹) 유래 기사비

우리고장 영주는 시내를 벗어나면 발길 닿는 곳마다 문화재(文化財)를 만날 수 있고, 만나는 마을 마다 숨겨진 보물이 많아 ‘역사와 문화의 고장’이라고 말한다.

기자가 ‘영주의 마을’을 탐방할 때, 우리 고장에서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마을로 희여골(풍기 백동白谷), 고랑골(皐蘭谷, 문수), 서릿골(蟠谷, 가흥동 하한정)을 꼽았다. 그러고는 ‘인재 배출 3골(三谷)’이라 칭했다.

그래서 이번에 찾아간 곳이 문수면 권선리 속칭 고랑골(皐蘭谷) 마을이다. 연화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 ‘육인수(六印樹)’라는 오래된 나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가게 됐다. 이 마을은 반남박씨 350년 집성촌으로 보물이 많을 것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이 마을 출신인 반남박씨 문중 박찬욱 도유사와 영주역사의 백과사전이라는 별명이 붙은 박춘서 전 도유사와 동행하게 됐다. 이것저것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다.

동구(洞口)에 차를 세웠다. 이곳 동구는 고랑골의 수구(水口)로 예전에는 요왕(夭枉) 살이 있다 하여 조산(造山)을 만들고 못을 파고 버드나무를 심어 앞을 가리게 했다는 전설도 있다. ‘육인수유래기사비’ 앞에 섰다.

박찬욱 도유사는 “조선 때 이 마을 선비가 대과에 급제하면 그 홍패(급제증서)를 여기 나무에 걸고 하늘에 고(告)하는 제사(告由祭)를 지냈는데 이 작은 마을에서 대과 급제자를 6명이나 배출하여 ‘육인수(六印樹)’라 부르게 됐다”고 말했다.

인재양성의 산실 '난고서당'
인재양성의 산실 '난고서당'

고랑골 육인수(六印樹)

원래 육인수 나무는 기사비 뒤쪽으로 10여 걸음 위치에 있었는데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오래 전에 고사하고 그 아들 손자 나무들이 육인수를 대신하고 있다.

기사비를 읽어 봤다. 기사비 첫머리에 “유아(惟我) 고랑골의 개동(開洞) 선조이신 가내 인문계발(人文啓發)을 위하여 팔개문중(八個門中)이 협력해서 현종 12년(1671)에 선공(嘉善公) 래길(來吉)과 동추공(同樞公) 처길(處吉)은 효종년대(1650년경)에 배탄동(盃呑洞, 장수면 보통골)에서 이우(移寓)했다.

후손들의 입신양명(立身揚名)과 향난고서당(蘭皐書堂)을 설립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할 때 오문(吾門)에서는 대과 6명 소과 4명이 급제하니 그 홍패(紅牌)를 동구의 큰 느티나무에 걸고 천지신명께 경축 고사를 올렸는데 그 나무를 육인수(六印樹)라 전한다. 이 사실은 전국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발군(拔群)의 위적(偉績)이라 할 것이다”라고 썼다.

선조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연방정'
선조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연방정'

육인수에 홍패 건 인물들

육인수(六印樹)에 홍패를 건 사람은 대과 급제자 6명이다. 기사비에 “육인수에 괘인(掛印)하였다”라고 새겼다. 괘인하였다는 것은 ‘홍패를 육인수 나무에 걸고 하늘에 고하는 경축 제사를 지냈다’는 뜻이다.

고랑골이 낳은 대과 급제자로 육인수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6명으로 다음과 같다.

박사용(朴士龍, 1563生) 무과에 등과하여 가선대부 호군을 지냈다.
박사일(朴思一, 1664生) 문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 흥양(현 고흥) 현감을 지냈다.
박명세(朴命世, 1669生) 문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 음죽(현 이천) 현감을 지냈다.
박숭고(朴崇古, 1676生) 문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 옥구(현 군산) 현감, 예조좌랑을 지냈다.
박민고(朴敏古, 1680生) 문과에 등용하여 통훈대부 결성(현 홍성) 현감,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박상진(朴祥震, 1693生) 문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 성균관 직강을 지냈다.

선조가 남긴 교지, 과거 시험지 등 유물
선조가 남긴 교지, 과거 시험지 등 유물

그 외 기사비에 새긴 인물

기사비에는 대과 급제자 6명 외에 6명의 행적이 더 기록되어 있다. 그 명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박이형(朴而炯, 1612生) 가선대부용양위부호군에 올랐다.
박사근(朴思謹, 1653生) 생원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박세렴(朴世廉, 1660生) 삼삼중진사(三三中進士)에 올랐다.
박진양(朴震陽, 1839生) 노직통정대부(老職通政大夫)에 올랐다.
박재두(朴齊斗, 1840生) 노직통정대부(老職通政大夫)에 올랐다.
박승복(朴勝復, 1879生) 향중 거유(巨儒)로 시서에 효통(曉通)하고 낙천(樂天)하고 지명(知命)한 철리(哲理)에 도달한 사학(斯學)의 전승자(傳承者)이다.

육인수기사비를 세운 뜻은

기사비 말미에 “어호(於乎)라 흥망(興亡)과 성쇠(盛衰)가 윤회하고 부패(腐敗)와 타락(楕落)과 개혁(改革)과 일신이 유전(流轉)하는 무상한 인세에서 세도와 인심이 비익(裨益)이었기를 바라면서 소수서원 전 원장 해봉승운공(海峯勝雲公)의 유지를 받들어서 찬동 한서 찬석 경서 승대 찬욱 찬오 등 제현이 위선선역(爲先善役)을 추진하는데 감명하여 촉청(囑請)에 따라 숭조경손(崇祖警孫)하는 뜻에서 삼가 이글을 마련하니 내후자(來後者)의 진실한 책류(責謬)가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2009년(二千九年) 기축(己丑) 입하절(立夏節) 고랑골(高浪谷) 후생 춘고(春高) 태서(台緖) 근지(謹識)”라고 썼다.

인재배출의 산실 난고서당

난고서당은 고랑골 앞산 아늑한 곳에 자리 잡았다. 기자가 2014년 마을 탐방 갔을 때는 가는 길도 험하고 서당 건물도 퇴락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서당 건물은 새롭게 중수하였고, 가는 길도 포장도로로 정비됐다. 후손들이 힘써 노력한 결과로 보인다.

고랑골은 반남박씨 집성촌으로 병자호란 직후(1640∼1650)에 장수면 호문리에서 박내길·처길 종형제가 이곳에 와서 삶의 터전을 개척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박춘서 전 도유사는 “작은 마을에서 대과급제 6인이 탄생했다는 것은 대단하고 ‘교육의 힘’이 크다고 행각한다”면서 “입향조이신 내길 처길 선조님의 교육관을 존중한다. 이를 초석으로 서당을 건립하여 인재양성에 힘쓴 결과 ‘육인수’가 탄생됐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귀띔해준 귀한 선물”이라고 말했다.

난고서당으로 가는 길목에 표석이 세워져 있다.

「난고서당은 고랑골을 개척한 박내길·처길 재종형제분이 주축이 되어 향내 뜻있는 8개 문중(반남박·풍산류·의성김·야성송·전의이·인동장·옥천전·평해황씨)이 인재 양성을 위해 1690년에 목조 와가로 학사 10간과 주소 6간을 완성하고, 풍산류씨 류성룡의 현손 류희지(柳熙之)를 사부로 모시고 향내 현(賢) 자제들을 모아서 경학과 도학 등 영재 양성에 힘써 대과 13인 소과 5인 대유학자 1인을 배출했다」고 적었다. 마을에서 200여m 떨어진 곳에 서당이 있다.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조용한 곳에 서당이 자리 잡고 있다.

박내길·처길의 후손들

고랑골에는 입향조 박내길·처길의 후손들이 지금까지 살고 있다. 육인수 모랭이를 돌아가면 산숲에 난곡정(蘭谷亭)이 보인다. 이 정자는 마을을 개척한 박래길 선조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정자다.

마을 안쪽으로 200여m 더 올라가면 연방정(聯芳亭)이 나온다, 이 마을 박찬석(87) 어르신은 “이 정자는 박숭고(1705 문과급제) 선조와 박민고(1715 문과급제) 선조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1970년대 초 건립했다”며 “저의 집에는 숭고 선조의 을유(1705) 문과급제 교지, 1719년 성균관 전적 교지, 문과 시권(試券) 등을 소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방정을 둘러보고 박찬석 어르신댁으로 가서 고방 속 가죽 가방에 숨겨 둔 오래된 문적과 교지, 세고, 시권 등을 살펴봤다.

박찬욱 도유사는 “박숭고 선조는 저의 9대조로 을유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춘추관기사관, 은계수령, 옥구현감을 역임하셨다”며 “현재 형님(박찬석)댁에는 박사근의 생원 입격 교지(1682), 박숭고 문과 병과 급제 교지(1705), 박숭고 통훈대부 옥구현감 교지(1722), 박숭고 문과 시권 등 100여 점이 넘는 교지류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오래된 그림, 글씨 등 보물급 유물이 여러 점 있다”고 말했다.

박춘서 전 도유사는 “이렇게 많은 유품들을 소장하고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며 “이 유물 중에는 박숭고 선조 당시 오래된 유물도 있는 듯하니 이 속에 오래된 진짜 보물이 있지 않을까 기대된다. 이 귀한 유물들이 국학진흥원 등으로 가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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