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의(義)를 지킨 의병 홍사구
​​​​​​​홍사구(洪思九), 1872~1896

경상도 순흥도호부 수민단면 원구리(현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 원두들)에서 홍성유(洪聖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홍훈(洪薰)의 종손이다. 10살 때, 경기도 지평현 상석리(현 양평시 양동면)로 이사한다. 여기서 안승우를 만나 그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는데, 경사에 밝고 또 글을 잘 썼다고 한다.

하루는 다른 이의 잡에 홍익한의 『화포집(花浦集)』이 있는 것을 보고, “내가 비록 방계 자손이지만, 우리집에 이 분의 책이 없는 것이 대단히 부끄럽다.”하며 날마다 『화포집』보고 돌아와 외워 썼는데 의병에 참여하는 바람에 끝마치지 못하였다. 그것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한 자도 잘못 쓰인 것이 없다고 한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을 계기로 스승 안승우가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종사로 가담한다. 1896년 5월 25일 충청도 제천군 현우면 화산리 남산전투에서 장기렴(張基濂)이 이끄는 관군에게 패하면서 성이 함락되고 장졸이 모두 흩어졌으나, 홀로 스승이자 중군장인 안승우의 곁을 지키다가 전사한다.

홍사구가 전사하자 부인 성씨(成氏)는 성심을 다해 시어머니를 모시고 양자를 들여 후사를 잇게 하여 주위를 감동하게 했다고 한다.

홍익한 충렬각
홍익한 충렬각

의병(義兵)

의병은 나라가 위급할 때 백성들이 스스로 조직한 군대였다. 박은식(朴殷植)은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항중·항몽·항일의 투쟁 속에서 의병들은 어느 침략자로부터도 정복당하거나 굴복하여 동화되는 일이 없었다고 했다. 의병의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활동을 보여준 것은 임진·병자 양란의 의병과 한말의 의병이었다.

한말의 의병은 전기의병(1894~1896), 중기의병(1904~1907), 후기의병(1907~1909)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전기의병은 갑오의병과 을미의병을 포괄하지만, 본격적인 것은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이 선포된 1895년이었다. 중기의병은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준식민지 상태가 되어가는 나라를 걱정하며 일어난 의병이었고, 후기의병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과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가 기폭제가 되어, 전면적인 항일전쟁의 모습으로 일어났다.

영주의 의병은 1896년 2월 창의하였던 김우창(金禹昌)의 영천의진(榮川義陣)과 1896년 3월 창의했던 홍종선(洪鍾善)의 순흥의진(順興義陣)과 김교명(金敎明)의 풍기의진(豊基義陣)이 있었는데, 신태운(申泰雲)·김휘정(金輝珽)·홍사구(洪思九)·장복규(張復圭)·이종보(李鍾輔)·이현구(李賢求)·신봉균(申鳳均) 등이 영주 지역에서 창의하거나 활동하였던 의병들이었다. 이 중 홍사구는 젊은 나이에 순절(殉節)한 의병이었다.

홍사구는 초기의 의병전쟁에서 가장 위세를 떨쳤던 충북 의진의 일원이었다. 이 의진은 유인석을 총대장으로 이춘영·안승우·이강년 등의 활약했다.

홍사구 기념비
홍사구 기념비

유적지

•의사(義士)남양홍공사구기념비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 92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고, 1984년 의사남양홍공홍사구기념비가 건립되었다. 기념비 옆에는 홍익한의 충렬각이 있다. 홍익한은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다 심양에 잡혀가 처형당한 삼학사(三學士) 중 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 마을에 도천고택(陶川古宅,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521호)이 있는데, 홍사구가 어릴적 살았던 집으로 추정한다.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세기초(1820년경)에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다.

순국선열 홍사구 묘
순국선열 홍사구 묘

•순국선열홍사구의 묘

충북 제천시 고암동 58-6

제천시 금수면 위림리 갈마골에 안장되었다가 제천 의림지 맞은편 산록으로 옮긴다. 그리고 1984년 11월 제천시 고암동에 있는 의병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묘비명은 ‘순국선열홍사구의 묘’이다.
 

제천남산투지
제천남산투지

[미니픽션] 올곧은 삶을 이은 젊은 부부

“애미야!”
홍사구의 어머니는 며느리의 목에 맨 줄을 풀어주며 소리쳤다.

“장부가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은 충이라 할 수 있겠으나, 어머니를 버리고 죽었으니 어찌 효라 할 수 있겠습니까?”

상을 치루며 곡도 하지 않던 며느리였다. 그래서 시어머니는 며느리 때문에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였다.

상을 마치고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사구의 어머니는 뒤척거리다가 문을 나섰다. 그동안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던 식솔들을 살펴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며느리의 방에서 들리는 인기척이 수상하여 방문을 열었는데 며느리가 목을 매고 있었던 것이다.

“네가 죽으면 나는 어찌하란 말이냐?”

“제가 못나 이처럼 망령된 짓을 했습니다. 어머님께서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면 다시는 이런 짓을 않겠습니다.”

이때 홍사구의 아내 성씨는 18살이었다.

며칠 전 홍사구의 스승인 안승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며느리는 제천으로 가야 한다고 나섰다. 홍사구의 시신을 빨리 수습해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안중군장이 죽었다는 데 어찌 네 남편까지 죽었다고 하냐?“

고 하자, 안승우는 중군장이어서서 여러 사람이 그 죽음을 바로 알 수 있으나, 그의 종사관쯤은 졸병과 같은데 사상자가 사태나는 판에 어떻게 쉽게 알 수 있겠느냐며, 남편의 성품으로 볼 때, 스승이 죽었는데,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고자 그 자리를 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날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었다. 왜병들과 함께 장기렴이 이끄는 관군들은 이때를 놓칠세라 집중 공격을 해왔다. 빗속에 화승총이 둔해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질퍽거리는 땅에 탄환을 운반하던 의병들이 탄환 보급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탄약을 찾아오라고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는 왜병들에게까지 들렸다. 왜병들은 공격의 고삐를 더 당겼다. 서쪽 성문을 지키는 우리 진용(陣容)이 무너지고 의병들은 산 위로 밀렸다. 무방비 상태의 남산으로 적탄은 비 오듯 쏟아졌다

의병들은 어떻게 대항할 수 없었다. 중군장 안승우는 퇴각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전투에 미숙한 의병들은 이 위급한 상황을 수습할 수 없었다. 중군장 안승우도 오른쪽 다리에 적탄을 맞아 넘어졌다. 홍사구와 몇이 남아서 그를 호위했다. 홍사구는 상처를 감싸며 울부짖듯 소리쳤다.

”야! 이놈들 너히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냐?
안승우는 홍사구의 손길을 만류하며, 빨리 자리를 뜨라고 했다.

“사구야! 너는 나와 사정이 다르지 않느냐. 속히 떠나 후일을 도모해라! 아니 홍종사관 명령이다 퇴각해라!”

자신은 의병의 장수로서 마땅히 조국을 위해 죽기를 각오했지만, 모셔야 할 어머니와 이제 신혼의 아내가 있는 홍사구는 이 자리에 두고 싶지 않아서였다.

“선생님! 저의 결심은 선생님과 생사를 같이하는 것인데, 어찌 저 혼자 도망하라고 하십니까. 장군이 위급한 상황에 있는데, 종사만 남아서 무슨 면목으로 살아겠습니까?”

홍사구는 단호하게 버티며 한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적들은 안승우 주변을 에워쌌다. 홍사구는 검을 왼손에 몰래 쥐고 몸을 돌려 적군 한 면을 베었다. 이를 본 다른 적병이 홍사구의 한쪽 팔을 베었다. 그런데도 홍사구는 조금도 놀라움이 없이 더 큰 소리로 적병을 더욱 꾸짖었다.

“야, 이놈들아! 너희는 조상도 가족도 없느냐?
적은 다른 한쪽 팔마저 베었지만 홍사구는 더욱 큰 소리로 꾸짖었다. 그러자 적병은 홍사구의 이마에 총을 쐈다. 이때 홍사구는 19세의 소년이었다.

홍사구의 장례를 치룰 때, 도사(都事) 이도철이 자신의 선산을 빌려주었고, 제천의 사림(士林)들이 통문(通文)을 지어 보내자, 충북은 물론 겅원도 양양과 간성에 이르기까지 부조금이 1,700냥이었다.

그 후, 시어머니도 죽고 집안의 살림은 성씨 부인의 몫이었다. 하루는 시동생에게 양자를 두고 싶다는 얘기를 하며, 친척들을 살펴 달라고 했다. 시동생은 평택 화포 홍익한 종가의 승지댁에 세 아들이 있는데 막내가 뛰어나다고 일러 준다. 성씨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시동생과 함께 평택으로 바로 찾아 갔다.

하지만 그곳에 며칠 머물면서도 양자에 대한 말은 전혀 하지 않고, 자신이 살아온 내력을 말하였는데, 그 말이 너무 진솔하여 주인은 더 곡진한 예로 대하였다고 한다. 그제서야 성씨는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다.

“제가 여기에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양자를 구하러 왔습니다.”

주인은 바로 거절하였다. 이에 성씨는 마당에 거적을 깔고 밥도 먹지 않은 채 밤낮으로 그 자리를 지켰다. 하루는 갑자기 비가 내려 낙숫물이 폭포처럼 쏟아지는데도 그 비를 맞고만 있었다. 승지 부인은 승지에게 그 상황을 전하였다. 승지는 양자를 허락하며 성씨를 방안으로 안내했다.

“그렇다면 몇 째를 양자로 주시겠습니까?”
“영감과 내가 모두 허락하였으니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
“그럼, 큰아들과 둘째는 이미 관례를 마쳤으니 막내를 양자로 주십시오.”

성씨가 음식을 먹지 않은 지, 이레나 되었지만 정신이나 행동거지는 평소와 같았다. 이후로 양자로 들일 자식이 날마다 성씨를 가까이 모셨는데, 그 정이 직접 낳은 자식과 같아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하루는 승지가 성씨에게, 급한 일이 있으니 5천냥을 빌러달라고 했다. ‘가진 것은 조금 밖에 없는데, 지금 이것을 주면 자식을 기를 수 없고, 주지 않으면 자식을 보내지 않을 것인데…’ 하며 고민을 하다가 이런 편지를 보냈다.

“이번에 말씀하신 것은 돈을 빌리려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굶을까봐 염려하시는 것이지요? 제 비록 넉넉지 않으나 자식을 굶기기야 하겠습니까? 승지께서는 적정하기 마십시오.”

그리고 승지 내외의 의복을 한 벌씩 마련하여 보냈다. 하지만 승지는 양자를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말을 번복한 승지집의 잘못을 따지려고 재판을 하려고 하여도 증거를 삼을 것이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아들이 편지 하나를 가져다 주었다. 생모 김씨가 친정에 가서 성씨의 일을 말하였는데, 친정아버지가 그 사연을 듣고 그 의열에 감동하여 사위에게 양자를 주라고 권하는 편지였다.

성씨는 이 편지를 갖고 재판을 하려고 마음을 먹는다. 승지는 그 소식을 들고, ‘재판을 한다해도 아들을 뺏길 판이나 그냥 주는 것만 못하다.’며 양자를 보냈다.

“할머니, 무얼 그리 생각하세요?”
어린 손자가 방문을 삐죽 열고 묻는다.

“오냐! 니 생각 했다.” 성씨의 눈 앞으로 문득 병자호란이 끈난 뒤, 홍익한의 대를 잇기 위해 원두들을 찾았던 평택의 종부가 지나갔다. 그리고 홍익한의 충절을 사모했던 신랑 홍사구의 모습이 손자의 얼굴에 겹쳐졌다.

글 김덕우 작가

참고자료 송상도 「기려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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