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한 대학자(소고)의 흔적이 남아 있는 한정마을 ‘하한정’

'하한정'이 있는 한정마을 전경
'하한정'이 있는 한정마을 전경

소고 선생이 여름에도 시원하다 하여 ‘하한정(夏寒亭)’
소고의 ‘향나무’ , 소고 문과급제 유가행렬 깃발 ‘장대’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영주를 소개할 때 “역사와 문화의 고장 영주시입니다”라고 말한다.

영주는 시내만 벗어나면 가는 곳마다 유적지이고,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곳곳마다 귀한 보물들이 숨겨져 있다.

시내 육거리에서 현대아파트 쪽 비달고개를 넘으면 한정교가 보인다. 다리 건너 한정마을 초입에는 큼직한 돌에 하한정(夏寒亭)이라고 새긴 표지석이 탐방객을 맞이한다.

돌에 새겨진 하한정 글씨가 한석봉이 쓴 글씨라고 하니 ‘이 또한 보물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새마을 도로를 따라 마을로 들어가면 허름한 집들이 보이고, 마을 중간에 ‘하한정’이란 현판이 걸린 고가(古家)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앞에는 오래된 향나무 한 그루가 있다.

한정마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보물이 숨어 있을까?’ 늘 궁금해 하다가 지난 4월 21일 반남박씨 판관공파 종중 박춘서 도유사와 한정마을에 가서 숨겨진 보물을 하나 둘 셋 찾아봤다.

하한정과 집고재, 장판실
하한정과 집고재, 장판실

하한정(夏寒亭)

하한정은 정자 이름이면서 마을 이름이기도 하다.

하한정이 자리 잡은 이 지역은 조선 시대 때 서천을 사이에 두고 동쪽에는 영천군 산이리 초곡방(사일)이 있었고, 맞은편 서쪽에는 가흥리 초곡방(한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초곡(草谷)’이란 수풀이 무성하다는 뜻으로 푸실이라 부르기도 했다.

조선 중종 무렵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1517∼1586)의 아들 박록(朴漉, 1542∼1632)이 초곡(푸실)에 터를 잡고 정자를 세우니 그의 아버지(소고)가 하한정(夏寒亭)이라 이름 지었다.

하한정은 여름 하(夏)자와 찰 한(寒)자를 조합해 지은 정자 이름으로 ‘여름에도 시원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한정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라고 전한다.

박춘서 도유사는 “소고 할아버지의 아들 박록(朴漉, 1542∼1632) 선조께서 한성에서 벼슬(의금부도사·예빈시별제 등, 1594∼1604)하고 있을 때 명필 한석봉(韓濩, 1543∼1605)과는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이때 한석봉이 ‘하한정’이라고 써 준 글씨가 지금 ‘하한정’ 현판 글씨”라고 말했다.

두암 김약련(斗岩 金若鍊, 1730∼1802)이 지은 ‘하한정 중수기’에 그 내력이 있어 살펴보기로 한다.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더운 것은 하늘의 규칙이다. 그런데 간혹 겨울이면서도 그리 춥지 않고, 여름이면서도 그 열기를 잊을 수 있게 하는 것은 땅이 그렇게 해주기 때문이다. 옛날에 소고 선생께서 강직한 말 때문에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하시고, 반곡(蟠谷)의 전장(田庄)으로 물러나 사셨다. 이때 그의 아들 취수공(醉睡公 朴漉)께서 소고 선생의 뜻을 받들어, 집의 남쪽 수십 걸음 떨어진 곳에 정자(亭子)를 지으시고는, 소고 선생께서 여름에 거처하실 곳으로 삼았다. 고른 땅은 시원스레 탁 트였고, 앞에 큰 시내를 마주하고 있다. 바람을 끌어들이고 초승달을 맞아들이는 자세로, 그곳에 있으면 여름 햇볕이 무서운 줄 몰랐다. 그래서 그 정자의 이름을 ‘하한(夏寒)’이라고 하였다.

아! 이 정자가 처한 땅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 땅은 산수가 훤하고 수려하며 풍경이 그윽하다. 정신을 산란시키는 형세는 보이지 않는다. 폭염이 가운데 있어도 열을 발산하지 못한다. 진실로 살기에도 마땅한 곳이다. 소고 선생께서 자신의 몸을 편안히 쉬게 하고 자신의 뜻을 충족시키면서 생을 마칠 때까지 반곡에서 즐기실 수 있었던 것은 이 정자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고의 향나무
소고의 향나무

소고가 심은 울릉도 향나무

하한정 앞에 수백 년 수령의 향나무가 한그루 있다. 말(馬)을 매어두기도 했다는 향나무다. 이 향나무는 소고 선생이 직접 심은 나무라고 하니 ‘문화재급 향나무’라는 생각이 든다. 선생이 1571년에 심은 향나무로 전해오고 있으니, 이해 7월 황해도 관찰사로 제수되어 가기 전에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향나무는 1982년 ‘영주시나무’로 지정된 보호수다. 수령은 400년으로 새겨졌다. 향나무 밑둥 둘레는 1m 70cm, 높이 4m 10cm, 동서 가지 사이 거리는 6m쯤 되는 고목이지만 푸름을 잃지 않은 채 씩씩하게 자라고 있다. 좀 더 가까이 가서 몸체를 살펴보니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시멘트 같은 것을 채운 대수술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서까래와 벽체 사이에 보관된 '대나무장대'
서까래와 벽체 사이에 보관된 '대나무장대'

박춘서 도유사께 향나무의 내력을 여쭈었다.

박 도유사는 “이 향나무는 소고 할아버지께서 1571년에 심은 향나무로 기록돼 있다”면서 “소고 선조님의 처삼촌인 권오상(權五常, 예천인, 1475~1506)이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 연산4)에 연루되어 울릉도로 유배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가지고 온 3그루 중 1그루로, 예천 처갓집 본가에서 옮겨다 심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 속칭 대수마을에도 권오상이 울릉도에서 가지고 왔다는 향나무 1그루 있는데 이 향나무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110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울릉도 향나무”라며 ‘울향’이란 애명을 쓰기도 한다.

유가행렬 깃발 ‘장대’

조선 때 과거급제자는 ‘3일 유가(遊街)’라 하여 3일 동안 풍악을 울리며 축하 행진을 벌였다. 과거 급제자의 유가 행렬은 가문의 영광이요 주민들에게는 볼거리가 되기도 했다.

유가 행렬은 깃발을 앞세우고 악사와 재주부리는 광대가 뒤따른다. 급제자는 앵삼(鶯衫, 황색예복) 차림에 어사화가 꽂힌 복두(幞頭)를 쓰고 말에 올라 사흘 동안 마을을 돌았다. 유가 행렬이 있을 때는 동네 여자들까지 담 너머로 목을 내밀고 급제자의 모습을 구경할 만큼 당시 사람들에게 즐거운 구경거리가 되었다. 소고 선생 과거급제 내력은 다음과 같다.[潘南朴氏判官公派 落南五百年史]

선생 23세(중종34, 1539) 8월 진사시 1등, 생원시 2등으로 합격하다.

선생 24세(중종35, 1540) 2월 생원시 복시에 합격(3등 30인), 진사시 복시에 합격(2등 21인)하다.

4월 문과(文科) 급제하다. 병과(丙科) 11인이다. 선생과 셋째 형 승간(承侃)이 함께 급제하다.

소고 선생이 문과에 급제한 때는 1540년 4월이다. 이때 유가 행렬이 있었던 것으로 구전되고 있다. 기록으로 전하는 바는 없지만 유가 행렬 선두에 들었던 깃발 장대(長-)가 하한정 아래채 집고재와 장판실 뒤 지붕 서까래와 벽체 사이에 매달아 보존되어 왔다. 대나무 장대 둘레는 25cm, 장대 높이는 7m 80cm이다.

박 도유사는 “이 대나무 장대가 여기에 보관되어 있는 줄 아는 사람이 드물다”며 “제 할아버지께서 ‘이 장대가 유가 행렬 때 깃발을 달았던 장대’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박 도유사는 “이외에도 종가에서 보관해 오던 어사화 등 유품이 있었으나 도난당한 걸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하한정 현판
하한정 현판

소고의 책방 ‘장판실’

소고가(嘯皐家)의 유언은 “책 잘 보관하라”이다. 그만큼 책을 소중히 했다는 뜻이다.

하한정 아래채에는 목판을 보관한 집고재(集古齊)와 책을 보관한 장판실(藏板室)이 있다.

30년 서울 벼슬 생활 동안 셋방 전전한 소고는 청빈한 생활 속에 굳게 지킨 지조를 끝까지 더럽히지 않았다. 벼슬 생활을 40여 년 동안 했지만, 고향에는 기와집 하나 남기지 않았고, 약간의 척박한 땅이 있을 뿐이었다. 서울 벼슬 생활 동안에도 여기저기 셋집을 얻어서 가난한 살림을 꾸려갔다. 간혹 녹봉이 좀 저축되면 즉시 서적과 바꾸었다. 그래서 책이 많다.

그의 집은 말끔한 책상과 따스한 난로가 있고, 온 벽은 책으로 가득 채워졌으며, 고개 숙여 글을 읽고 머리 들어 생각하면서 언제나 정중해 털끝만한 동요도 없었다.

그가 사는 마을에 집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대학자이자 큰선비의 집인 줄은 아무도 모를 정도로 문 앞이 항상 조용했다.

집고재와 장판각
집고재와 장판각

박 도유사는 “소고 할아버지께서 평생 모으고 즐겨 읽던 책들은 장판실에 보관해 왔는데 그 수가 1천800권이 넘었다”며 “현대까지 잘 보관해 오다가 10여 년 전 한국국학진흥원·소수박물관에 기탁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판실 옆 집고재에는 소고 선생 문집 목판 등 수백 장의 목판이 보관·관리되어 왔는데 이 역시 한국국학진흥원·소수박물관으로 보내 위탁관리하고 있다.

박 도유사는 “소고 선조께서 벼슬을 그만두고 쉴 때마다 하한정에 머물렀는데 그때마다 영남의 유생들이 배움을 청하여 이곳으로 몰려왔다”고 말했다.

하한정은 영주가 낳은 청렴한 대학자 소고 선생이 만년에 거처하던 집이다. 올여름에는 거기 한번 가서 시원한 땅의 기운을 체험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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