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가 신하와 독서·문답·정사 술회한 「어제초경후재경전문답」

류익지가 고상(故相, 옛 영의정) 류영경의 6대손임을 확인한 영조가
류익지 통해 전주류씨 선대와의 인맥 관계를 문답하고 술회한 기록
류익지는 순흥 돌다리 출신으로 1762년 식년문과 갑과 제2인 급제

어제초경후재경전문답(御製初庚後再庚前問答)은 영조(英祖,재위:1724~1776)가 친히 집경당(集慶堂) 서연(書筵)에 나아가 신하들과 독서하고, 주고받은 문답 내용과 정치적 술회를 기록한 것이다. 이것을 첩(帖)으로 제작하여 내전(內殿)과 동궁전(東宮殿)에 각 1건씩 내입시키고, 입시했던 신하들에게도 분사(分賜)했다.

이 책은 당시 승정원 기사관이었던 유익지(柳翼之, 1733∼1786)가 받았던 것으로, 2005년 1월 7일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63호로 지정되었다. 당시 충주시 문화동 소재 전주류씨(全州柳氏) 낙봉공파(駱峰公派) 종중에 소장되어 있다가 2012년 종중 대표 류대수(전릉부원군종회장) 씨와 류재희(주손)‧류준희(후손, 소수서원도감)‧류창수(영주, 향토사학자)에 의해 유물의 고향인 순흥으로 돌아와 소수박물관에 기탁됐다.

어제초경후재경전문답(소수박물관 소장)
어제초경후재경전문답(소수박물관 소장)

1. 어제초경후재경전문답 내용

어제초경후재경전문답은 해서체로 필사된 1권 1책의 선장(線裝) 고본(稿本)이고,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책의 크기는 세로 30.7㎝ 가로 19.1㎝이며, 변란(邊欄)은 오사란(烏絲欄)에 사주쌍변(四周雙邊)이고 계선(界線)이 있다.

1770년(영조46) 6월 2일(丙子日)에 왕이 친히 서연(書筵)에 나아가 오정원(吳鼎源)·유의(柳誼)·정상인(鄭象仁)·유선양(柳善養)·유익지 등과 독서하고, 주고받은 문답 내용과 그간의 정치적 술회를 기록했다.

첩(帖)의 말미에 류익지의 필체로 보이는「연설(筵說)」이라는 별지의 기록이 첩지(貼紙)되어 있는데, 이에는 류익지가 고상(故相) 류영경(柳永慶, 1550∼1608)의 6대손이며 전창위(全昌尉) 류정량(柳廷亮, 1596∼1663)의 방손임을 확인한 영조가 유익지를 통해 전주류씨 선대와의 인맥 관계를 문답하고 술회한 기록으로 중요한 자료이다.

이 책은 영조와 관련된 정치적 내용이 많이 수록돼 있어 당시의 정치 및 인물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원문 1면, 아! 추모가
원문 1면, 아! 추모가

2. 「어제초경후재경전문답」 국역

아! 추모(追慕)가 더욱 간절하기에 예방(禮房)을 술회(述懷)코자 하였으나 날이 장차 오시(午時)가 되기 때문에 중지했다. 오늘에 인해 기의(起義)하고 읽고 문답을 듣고 효유하려고 하니 생각을 일으키는 게 많으며 그 가운데서도 또한 중요한바가 있기에 먼저 기회(起懷)를 논하고 다음으로 기의의 뜻을 들려줌이 옳겠는가. 아! 본 5월로부터 윤 5월로 이르니 마음이 거의 차례로 녹는구나. 아! 전월 초4일

원문 2, 3면, 일추모(日追慕)
원문 2, 3면, 일추모(日追慕)

3. 일추모[日追慕] 국역

영릉(寧陵)은 오호(嗚呼)로 초 9일에 추모하고, 장릉(長陵)은 오호로 초 10일에 추모하고, 헌릉(獻陵)은 오호로 24일에 추모하고, 건원릉(健元陵)은 비록 모두 지영(祗迎)하였으니 어찌 몸소나가 예를 폄과 같았고, 또 특별히 장락(藏樂)을 명(命)하고 말하기를 비록 이달에는 중지하나 윤월(閏月)이라고 하여 또한 5월이 아니겠는가.

그 명하려 한 것을 이에 중지시켰으니 그 괴로움은 군신이 서로가 민묵(泯默)함을 가졌고, 무릇 의장(儀仗)을 갖추워 진헌자(進獻者)에게 고취(鼓吹)가 베풀어지지 않았으니 비록 그대의 사세가 공교로운데 연유했으나 그러나 뜻은 깊었다고 하겠으나 하물며 전일이 어느 달인가.

임오(壬午)의 예문(禮文)에 의하면 본월에 망배(望拜)해야 하며 금년은 풍천(風泉)을 통하고 추모가 만배(萬倍)가 되며 윤월의 행례로 오호추모(嗚呼追慕)가 이와 같으나 그달의 복락(復樂)이 이 마음에 어찌

원문 4, 5면, 차약차기(此若此其)
원문 4, 5면, 차약차기(此若此其)

4. 차약차기(此若此其) 국역

약차약차(若此若此)한가. 그달은 이미 지났으니 오호라. 8월에 가까워서 이 믿음이 조금 펴이게 되었다. 또 이에 각(閣)을 세우고 밤에 주도(周道)에 대를 밟음인가. 이제 제신(諸臣)에게 어필(御筆)을 사(賜)하시게 된 뜻도 또한 있음이다. 아! 세월이 오래도록 잠들겠나 이들의 의리(義理)가 얼마나 불거졌는가.

이를 좃차 이 뒤로 요행히 민쾌(泯快)치 않고 이 一字는 마음에서 일찍이 경계하던 것이며 이에 이 一字를 써서 기쁘게 미침(微忱)을 편다. 전월에 이르러서야 도(道)를 밟아 미성(微誠)이 조금은 풀어진다.

아아! 이 마음이 비록 풀렸다고 하나 아아! 이달이 또한 어떤 달인가 경자오삭(庚子五朔)이다. 예문관에서 만약에 이달의 초료(初料)를 장(藏)한다고 하면 낙(樂)을 어찌 이달에 회복하겠는가.

그것이 비록 뜻을 돌려주지 않아서 또한 전월과 같다고 하면 비록 심정(心靜)을 펴고자 함을 호유하지 않고 오호(嗚呼, 奏樂名)를 생각하면 이달인들 미록 바람이 교릉(喬陵)에서의 생각이 무성함은 그것이 오히려 조금은 이 정성을 펴겠으나 이와 같음이 만약에 다시 광복(光復)의 명(命)을 하면 이 어찌 공성(孔聖)의 자하(子夏)와 자공(子貢)을 아름답다는 뜻이겠는가.

원문 6, 7면, 지의호고(之意乎故)
원문 6, 7면, 지의호고(之意乎故)

5. 지의호고(之意乎故) 국역

경자(庚子) 여름에 날짜를 계산하여 장차 명(命)이 있을 것이다. 비록 그러나 하나는 어찌 마음이 혼미하다가 오늘 크게 깨달았다. 전일에 친히 향축(香祝)을 전하고, 다시 그 당(堂)에 들려 그 밤을 지나면 창덕(昌德)에 나가겠는가.

이것은 또한 논(論)함이다. 문답이 어찌 미치겠는가. 하물며 올여름 석달은 비록 효유하나 늦은 봄 효야효야(孝耶孝耶)이다. 늦은 봄 8일은 그에 이미 먼저 나갔고, 이달은 어찌 당일에 나가는가. 이것이 내가 크게 깨달은 것이니라.

회(懷)는 모두 기의(起義)를 논함이니 장차 논하는 하나는 문답 중 윤5이다. 황조(皇朝)의 3백7십에 2년이 더 있는 안에 써 불초(不肖)한 내가 7십 7세의 사이에 이 윤5를 만난 것이 열세번이며 초윤은 이가 갑성(甲成)이니 바로 세상에 나가기 전 4월이다. 임오(壬午)로부터 지금까지 8년이니 그 어찌 근팔(近八)을 다시 만나니 생각이 일기를 여기에 미치며…

원문 8, 9면, 일칙무본(一則務本)
원문 8, 9면, 일칙무본(一則務本)

6. 일칙무본(一則務本) 국역

내가 만억(萬億)을 회(懷)하는 하나는 무본(務本) 2자(二字)이다. 실사구시(實事求是) 4자는

내가 고초선(故抄選) 양득중(梁得中)에게서 들었으며, 그의 벗인 임석헌(林錫憲) 시학시(視學時)에서 보았다고 함을 아직도 잊지 못하며 관이 비옥(緋玉)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모두가 없구나 그의 질(姪)인 정원(鼎遠)이가 입시(入侍)하여 이것을 읽으니 이 사람에게는 지난번에 특별히 수여했고, 이번에 다시 수여하니 진실로 그의 숙(叔)을 생각하여 그러한 것이다.

그 2자에서 고인(古人)을 좇아 생각하는 그해에 구제(舊第)에 임하여 생각이 일어나 송(誦)하였으니. 옛 해에 그 제(題)를 어제(御製)하기를 제택(第宅)을 사서 지급하라는 말이 있었으니 바로 인호도위(寅乎都尉)의 구제(舊第)이다. 이제 그의 집사승지(執事承旨)는 바로 옛 해의 은대(銀臺) 류태명(柳泰明)의 손이며 그의 종조(從祖) 복명(復明)은 나를 섬겨 관(官)이 정경(正卿)에 이르렀다.

원문 10, 11면 사자관지(事子官至)
원문 10, 11면 사자관지(事子官至)

7. 「연설(筵說)」 별지 국역

저녁 모두 퇴출한 뒤에 상(上)이 승지(承旨)를 인하여 머물라 하여 어제(御製)를 쓰라 명(命)하고 입시한 제신(諸臣), 세벌(世閥)의 어제중(御製中) 입(入)한 이를 방거(枋擧)하기를 거의 마쳤다.

上이 말하기를 저 주서(注書)는 호서인(湖西人)인가 하니, 승지(承旨)가 대답하기를 호서인 김중섭(金重燮)은 가주서(假注書)이며, 여러번 입시(入侍) 했다가 지금은 이미 처차(遞差)되었고, 실주서(實注書)는 류익지(柳翼之)입니다. 하니 上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 또한 세신(世臣)이구나.

원문 15, 16면, 끝부분 연설(筵說)
원문 15, 16면, 끝부분 연설(筵說)

전창위(全昌尉)에게는 어떻게 되며, 고상(故相)과는 어떠한고 하니 승지(承旨)가 대답하기를 김창위(金昌尉)의 방손(傍孫)이며 고상(故相)의 6대손(六大孫)입니다.

하니 上이 말하기를 승지(承旨)는 또 쓰라 하시어 쓰기를 천신선조(賤臣先祖)에 이르니 上께서 말하기를 고상(故相) 모(某)의 성명은 들지 않았느냐 하시니 승지가 다만 선조의 명자(名字)만 쓰고 성은 쓰지 않고서 주독(奏讀)을 하니 상께서 말하기를 주서의 성명을 이미 쓰지 않았기 때문에 고상(故相)의 성자(姓字)는 쓰지 않고 빠진 것 같으니 상세하게 성명을 구비하고 겸(兼)하여 쓰라 하시고 읽기가 끝나니 상이 말하기를 오늘의 제신(諸臣)에게 각기 이 뜻을 모두가 알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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