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만인소를 이끈 김석규 1826(순조26년)~1883(고종20년)

①내성천, ②이산서원, ③이산보건지소, ④두암고텍, ⑤천운정
①내성천, ②이산서원, ③이산보건지소, ④두암고텍, ⑤천운정

치암(耻庵) 김석규(金碩奎)

이산면 우금(友琴) 두암고택에서 태어났다.

1880년 11월 1일 영주향교에 만인소 통문을 발송하고 11월 26일 안동에서 800명이 모여 영남만인소 회합을 가지면서, 이만손이 소수(疏首)로, 김석규를 부소수로 추대하고, 다음 해 2월 29일 한양에서 400여명의 유생들이 함께 상소한다. 그 후 3월 4일 다시 상소하고(소수 김조영), 3월 6일 3차 소수로 추대되어 상소를 올린다. 그리고 3월 16일 형조에 연행되어 3월 17일 평안도 덕천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숨을 거둔다.

김홍락은 행장에서 “공의 경학·행실·재능이 당세에 쓰였다면 크게 업적이 있었겠지만, 쓸쓸히 유배지에서 명을 다하니 애석한 일이다. 어지러운 세상에 몸을 돌보지 않고 정의를 후세에 밝힘은 공이 오래도록 쌓은 학문이나 지식이었으니….”라고 했다.

영남만인소를 실질적으로 이끈 대표적인 학자이자 선비였던 김석규. 저서로 『서천록(西遷錄)』, 『도설잡기(圖說雜記)』, 『호전찬요(胡傳簒要)』, 『치암집(耻庵集)』이 있다.

①영주향교, ②안양원, ③영주여고, ④재건주택
①영주향교, ②안양원, ③영주여고, ④재건주택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

만인소는 유생(儒生)들이 연명해 올린 집단적인 상소(上所)이다. 조선시대에 만인소는 총 7차례가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1792년(정조 16)에 1만 368인이 참여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신원(伸寃)을 위한 상소이다.

1881년 영남만인소는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척사(斥邪)운동의 올린 연명소이다. 1880년 수신사 김홍집이 가져온 황준헌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이 계기가 되었다. 『조선책략』에는 남하 정책을 추진하던 러시아를 막기 위해, 조선은 청, 일본, 미국과 연합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고종이 이러한 『조선책략』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추진하자, 전국의 유림이 조직적으로 이를 반대하는 움직임을 시작하였다.

영주에서는 1880년 10월 29일 문수면 대양리에서 정집교(줄포 ), 박붕수(성곡), 김정규(우금)이 뜻을 모아 11월 1일 영주향교에서 통문을 발송하기로 한다. 구미 여러 나라와 일본의 야심을 논파하고 민족 정의로 부당성을 제시한 영남만인소는 황준헌의 외교 정책 수용을 막는다.

유적지
• 영주향교 / 영주시 명륜길 76

지역의 변화를 지켜오면서 문화를 이끌어 온 대표적인 공간이다. 1368년 군수 하륜이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정도전의 아버지인 정운경(1305년〜1366년)이 영주(榮州)와 복주(福州: 안동)의 향교에서 수학했다는 내용으로 보아 창건 시기가 훨씬 이전으로 추정된다. 그 후 고려말과 조선초의 격변기에 새 인재를 키워왔음은 물론이고, 조선이 끝날 무렵부터 큰 역할을 한다. 1880년 영남만인소의 출발지였고, 1911년 영주초등학교, 1943년 영주농업중학교, 1952년 영주여자중학교가 시작한 곳도 이곳이었다.

• 두암고택(斗巖古宅,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1호) / 이산면 이산로621번길 118-3

김석규가 태어나서 자란 이 고택은 두암 김우익(金友益, 1571〜1639)이 20세에 삼판서고택에서 분가하면서 지었다고 한다. 김우익은 삼판서고택의 세 번째 주인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의 5세손이다.

정침 24칸,·함집당 6칸,·사당 6칸, 대문간채는 4칸으로 구성되어있다.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석포교에서 내성천을 건너 이산서원을 지나 얕은 구릉을 넘으면 우금, 머름, 신천으로 이어진다. 예전부터 이곳엔 행실 있고 글 잘하는 선비가 많아 ‘우금·신내는 반서울’이란 말이 있었다.
 

[미니픽션] 죽을 자리를 스스로 찾아간 선비

“삼가 생각하건데 신하(臣下)등이 늘 소원하며 얻은 것은 오륜(五倫)과 삼강(三剛)으로 살아온 바른길이었고, 높이 믿은 것은 하늘과 임금님과 아버지였습니다….”

1981년 3월 7일 광화문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텅빈 육조거리엔 그들 뿐이었다.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하는 바람이 옷깃을 다시 여미게하였지만, 그들의 의지는 꺾을 수 없었다.

왕은 “알았으니, 물러가라. 다시 상소하면 징벌하리라”하였지만, 왕의 주변에 있는 자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김석규가 이 일에 참여한 것은 1880년 11월 1일이었다. 영주향교 장의로 있던 그는 불과 사흘 전, 줄포의 정집교, 성곡의 박붕수, 우금의 김정규가 위태로운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뜻을 모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꺼이 동참하였고, 11월 1일 영주향교에서 만인소에 참여를 촉구하는 통문을 발송하였다.

그때 문득 안윤홍의 병풍그림을 떠올렸다. 첫 그림은 영주향교의 대성전이었고, 둘째는 금성단, 그리고 이산서원, 금선정, 희방사, 부석사, 구학정, 하한정, 반구정, 마지막은 소수서원이었다. 그 병풍을 보며, 열 폭의 그림 속엔 나라를 지켰던 영주 선조들의 얼이 다 숨어져 있다는 생각을 했다.

구학정은 더 가슴에 남았다. 임진왜란 때에 왜구들에게 짓밟힌 나라를 구하기 위해 경상도 안집사로 내려온 백암(柏巖) 김륵(金玏)이 그 그림 속에 계셨기 때문이었다. 파죽지세로 몰려온 왜구들에 대항하기 위해 지방 수령을 독려하고, 의병들을 지원한 백암 선조의 일이 두 손을 불끈 쥐게 만들었다.

며칠 뒤, 도산서원에서 보내온 같은 내용의 통문을 받게 된다. 공교롭게도 그곳의 발송일자도 11월 1일이었는데, 11월 26일 회합을 가진다는 내용이었다. 26일 도내 유생 800여명이 참석하여, 안동의 이만손을 소수로 김석규를 부소수로 추대한다. 그리고 1881년 2월 29일 400여명의 유생과 함께 상소를 한다.

이만손이 귀향한 후, 김석규는 봉화 바래미의 김조영을 2차 소수로 추대하여 3월 4일 다시 상소한다. 김조영은 바로 형조에 연행된다. 다음 날, 김석규는 다시 소초를 상의한다. 그리고 3월 6일 김석규를 새 소수로 추대하고, 3월 7일 다시 상소를 올린다. 3차 만인소이다. 제3차 소수로 추대됨 김석규는 척사소를 새로 작성하였는데, 여기서 김석규는 이동인(李東仁)이 김홍집과 일본에 가서 『조선책략』을 가져온 죄를 극렬하게 성토하였다.

이때 그가 쓴 척사소(斥邪疏)에는 조선책략에서 야소(耶蘇)와 천주(天主)의 분파가 나누어진 것이 주자와 육상산(陸象山)의 경우가 같다는 내용에 대하여 이는 우리나라가 천주교에 대하여 통렬히 변호하기 때문에 지금 둘로 나누어 우리를 기만하여 전영시키려는 계책이라고 하였다.

또 화방의질(花房義質)이 가져온 국서의 문구 중에 황(皇)과 짐(朕)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고, “우리나라가 일본에 통신사를 보낸 것이 오래 되었는데, 다만 서계(書契)를 관백(關白)과 오래할 뿐, 위황(僞皇 )이 스스로 통서(通書)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김조영은 16일 안변부로, 김석규는 17일 함경도 덕천으로 귀양을 간다. 김석규는 귀양길에 오르며 아들 정현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이제 죽을 자리를 얻었으니 여한이 없다.”

이 마음은 상경할 때 이미 품고 있었던 것 같다. 영남만인소 부소수가 되어, 서울 갈 채비를 할 때, 주변에서 모두 만류를 하였다.

“아버님, 저에게 맡겨 주세요. 제가 할께요.”

아들 정현이 울면서 막았다. 그리고 관직에 있던 친구도 편지를 보내어 가지 말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석규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이제 만일 주저앉으면 사론(士論)이 나를 무어라 하겠는가.”

아들과 친구의 만류는 대쪽같은 그의 강한 성품을 잘 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려서부터 그는 한 번 옳다고 단정한 것은 죽을 각오로 지켜 뜻을 바꾸지 않았다. 스스로도 강하고 과격한 자신의 성격을 알기에, 벽에다가 ‘화평(和平)’이라고 써서 걸어두고 온화함과 너그러움을 기르기 위해 힘쓸 정도였다.

예안에 사는 이만손은 벌써 출발했다고 한다. 충주에서 만나자는 기별이 왔다. 사당과 선영에 하직하고, 먼저 떠난 이만손을 쫓아 길을 나섰다. 아들 정현도 같이 따라나섰다. 내성천 둑에 서서 마을을 둘러 보았다.

‘할아버님이 터를 참 잘 잡으셨네….’

가족들은 아직도 솟을대문 앞에 모두 그대로 있었다. 손을 들어 들어가라고 손짓을 했다. 아침햇살을 받은 함집당이 더 또렷하게 보였다.

부모님의 뜻을 쫓아 몇 차례 과거에 응시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벼슬을 사고 팔았던 당시 사회는 과거에도 부정한 수단이 많았다고 한다. 김석규의 강직함은 여기서도 잘 드러난다.

“임금을 섬기려고 하면서 먼저 임금을 속여서야 쓰겠는가. 비록 출세를 포기할지언정 그런 짓은 안 한다.”

그리고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과 행실에 힘썼다고 한다. 항상 다른 사람보다 먼저 세금을 바쳤으며, 후진을 지도할 때에는 문장보다는 반드시 행실을 먼저 가르쳤다.

한번은 그의 제자들이 그를 위하여 계를 만들어 운영하려고 했었다.

“너희들은 나를 모리(謀利)에 빠지게 하려느냐.”

석규는 기미를 알아채고 그 일을 저지시켰다.

덕천은 생각 이상으로 낮선 곳이었다. 추위도 추위지만 외로움을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스스로 다짐을 했다. ‘비록 귀양살이이지만, 선비의 자세를 잃지 말자.’는 것이었다.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을 읽으며 세상일을 잊고 학문에 전념했다. 그리고 때로 그곳 명산을 찾아 거닐며 울적한 심사를 달래기도 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고을 군수는 그의 아들을 보냈다. 가르침을 받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소문은 주변에 퍼져나갔다. 이 예사롭지 않은 선비에게 이웃고을 수령들도 물품을 보내어 위로했다. 그는 덕천향교에서 『춘추호전(春秋胡傳)』을 빌려서 읽고, 오랑캐와 화해하여 환란을 빚은 사례들을 간추려 책을 집필하였다. 이 책으로 나라의 문호개방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깨우치려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2년 뒤, 1883년(고종 20) 여름, 이질을 만나 병석에 드러눕고 만다. 결국 그 병을 이겨내지 못했다. 6월 11일 아침 집에 알리는 글을 써 놓고 숨을 거두고 만다. 당시 나이 58세였다. 그렇게 영남유림의 큰 선비는 머나먼 함경도 땅에서 그렇게 유명을 달리 했다.

글 김덕우

참고자료 영주시사, 송지향 저/영주영풍향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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