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 어제를 내리고 신하들이 화답한 ‘어제갱진첩’

본 갱진첩은 당시 승정원 주서였던 류익지가 받았던 것으로
경연에서 어제(御製)에 화답(갱진)한 신하들의 시 엮은 서첩

어제갱진첩 표지
어제갱진첩 표지

류익지는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류영경의 7세손이다

전주류씨 순흥 돌다리(석교리)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던 고문서 3권이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그곳에서 지정을 취소하고 유물의 고향인 순흥 돌다리로 돌아와 소수박물관에 기탁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지역민들은 돌다리 전주류씨 문중 사람들의 애향심에 깊은 감명과 감사를 보내고 있다.

고문서 세 권은 어제갱진첩(御製賡進帖), 어제친정갱진첩(御製親政賡進帖), 어제초갱후재갱전문답(御製初庚後再庚前問答) 등 3권이다.

어제 : 조손동강일당중(祖孫仝講一堂中)
어제 : 조손동강일당중(祖孫仝講一堂中)

이 갱진첩은 조선 영조 때 돌다리 출신 류익지(柳翼之, 1733~1786)가 승정원 주서로 재직 당시 어제(御製)와 참여자들이 갱진(시를 지어 올림)한 시를 첩(帖)으로 제작하여 1건씩 분사(分賜)한 것 중의 하나이다.

이 갱진첩을 소장하고 있던 류대수(柳大秀, 1926〜2014, 전 전릉부원군종회장)는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류영경의 13세손으로, 류재희(돌다리, 주손), 류준희(현 소수서원 도감), 류창수(영주 하망동, 사학자) 등과 뜻을 모아 충북박물관에서 도로 찾아와서 소수박물관에 기탁했다.

본 지면에는 전주류씨 돌다리 세거 내력을 알아보고, 3권의 고문서 내용을 번역본으로 실어 독자들이 250년 전 조선 왕실의 경연(經筵)을 체험해 볼 수 있도록 했다.

채제공, 윤동섬, 홍랑한, 이수봉의 갱진
채제공, 윤동섬, 홍랑한, 이수봉의 갱진

어제갱진첩 개요(槪要)

어제갱진첩(御製賡進帖)에서 어제(御製)란 ‘임금이 몸소 글을 짓는다’는 뜻이고, 갱진(賡進)은 임금이 지은 글에 화답해 글을 지어 바친다는 뜻으로 그 근원은 ≪서경(書經)≫ 우서(虞書) 익직(益稷)의 갱재가(賡載歌)이다. 이것은 순(舜) 임금과 신하인 고요(皐陶)가 창화(唱和)한 시(詩)인데, 순 임금이 시가(詩歌)를 지어 고요에게 권면(勸勉)하자 고요는 순임금의 시가에 이어 시가를 짓고 순임금을 권면했다.

이 갱진첩은 당시 승정원 주서였던 순흥 출신 류익지가 받았던 것으로, 2005년 1월 7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62호로 지정돼, 충주시 문화동 소재 전주류씨(全州柳氏) 낙봉공파(駱峰公派) 종중에 소장돼 있다가 2012년 종중 대표 류대수와 종중 류재희‧류준희‧류창수에 의해 고향 소수박물관에 기탁된 귀중한 문서다.

박필규, 김광묵, 서유랑, 김익의 갱진
박필규, 김광묵, 서유랑, 김익의 갱진

갱진첩 안을 들려다보면 조선 후기에 영조(재위 1725∼1776, 조선 제21대 왕)가 친히 왕세손(정조)과 함께 강학한 후 시구를 내리자, 강학에 참여한 신하들이 어제에 화답해 지어 올린 것(賡進)으로, 당시의 어제와 참여자들의 시(詩)를 첩(帖)으로 제작해 참여자들에게 1건씩 분사(分賜)한 것 중의 하나이다. 이 갱진첩은 필사된 12폭의 시를 1첩(帖)의 첩장본(帖裝本)으로 제작했으며, 크기는 가로 23.5㎝, 세로 33.5㎝이다.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왕세손의 陪歡侍講(배환시강) 갱진
왕세손의 陪歡侍講(배환시강) 갱진

순흥 돌다리 전주류씨

순흥면 석교2리 속칭 ‘돌다리’는 고려 말에는 안향 선생의 고향마을이었고, 조선 중기 무렵부터는 전주류씨 집성촌이 됐다.

전주류씨가 언제부터 이곳에서 살았는지를 알아보려면 조선 선조(재위 1567∼1608)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순흥의 전주류씨는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류영경(柳永慶,1550-1608)의 2자(둘째아들) 류흔(柳欣, 1573∼1607, 증 호조좌랑)의 후손이다.

채제공, 윤동섬, 홍랑한 갱진
채제공, 윤동섬, 홍랑한 갱진

전주류씨가 순흥 땅에 정착하게 된 것은 춘호(春湖) 류영경이 풍기 백골(희여골) 창원황씨에 장가든 것과 관련이 있다. 류영경은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아들 오형제와 가솔을 거느리고 처갓집 부근인 소백산 첩첩산중 태장리로 내려와 몸을 숨기고 우거(寓居)하게 된다. 이무렵 둘째 아들 류흔이 34세로 일찍 세상을 떠나니 안타까운 마음에 그를 묻은 산(순흥 태장리와 배점리 사이 산)을 이자산(二子山)이라 하였고, 정을 잊는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망정골(忘情谷)이라 불렀다.

류영경은 난이 평정(平定)되자 이자(류흔)의 며느리와 손자(정준)에게 “이곳에서 애비를 잘 모시라”는 당부를 남기고 한양으로 떠났다. 그리고 몇 해 후 태장 망정골(또는 恨想谷)에 살던 이자의 부인(聞韶金氏)은 1610년경 손자 정준(廷浚)을 데리고 순흥 돌다리로 이거해 지금까지 400여 년 간 세거해 오고 있다.

류익지의 갱진(경악서연)
류익지의 갱진(경악서연)

류흔의 후손 류익지

어제갱진첩(御製親政賡進帖)을 받은 류익지는 류영경의 7세손이다.

류익지는 순흥 돌다리에서 태어나 1762년 식년문과 갑과 제2인으로 급제해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사헌부 지평(持平), 장령(掌令) 등을 지냈다.

그의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으나 그의 문과 교지, 임오식년문과 시문(試文), 영조 임금의 시(詩)를 화답한 갱진첩(賡進帖), 17장의 벼슬 교지 등이 그의 후손(돌다리)들이 보존하고 있다.

류익지의 갱진(성현심법)
류익지의 갱진(성현심법)

어제갱진첩 내용

어제갱진첩은 조선 후기에 영조가 친히 왕세손(정조)과 함께 강학한 후 시구를 내리자, 강학에 참여한 신하들이 어제에 화답해 지어 올린 것(賡進)이다.

1770년(영조46) 2월 23일(경오일)에 영조가 왕세손(정조)과 함께 『중용(中庸)』을 강학한 후 “조손동강일당중(祖孫仝講一堂中, 조손이 한 전당에서 함께 강학을 하도다), 작세금년연강동(昨歲今年宴講同, 작년과 금년의 연회와 강학이 같은 곳에서 열리도다)”라는 어제 시구를 내리자, 왕세손을 비롯한 승지·사관·시위신(侍衛臣)들이 시를 지어 올렸다.

전구(前句)는 영조와 세손이 광명전(光明殿)에서 함께 강학한 경사(慶事)를 표현한 것이며, 후구(後句)는 전년(1769)과 금년(1770)의 강학이 모두 광명전에서 열린 경사임을 표현한 것이다.

영조의 어제에 갱진한 인사로는 왕세손을 비롯하여 채제공(蔡濟恭)·윤동섬(尹東暹)·홍양한(洪良漢)·이수봉(李壽鳳)·박필규(朴弼逵)·김광묵(金光黙)·서유량(徐有良)·김익(金熤)·이병정(李秉鼎)·신오청(申五淸)·신상권(申尙權)·김만구(金晩耈)·최옥(崔鈺)·김하재(金夏材)·오정원(吳鼎源) 그리고 류익지 등 17인이다. 이 갱진첩은 내용뿐만 아니라, 영조의 친필이 있는 귀중한 자료이며, 당시의 정치 및 인물 연구에 활용할 수 있는 종요한 자료이다.

영조 어필, 작세금년동강동(昨歲今年宴講同)
영조 어필, 작세금년동강동(昨歲今年宴講同)

‘어제에 화답한 신하의 시’

임금이 ‘조손동강일당중(祖孫仝講一堂中, 작세금년연강동(昨歲今年宴講同)’라는 어제 시구를 내리자, 왕세손을 비롯한 승지·사관·시위신(侍衛臣)들이 시를 지어 올린다.

王世孫 賡進 聖誨欣承一部中(왕세손 갱진 성회흔승일부중)
왕세손이 화답하길 ‘성인의 가르침을 기쁘게 받드는 일부 속에서’
講誦鳶魚道體中(강송연어도체중) ‘연비어약(鳶飛魚躍)을 강송하고 도를 체행하며’,
병조판서 신 채제공 화답하다.

傳心大法得堯中(전심대법득요중) ‘마음을 전하는 대법으로 요임금을 알아’,
행승정원승지 신 윤동섬 갱진

皇極神功在致中(황극신공재치중) ‘황극의 신령한 공덕을 이룸이 있으며’
승정원좌승지 신 홍랑한 갱진

中和位育一書中(중화위육일서중) ‘중화위육하는 中書(중용) 속에는’
승정원좌승지 신 이수봉 갱진

道在天人性命中(도재천인성명중) ‘道는 하늘과 사람의 性命 속에 있으며’
승정원우승지 신 박필규 갱진

王世孫 賡進 陪歡侍講後先同(왕세손 갱진 배환시강후선동)
왕세손이 화답하길 ‘(임금을) 모시고 기쁘게 시강하니 선후가 같고’

濟濟賡歌舜殿同(제제갱가순전동) ‘즐비하게 이어서 노래하니(화답) 요임금의 궁전과 같으며’
병조판서 신 채제공 갱진

壽酌餘歡講席同(수작여환강석동) ‘장수를 비는 술잔으로 넉넉히 기뻐함은 강석과 같고’
행승정원도승지 신 윤동섬 갱진

鳩杖春臨鶴駕同(구장춘림학가동) ‘구장(鳩杖)이 봄에 임한 것은 학가(태자)와 같으며’.......
승정원좌승지 신 홍랑한 갱진

聖賢心法不偏中(성현심법불편중) 承政院注書 臣 柳翼之 賡進
‘성현의 심법은 치우치지 않는다.’

經幄書筵講勉同(경악서연강면동) ‘경연과 서연(書筵, 세자에게 글을 강론하던 곳)에서 강의에 힘을 쓴 것은 같다’. 승정원 주서 류익지 화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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