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불되어 퍼져나간 삼일만세운동”
박인서(朴仁緖)(1886~1957), 오하근(吳夏根)(1897~1947)

영주 만세운동 시발지
영주 만세운동 시발지

3.1운동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한다. 대한제국 광무황제(光武皇帝)의 장례일이었다. 많은 사람이 모인 곳은 고종이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독살설도 원인이 되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루어진 파리강화회담도 큰 계기가 되었다.

이 회담에서 미국 대통령이 제안한 14개 조의 전후처리 원칙 중에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라는 ‘민족자결주의’는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지폈다.

그 후 3월 1일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된다.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시작한 경상북도의 만세운동은 5월 7일 청도 매전 시위까지, 110회가 매일같이 일어난다. 그리고 3월 21일(음, 2월 20일) 영주장터에서 시작한 영주의 만세운동은 4월 4일 하리면(당시는 영주군이었음) 은산장터, 4월 9일 풍기장터, 4월11일 장수면 호문리 웅곡산의 시위로 이어진다.

푸실마을 남악정
푸실마을 남악정

영주의 주도자는 다음과 같다.

· 영주 : 박인서, 오하근, 권태중
· 하리 : 권창수, 이헌호, 이재덕, 채동진, 이용헌
· 풍기 : 안용호, 남영진, 최성원, 황정흠(黃鼎欽), 김용준, 남상필, 황정흠(黃政欽), 이화백
· 장수 : 손달익, 장윤덕, 손기상, 손용호, 황학영

그리고 이 3.1운동은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기념비가 있는 오하근 유적지
기념비가 있는 오하근 유적지

박인서(朴仁緖)와 오하근(吳夏根)

이산면(伊山面) 내림리(內林里)에 사는 박인서와 휴천동(休川洞) 조암리(槽岩里)에 사는 오하근은 사돈 관계-박인서의 딸이 오하근의 조카며느리-이기도 했지만, 연령을 떠나 서로 의기가 투합했던 사이다.

그러던 중에 오하근이 1919년 3월 1일(음, 1. 29.), 고종의 국장(國葬)에 참례하기 위해 서울을 다녀온 후, 박인서는 그때 그곳에서 목격한 독립만세운동을 전해 듣고, 영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함께 계획한다. 영주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권태중(權泰中)에게 태극기 제작을 부탁한다.

3월 21일 오후 5시, 박인서는 싸전에서, 오하근은 어물전에서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서를 군중에게 나누어주고,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시장을 행진한다. 하지만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바로 체포된다. 대구지방법원을 거쳐 경성고등법원에서 각각 징역 2년과 1년 6개월을 언도 받아 서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룬다.

오하근 기념비
오하근 기념비

유적지

• 기념비 / 조암동 1140-8

항일투사 농고 오하근의 기념비가 1979년 수청거리, 푸실(草谷, 沙日)마을 입구에 세워진다. 이곳엔 오하근의 묘소가 있었는데, 2007년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 영주장터 / 영주로 247번길

1919년 3월 20일 독립만세운동은 영주중앙초등학교 옆길인 이곳에서 시작하였다. 여기에서 중앙로 쪽으로 진출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남악정(南岳亭) / 구성로43번길 86-13

푸실마을에서 1919년 당시의 모습을 지키고 있는 몇 안 되는 건물이다. 남악(南嶽)은 경암(敬庵) 오여벌(吳汝橃, 1579〜1635)의 또 다른 호이다. 푸실은 퇴계(退溪)의 처가 동네로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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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고!”
“예! 사장어르신.”

남악정에서 기다리고 있던 인서는 하근이 마루에 오르자 손을 덥썩 잡더니 수고했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대뜸 호칭을 고치자고 했다.

“농고! 오늘부터 우리는 서로 동지라고 하세. 자넨 오동지, 난 박동지….”

서른넷인 박인서와 스무 세 살인 오하근은 11살의 나이 차이가 나지만, 같이 한학을 하며 교류를 해온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다보니 식민통치에 대한 불만을 서로 토로하기도 하고, 항일투쟁 등 민족의 처지를 격의 없이 논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돈 관계이기도 했다. 열세 살에 결혼한 인서는 일찍 얻은 딸이 있었다.

그 딸을 하근의 조카며느리로 시집을 보낸 것도 어쩌면 평소 자신을 잘 따르던 하근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둘은 서로 의지하며 살아온 돈독한 관계였다. 이번 서울 길도 좀더 여유가 있었던 하근이 스스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것은 하근의 집이 인서네에 비해 살림이 더 넉넉했기 때문이었다.

고종의 장례식에 다녀왔다고 하근이 기별을 보내자마자 인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쫓아왔다. 그리고는 호칭부터 고치자고 했다. 하근은 손을 잡은 체 인서를 바라보다가 부르르 떨었다. 인서의 의지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인서를 방안으로 안내하고는 서울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인서에게 보여주었다.

“우리 조선은 이제 독립국이고, 우리는 자유민이라고 했어요. 세계 개조의 대기운에 순응한 시대의 대세라고 했어요.”

“그리고….”

“우리의 독립은 하늘의 명령이고, 전인류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정당한 주장이라 했어요.”

“그리고….”

“이 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젊은 학도들은 각자 가지고 온 태극기를 흔들며 거리로 나왔어요. 남성, 여성 구분이 없었어요. 그리고 그들은 탑골공원에서 광화문을 향해 걸으며 만세를 불렀어요.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 만세!”

“아!”

“그런데, 언제 왔는지 왜놈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어요….”

“….”

“총을 맞은 학도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하지만 젊은 학도들은 주저없이 앞으로 나갔어요. 그러자 말을 탄 왜경들이 칼을 들고….”

이번엔 인서가 하근의 어깨를 잡으며 부르르 떨었다. 하근은 자신의 어깨를 잡고있는 인서의 손을 토닥이며 또박또박 이야기를 이어갔다.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파리 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사실과 주변 사람들을 통해 전국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서울을 다녀오면서 전해 들었다는 이야기였다.

“나도 대구에서 만세운동이 있었다는 얘길 들었다네.”

“저도 기차를 타고 오면서, 김천역전에서 만난 이들에게 곳곳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어요.”

“오동지! 더 머뭇거릴 수 없네. 영주엔 우리가 그 불을 지펴야 하지 않겠나? 그래! 우리가 영주의 들불이 되어야겠네.”

다가오는 영주장날로 시위 날짜를 잡았다. 장날은 특별한 조직력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약속된 날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장소는 시장으로 정했다. 시장은 장꾼들만의 장소가 아니라는 것, 여기저기서 모인 이들이 펼쳐내는 것은 물건 보따리보다 이야기 보따리가 늘 더 큰 장소가 시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출발지를 나무전 골목에서 하기로 하였다. 인서는 나무전골목의 쌀 가게에서, 하근은 쌀 가게에서 남쪽으로 열다섯 칸쯤 떨어진 어물 가게에서 출발하여, 중앙통 쪽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했다.

“오동지! 선언서는 우리가 쓰면 되는데, 태극기는 그래도 솜씨가 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요? 음…. 제 동무 중에 그쪽에 밝은 이가 있습니다. 형편상 직접 나설 수 없는 처지이지만, 그 정도는 해줄 겁니다.”

하근의 머리에 문득 권태중이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태극기는 보통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문양이었다. 하지만 권태중은 주변의 영향을 받아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춘 인물이었고, 또 믿을만한 인품이었기에 제작을 부탁을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근은 바로 태중에게 부탁하였다. 태중은 자신이 형편상 시위에 함께 하지 못함을 더 미안해하며, 제작을 수락했다. 그리고 시위에 함께 할 이들은 각자 확보하기로 하면서, 하근은 영주에서, 인서는 봉화 쪽에서 대상자를 포섭하기로 했다.

“오동지! 다른 이들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합시다. 떳떳하고 장하게 합시다.”

“네. 그래요. 박동지의 말씀을 들으니, 만해스님 만든 공약삼장이 생각납니다. 비폭력이어야 한다. 정당하게 의사를 밝히라. 질서를 지키고 광명정대하게 하라.”

둘은 두 손을 함께 잡았다. 그리고 두 번 세 번 흔들며 얼굴의 피어오르는 웃음을 나누었다. 남악정 문 틀 사이로 이월 보름 달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영주장날이 되었다. 하근은 점심을 먹고 길을 나섰다. 수청거리를 지나 남산고개를 넘어, 광승마을과 성밑마을로 천천히 걸었다. 광승마을을 지날 때, 한 친구가 사랑마루에서 손을 흔든다. 하근도 웃으며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친구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따 보자는 의미일 것이다.

“자네가 서울 갔다온 소식을 들었다네. 내 기꺼이 동참하지. 더 시킬 게 없나?”

“그냥 참여만 해주게. 그런데 일을 더 벌이지는 말게나.”

평소 좀 과격한 친구여서 신신 당부를 했다. 시장 사람들은 지켜주어야 한다. 비폭력이어야 한다. 질서를 지켜야 한다. …. 한참을 설득하며 승낙을 얻어낸 친구였다.

인서는 아침을 먹자마자 집을 나섰다. 외나무다리를 건너 두월로 간다. 그리고 두월을 지나 내성천을 따라 걸었다. 가자골, 시르미…. 그리고 고석동천, 가암동천 바위글씨가 오늘따라 새롭다. 무슨 까닭일까? 이제 이 길을 언제 올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히다가 고개를 젓는다.

“이보게. 자네 식솔을 생각해 보게. 내가 대신 나설 터이니, 자네는 뒤로 물러서게.”

자신이 나서겠다는 친구를 말리며 신신 당부를 했다.

“파장이 다 된 다섯 시에 시작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함이라네. 자네들이 시장사람들이 흥분하지 않도록 힘써 주게.”

두암고택과 만취당을 지나 미륵뎅이 쪽으로 내성천을 건넌다. 이제 흑석사에서 불공을 드리고, 돝밤실을 지나 웃무리재와 벌래고개를 넘으면 원댕이마을이고, 원당천을 건너면 나무전골목이다. 그리고 시장의 동태를 살피면서 봐둔 장소에 가면 될 것이다.

5시가 다 되어가지만, 아직 한낮이다. 해가 참 길어졌다. 인서는 주변을 살핀다. 싸전 여기저기에 친구들의 모습이 보인다. 태극기를 꺼내 들며, 어물전 쪽으로 바라보았다. ‘오동지는 잘 하고 있겠지?’ 하며.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군중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머뭇거리던 군중들은 친구들의 만세 소리가 힘이 되었는지, 함께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하근도 그 시간에 어물전에서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중앙통 쪽으로 행진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벌써 호각 소리이다. 친구들이 앞서 나서는 것을 고개짓으로 말리며, 헌병 쪽으로 나섰다. 헌병들은 달려들어 하근을 에워쌌다. 하근은 그 자리에서 군중들에게 돌아서며 다시 한번 외쳤다.

“대한독립만세!”

그리고 친구들을 향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머리로 떠오르는 선언서의 구절을 큰 소리로 외쳤다.

“조상 영혼들은 우리를 도우며, 전세계 기운은 우리를 보호하나니.”

김덕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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