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축지변 때 희생된 65家 원혼 달랜 ‘대평서당’ 사람들
‘대평서당기’ , 퇴계 후손 이야순이 1822년 감동해 적은 글
​​​​​​​‘대평서당 유래’ , 류대수가 후세에 전하기 위해 기록한 글

대평서당 역사를 지켜온 석교리 느티나무
대평서당 역사를 지켜온 석교리 느티나무

아! 대평서당

대평서당(大平書堂)은 순흥면 석교리(순흥초 아래쪽)에 있었던 서당이다. 대평서당은 정축지변 때 희생된 원혼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서운 서당이다. 이 서당이 언제 생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사료(史料)와 행적 그리고 구전 속에서 그 내력을 찾아보기로 한다.

먼저 광뢰(廣瀨) 이야순(李野淳, 1755〜1831, 퇴계의 9세손) 공이 1810년(순조10) 대평서당에 와서 보고 쓴 기문에 의하면, 정축지변(丁丑之變) 때 석교리 일대 65家가 참화를 당하여 구천(九泉)을 떠도는 원혼(冤魂)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이곳에 살던 안동권씨(安東權氏)와 전주류씨(全州柳氏) 가문이 주축이 되어 서당을 건립하고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대평서당 구지(舊地) 앞에서(2022.2.14) 권용학·박종섭·김호기·류준희 순흥유림
대평서당 구지(舊地) 앞에서(2022.2.14) 권용학·박종섭·김호기·류준희 순흥유림

또 부가 복설된 지 40여 년 후인 1720년(숙종46) 순흥 선비 이기륭(李基隆, 우계인)이 순흥부사 이명희(李命熙)와 의논해 금성단을 설치하고, 화를 당한 금성대군과 이보흠 부사 그리고 수많은 의인(義人)들을 위해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는 기록도 있다.

위의 두 기록으로 볼 때 서당의 설립 시기는 1682년(숙종8) 부(府)가 복설된 이후일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부(府)가 복설되기 전까지는 반역의 고을로 낙인찍혀 있었기 때문에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엄두도 못 냈을 것으로 짐작된다.

권용학 소장 '대평서당기' 두루마리로 보존
권용학 소장 '대평서당기' 두루마리로 보존

대평서당의 유래

순흥에 살면서 ‘서당마’는 알아도 ‘대평서당’은 모르는 어르신들도 더러 있다.

‘대평’하면 안정면 ‘대평’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본래 ‘대평’은 순흥도호부의 관아가 있던 읍내리 주변 지역으로 현 순흥면 읍내리‧석교리‧지동리 일대를 말한다. 이 지역은 예나 지금이나 곡창지대로 넓은 들이 있어 대평(大平)이란 지명이 잘 어울려 보인다.

당시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정축년 변란으로 희생된 65家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대평서당을 건립하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구전으로만 전해 오다가 근현대에 와서 안동권씨 문중 소장 ‘대평서당기’와 전주류씨 문중 소장 ‘대평서당의 유래’가 발견돼 그날의 이야기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류대수의 '대평서당 위치도'
류대수의 '대평서당 위치도'

대평서당의 설립

대평서당 유래를 기록한 ‘대평서당의 유래’는 전주류씨 순흥 문중 류대수(柳大秀, 한학자, 1926〜2014)공이 후세에 전하기 위해 생전에 기록해 둔 것을 족친 류창수(영주 하망동) 향토사연구가가 소장하고 있다가 ‘숨겨진 보물’이라며 기자에게 전해 준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565년 전(1457) 일이다. 금성대군이 순흥에 유배되어 소백산 넘어 영월에 유패(幽閉) 중인 단종과의 혐의(嫌疑)로 세조(世祖)가 철기(鐵騎)를 내려 부중(府中)이 표현할 수 없는 참화(慘禍)를 입었다. 전설에는 당시 참화로 죽은 사림의 유혈이 죽계천으로 10리나 흘러 그 피의 끝 지점의 지명을 지금도 ‘피끝’이라고 부른다.

그 후 이 고을에는 흉사(凶事)가 그치지 않으니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뜻있는 선비들이 합의해 ‘대평서당’을 설립했다. 이들은 당시 희생된 무주독혼(無主孤魂)을 위안하기 위해 위령제를 연년 해마다 행사(行祀)를 지내왔다고 전한다. 그 후로 민심이 안정되고 부중도 평온을 되찾았다고 했다.

‘대평서당’이 이와 같은 주역을 맡아 운영하게 됨에 따라 기금으로 농토를 마련하고 그 소작료로 운영한 것으로 믿어진다. 들은 바에 의하면 병(餠, 떡)은 시루째로 수저는 단 묶음으로 했다 하니 이는 (희생된) 신위 수(數)가 헤아릴 수 없다는 뜻으로 여겨진다.

류대수의 '대평서당 평면도'
류대수의 '대평서당 평면도'

대평서당의 폐쇄(閉鎖)

서당의 폐쇄 시기는 일제강점기 1920 ∼1925(대정10∼소화초) 쯤으로 보인다. 선대들로부터 들은 바론, 당시 제사를 지내는 날에 이곳 면장이 자기도 이 고을 면장이니 행사(行祀)의 주빈으로 참사(參祀)할 수 있다 하여 상좌(上坐)에 앉으니 원로(元老) 한 분이 “저놈이 누구냐? 당장에 내쳐라”라고 호령하니 젊은 장정(壯丁)들이 ‘단지걸음’으로 ‘오산정’까지 내쳤다고 한다. 이후로 순흥 고을에는 ‘오산정 단지걸음’이라는 말이 생겨 지금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최악의 수모를 당한 최 면장은 그 앙심으로 왜정 요로(要路)에 ‘이 서당은 불순한 자들의 집합장으로 불순한 음모를 꾸미는 곳’이라고 상신하게 되니 서당은 폐쇄되고 자산은 몰수되고, 건물은 매각 처분하고 농토는 면에서 소작료를 징수하게 된다. 당시 순흥면에서 ‘李‧柳財産’이란 명칭으로 소작료를 징수한 것으로 안다.

그 후 수년이 지나 선고(先考)께서 이(此) 건물을 매수해 입주 이사(移徙)한 시기는 1930년∼1932년(내 나이 5∼6세) 경으로 기억된다. 이주 후 1933년 12월 선고께서 작고하시고, 백형‧중형‧외숙 등이 살았는데 집이 크고 고가(古家) 관리가 어려워 집을 헐고 신축하게 됐다.

이 기록을 남긴 류대수는 전주류씨로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류영경의 13세손이며, 현 소수서원 류준희 도감의 숙부(叔父)이다.

대평서당기(大平書堂記)

대평서당기는 퇴계의 9대손 이야순(李野淳,1755~1831)이 1822년 대평서당에 와서 정축년에 희생된 65가구의 원혼을 위로하는 제사 모습을 보고 감동해 적은 글이다. 이 ‘대평서당기’는 안동권씨 순흥문중 권용학(금성단성역화추진위원장)家에서 소장하고 있던 두루마리 문서이다.

「아! 그 옛날 정축년(1457) 변란에 죽계 일대에 65가구가 모두 뒤섞여져 뜻밖의 죽임을 당한 것은 가히 천고에 들어본 적조차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금성대군과 부사 이보흠의 죽음은 그래도 이름만은 남았지만 저 65가의 억울한 죽음은 무슨 죄가 있었겠습니까? 바람결에 떠돌아다니는 흩어진 원혼들은 추위에 떨고 굶주림의 세월을 보낸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측은한 마음으로 애절하게 생각했지만 수백 년이 지난 그날은 아직도 두려워하고 있다.

따라서 한 잔의 술과 한 그릇의 밥으로 제사를 지낼 사람 감히 누가 있겠는가. 아! 죽계 곁에 대평서당(석교1리 서당마을)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안동권씨와 전주류씨가 터를 잡고 대대로 살아온 곳이다. 모두 옛날을 숭상하고 의를 가까이하는 풍모가 있는 가문들이다.

마침내 매년 곡식을 조금씩 모아가지고 해마다 서당에서 원혼에 제사를 올렸다. 제사를 올리는 날은 부근의 주민들도 참석하여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대평서당기에 나오는 권씨는 안동인 죽림(竹林) 권산해(權山海, 1403〜1456)의 후손들이고, 류씨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전주인 류영경(柳永慶, 1550〜1608)의 후손들이다. 대평서당 사람들은 아마도 금성단이 설치되기 이전부터 비밀리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을까 추정하는 학자들도 여럿 있다.

대평서당과 권씨·류씨

대평서당은 당시 순흥부 대평면 소재지에 있는 사립교육기관이었다. 이 서당은 석교리에 살고 있던 안동권씨와 전주류씨가 주가 되어 설립했다. 안동권씨 석교 입향은 단종조 충절인 죽림(竹林) 권산해(權山海, 1403-1456)의 손자 권순(權純)이 1510년경 예천 용궁에서 순흥으로 이거하여 석교리에 뿌리내렸다.

한편 석교리의 전주류씨는 조선 중기 영의정을 지낸 류영경(柳永慶,1550-1608)의 2자 류흔(柳欣, 호조좌랑)의 후손이다. 류흔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부인이 손자를 데리고 1600년대 초 순흥 태장(한상골)에서 석교리로 이거하여 지금까지 세거해 오고 있다.

대평서당의 역사적 평가

충절을 소중한 가치로 인식한 순흥인들의 선비정신이야말로 18세기 순흥 지역의 선비문화를 창달케 한 원동력이 되었다. ‘대평서당기(大平書堂記)’는 1822년에 퇴계 후손 이야순이 지은 것을 안동권씨 문중에서 소중하게 보존해 온 것으로, 19세기 순흥 고을 사람들에 의해 계승된 유교 문화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정축년에 희생된 지사(志士)들의 충절을 현창(顯彰)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상부상조하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대평서당’ 또한 유교성지(儒敎聖地)의 일부분으로서 기억되고 추앙을 받는 연유는 이처럼 고을 사람들이 진심을 모아 거행해 온 제사 의식 때문이다.

이와 같은 순흥인의 선비정신은 금성단 제향‧수서서원 제향과 함께 순흥의 유교 문화를 확고히 뿌리내릴 수 있게 하였기 때문이다. 자기 목숨을 바쳐 인(仁)과 의(義)의 뜻을 실천하는 것은 굳은 결심이 아니고는 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목숨을 바쳐 단종 복위 의거에 참여한 지사들의 마음이야말로 유자(儒者)들이 추구하는 선비정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순흥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대평서당을 복원해 그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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