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조국을 위해 평생을 바친 선비

김동진(金東鎭), 1867~1952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정산(貞山). 부석면 상석리에서 태어났다. 1884년 권연하의 가르침을 받다가, 스승의 추천으로 1889년 김흥락의 제자가 되었다. 김흥락은 이황에서 이상정으로 이어지는 영남학파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이다. 그리고 1904년 매학당, 1906년 관선재, 1907년 은구재를 건립하며 후학양성에 힘쓰면서, 1918년 도강서당(道岡書堂)이 있는 부석면 상석리에 동계구곡(東溪九曲)을 만들어 경영하였다.

김동진은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른다. 1911년엔 고종의 밀지와 관련으로, 1914년엔 대한독립의군부의 활동으로, 1919년엔 파리평화회의 독립청원서에 서명으로, 1926년엔 제2차 유림단 의거에 참여로 수형생활을 한다.

1952년 12월 22일 부석면 상석리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문집으로 『정산집(貞山集)』이 있다.

파리장서
파리장서

파리평화회의와 파리장서운동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의 종결을 위하여 승전국들이 파리에서 개최한 강화 회의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 민족해방, 무배상, 무병합의 강화 조건을 유발하는 배경이 되었다. 1월 18일에 열렸는데, 1920년 1월 21일 회담은 국제 연맹 총회 첫 개회로 마무리된다. 이는 3.1 운동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3·1운동에 주동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 유림들은 파리평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파리로 보낸 긴 편지’를 작성하여 보낸다. 이를 ‘파리장서(巴里長書)’라고 한다. 본문은 2,674자에 이르는 한문체로서, 유림대표 곽종석이 기초하였다.

그 내용은 일제가 저지른 만행, 명성황후 시해와 고종 광무황제의 독살 및 한국 국권의 찬탈 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것이었다. 많은 외신이 깊은 관심을 가졌고, 국내에선 제2차 유림단 독립운동, 항일의병과 무장 투쟁 등 국내외 항일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전국 유림 대표 137명이 연명(連名)했던 이 청원서에 영주에서는 김동진을 비롯하여, 김택진(金澤鎭, 가흥리), 정태진(丁泰鎭, 줄포), 권상두(權相斗, 성밑)가 참여하였다.

유적지

도강서당
도강서당

- 도강서당
부석면 의상로 1375-4(상석리 364-7)

1900년경에 김동진이 후진 양성을 위해 건립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99년 3월 11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31호로 지정되었으며, 뒤쪽에 김동진의 묘소가 있다. 건립 연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김동진의 독립운동 장소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동계4곡 창고대
동계4곡 창고대

- 동계구곡

김동진은 도강서당 앞으로 흐르는 낙하암천에 구곡을 선정하여 경영하였다. 이는 1183년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그 앞으로 흐르는 주천(朱川)에 구곡을 정하여, 성리학적 사유 체계를 그 절경에 투영하며 후학을 양성한 주자(朱子)의 삶을 따른 것이다. 동계구곡은 상석리에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며 선암대(仙巖臺) 호산대(湖山臺), 회고대(懷古臺), 창고대(蒼臯臺), 능운대(凌雲臺), 풍영대(風詠臺), 자하대(紫霞臺), 옥간대(玉澗臺), 명구대(鳴璆臺)란 글씨를 바위에 새겼다.
 

[미니픽션] 훈장과 참봉

“이놈들! 내 목을 베어라. 머리를 자를지언정 갓은 벗기지 못할 것이다.”

갓을 벗기려 했지만, 동진의 찌렁찌렁 울리는 목소리에 왜경들이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온종일 감방 속에서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의관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동진이 이곳에 온 것은 오월 보름이었다.

단오를 지내고 며칠 뒤, 순흥향교에 동진이 서명을 한 문서가 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동진은 석 달 전 서명을 했던, 파리로 보냈다는 독립청원서일 것이라고 짐작을 했다.

순흥 읍내에 사는 김교림의 기별을 받고, 가흥면 김택진의 사랑에 갔다. 줄포의 정태진과 성밑에 사는 권상두는 먼저 와 있었다.

“국경(김동진의 자). 잘 오셨습니다. 이렇게 보자고 한 것은 심산(김창숙의 호)에게 기별이 왔기 때문입니다.

“심산이라면?”

“네. 김창숙이라고 곽종석 선생의 문하이지요. 이제 약관인데 활동력이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김창숙이었다. 먼지투성이었지만, 얼굴은 맑아 보인다. 교림과 뒷방에서 잠시 얘기를 나누더니, 돌아와서 곽종석 선생의 말씀이라고 전한다. 곽종석은 전국 유학자를 대표하는 이 였다.

“선생께서는 오늘날 우리가 왜적의 노예가 된 것도 유림의 부패한 까닭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3월 1일, 독립선언서에 유림 대표가 참가치 못한 것도 우리 유림에게는 참을 수 없는 수치요, 충격적인 만큼,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새 일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일은 전국 유림이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여 우리의 독립을 국제여론에 호소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모두 그 자리에서 바로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였다. 김창숙은 감사하다며 손을 잡는다. 그리고 바로 봉화로 떠났다.

그 청원서가 향교에 배달되고 며칠 뒤, 일본 순사들이 도강서당으로 들이닥쳤다. 빨리를 외치는 왜경들을 동진은 지긋이 바라보았다. 왜경은 멈칫하더니 먼 산을 바라본다. 그 시선을 따라가 본다. 동계 2곡인 호산대(湖山臺) 너머로 동산이 보인다. 날아오르는 왜가리 위로 희미하게 낮달이 보였다.

동진은 왜경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보름이 지났다.

김교림이 면회를 왔다. 동진은 면회를 온 교림을 나무랐다. 교림은 고개를 흔든다. 교림은 동진보다 두 살 위이다. 그래서 깍듯이 예우하려고 하지만, 교림이 더 깍듯하다.

5년 전이었다. 1914년에 동진이 대한독립의군부에 가담했다고 순흥 감옥에 가둔 적이 있었다. 그때, 교림은 밥 짓는 종을 시켜 동진의 끼니를 챙기면서, 동진이 밥을 먹었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수저를 들었다고 한다. 혐의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하여 20일 만에 풀려났는데, 교림은 그 일을 그동안 계속했다고 한다.

“국경, 정말 미안하외다. 나는 연명에 빠지면서….”

“아닙니다. 인직(김교림의 자)께선 더 큰 일이 있지 않습니까?”

김창숙이 영주부터 찾은 것은 교림 때문이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선 사람을 모으는 일보다 자금을 확보하는 일이 더 큰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김교림은 이 일을 잘 이해할뿐더러, 이 일을 도울 수 있는 재력가였다.

“심산도 참 대단한 사람이랍니다.”

“왜요? 또 무슨 일이….”

“아! 글쎄. 8일에 서울에서 출발하여 성주와 거창을 거쳐 영주에 왔는데, 그날이 열하룻날이었잖아요. 그리고 열닷샛날 다시 서울에 갔다니, 어디 그게 사람이요? 그나저나 작년 이맘때 동계구곡을 거닐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렇지요? 돌이켜 보니, 그때도 인직께서 도와주지 않으셨으면….”

“무슨 말씀을…. 그 일이 너무 좋아서 한 일입니다.”

“구곡을 정하고, 경영하며 학문만 생각한 게 아니었습니다. 무이산까지 들어가게 한 그 시대를 생각했습니다.”

“그렇군요. 남송 때였지요? 금나라가 판을 치던.”

교림은 고개를 끄덕인다. 주희가 무이구곡을 만든 것은 1183년이었다. 여진족인 금나라가 송나라를 짓밟고, 송나라는 남쪽으로 내려가 남송을 만든 시기였다. 동계구곡을 구상하고, 경영하면서 늘 동진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그 상황이었다. 성리학으로 나라를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언제 어래산으로 피난하러 간 적이 있었지요?”

“그랬지요. 을미년의 비보를 듣고 경악 할 때지요.”

“저는 그때, 대의를 위함에 있어 성패를 따질 일이 아니라 해도, 오합(烏合)을 모아 강적을 상대한다는 것은 굶주린 호랑이에게 고기를 던져 주는 격이라 했지요.”

“하지만 그때 국경은 어래산에 함께 온 문도들에게 탐구와 강론으로 잠시도 편한 적이 없었잖습니까?”

“하지만 잠시도 그 판단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한 문도가 이런 질문을 하더군요. 성현의 글만 읽으며 시의를 모르고 지내다가 갑자기 어려운 경우에 부닥치게 되면 대처하기 어려울 것이니, 신학문을 함께 익힘이 어떠 하올지…. 마음만 확실히 세우면 빠져들 염려는 없을 줄 압니다만….”

“그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시속을 좇고 세력에 아부함은 밝은 세상에도 경계할 일인데, 지금같이 흐리고 어두운 세상엔 더하지 않을까 했지요. 시대와 더불어 나간다는 것은 옛날과 지금을 참작(參酌)하며, 치세(治世) 제도를 따른다는 뜻인데, 평소에 도덕을 공부한 선비로 어찌 임금과 어버이를 배반하고 원수 오랑캐를 섬기는 무리의 무릎 아래 길 수가 있겠습니까?”

교림은 동진을 가만히 바라본다. 동진의 갈등과 분노를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아홉째인 명구 대(鳴璆臺)를 소계(韶溪)와 문천(文川)이 만나는 소천리 동산에 만들며 이런 시를 지었지요, 세밑에 학문을 배우는 소년들에게 부끄럽네, 시냇물 소리 귀에 가득하여 앞서가길 재촉한다, 라고요.”

교림은 동진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성리학의 정통을 고수했던 동진에게 지금은 자괴감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후학들에게는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국경! 네 번째 곡이었던가요? 나는 창고대(蒼臯臺)에서 쓴 국경의 시가 늘 가슴에 있답니다. 층암의 가파른 절벽이 몹시 위태로워 위험스러운 것이 다할 땐 다시 기이함이 있어라. 기이한 절경은 평탄한 곳과 같지 않으니 바라건대, 그대 노력하고 다시 깊이 생각할지어다.”

대구의 여름은 찌는 듯이 더웠다. 하지만 동진은 늘 의관을 갖추고 꿇어앉아 강론했다고 한다.

“공부란 성인을 배움이다. 성인을 배운다는 것은 성인과 같아지려 함이다. 하지만 성인의 말을 배움에 그친다면 성현의 가르침을 공부한 보람이 없다. 오늘이 어떠한 때인가? 시국을 구원하고 세속을 바로잡아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지 않은가?”

8월 초 대구지방법원에서 첫 공판이 열렸다. 그렇게 동진은 40일간 대구형무소에서 그해 여름을 보냈다.

글 김덕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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