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길 위의 여정, 역사가 되다.”
기려자(騎驢子) 송상도(宋相燾) (1871~1947)

기려수필 원고
기려수필 원고

기려수필(騎驢隨筆)

기려수필 책자
기려수필 책자

『기려수필』은 1986년 병인양요(丙寅洋擾)부터 1934년까지 있었던 애국지사의 활동을 직접 답사하며 기록한 기려자 송상도 애국지사의 독립운동 결정체이다.

수록 인물은 의병, 의열투쟁 등 독립운동을 전개한 애국지사들이다.

그 내용은 원본 5권과 미정고본(未定稿本)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본 5권은 목차, 본문 순서인데, 가 권의 본문은 제 1항 제목 앞에 ‘기려수필’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원본은 한지에 평균 가로 11중, 세로 30자이고, 면구는 총 5권에 769면으로 되어 있다.

부록에 해당하는 ‘부효(附孝)’는 77면이고, ‘부열(附㤠)’은 108면이다.

책자는 독립기념관에 소장하고 있는 5책의 필사본과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인쇄본과 2014년 충남대학교 한자문화연구소와 충청문화연구소가 도서출판 문진에서 발간한 『기려수필, 망국의 한 기록으로 꽃피우다』가 있다.

생애

기려수필 책비(앞)
기려수필 책비(앞)

송상도는 1871년 광승동(廣升洞, 현 휴천3동)에서 아버지 송학영(宋學永)과 어머니 반남박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미헌(眉軒), 연파(蓮坡)를 쓰기도 했으나, 본인은 스스로 ‘기려자’란 호를 많이 사용했다.

이 호를 사용하게 된 것은 24세 때인 1895년 충청도에서 온 김영주를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를 하면서 명나라가 청나라에 멸망한 후에 당나귀를 탄 한 노인이 명나라의 우국지사들의 행적을 쫓아 다니며 기록을 했다는 중국 명나라의 ‘기려도사’ 때문이었다. ‘말 탈 기, 당나귀 려’ 그래서 스스로 ‘기려자’라는 이름을 지어 불렀다고 한다.

1910년, 39세 때에 나라를 잃는 슬픔을 맞이한다. 경술국치(庚戌國恥)는 모든 국민들에게 충격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도 있었고, 국외로 망명을 하면서 새로운 투쟁의 길을 모색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때 기려자가 선택한 길은 죽장망혜(竹杖芒鞋), 짚신을 신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전국 방방곡곡 우국지사의 행적을 찾아다니며 기록하자는 일이었다.

기려수필 책비(뒤)
기려수필 책비(뒤)

“나 송상도는 미약하여 순절하려고 해도 마땅하게 죽을 이유를 찾지 못하였으며, 의거하려고 하여도 지혜와 담력이 없으며 해외로 나가 광복을 도모하려고 하여도 자금과 농사지을 힘이 부족하니 모두 할 수 없다.

그러나 의리를 좋아하는 마음은 오히려 사라지지 않았다.

이에 감히 옛날 기려도사 일을 본받아 호남, 관서, 기호, 영남 등지를 돌아다니며 어려움과 수고로움을 회피하지 않고 늙어 죽을 때까지 널리 수집하고 찾아다녀 책을 완성하였다.”

기려수필(騎驢隨筆) 발문(跋文)에 밝히듯이 일제 관헌들의 악독한 감찰 속에 전국을 다니면서 의병들로 시작해서 기생, 노비, 선비들에 이르기까지 233 분의 지사들의 행적을 찾아 기록을 한다. 화가 두려워 전하지 못한다면 남은 자들의 책임이라는 각오였다고 한다.

1934년경, 기려수필을 간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발간을 미루게 된다. 그 무렵 전북 임실의 유학자 조희제(趙熙濟, 1873〜1939)도 항일지사들의 행적을 기록한 『염재야록(念齋野錄)』을 편찬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1938년 11월 일제에 발각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스스로 자결한 일이 생긴다. 아마도 이런 분위기로 주위에서 발간을 만류하지 않았을까 싶다.

기려자 송상도지사 생가터
기려자 송상도지사 생가터

유적지

생가터 / 영주시 휴천동 112-1

‘휴천1동 기려자경로당’ 주차장 한편에 기려자 ‘송상도 생가터 기념비각’이 있다. 이 비각은 영주시와 (사)기려자송상도지사기념사업회에서 세운 것이다.

기려자 송상도지사 생가터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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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불우한 독립지사 기려자

“기자가 뭐하는 놈이야! 억울한 기사를 왜 안 써” 영친왕이 내린 “삼한대의(三韓大義) 육주고사(六洲高士)”란 종이 두루마리와 “기려수필”(송상도저서․국사편찬위원회 발행 한국사료총서 권2) 책을 내 앞에 던지며 두문은 눈에 불을 흘리면서 정부와 언론을 싸잡아 욕을 했다.

송두문은 초등학교 동창이다. 십리 밖인 우리 집에서 학교를 가는 길에 두문 네 집을 들르기도 했다. 그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어떤 기록에는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나 초가 두 칸 집에서 살았다.’고 운운하는데, 두문 네 집은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큰집이었다.

기사를 쓰기 위해 두문의 집을 찾아갔을 때, 옛 초가집의 사랑채는 헐어 없어졌고, 안채는 슬레이트지붕으로 변해있었다.

두문의 할머니(김창규. 95)는 고령에도 또렷하게 옛 기억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아버님은 한복 한 벌 돌돌 말아 괴나리봇집을 지고 나가면 계절이 바뀌어 오곤 했지요. 찾아오는 손님들은 다 거지 행색이어서 빨래를 수없이 하고, 새 옷을 짓기도 했어요. 그분들이 떠날 때는 노잣돈을 아버님께서 주라는 액수에 맞추어 꼭 마련해 주어야 했어요. 그런 30여년 세월이 흐르다 보니 십여 마지기나 되던 논밭도 이웃에 진 빚 때문에 다 팔아 없앴지요.”

집을 떠나면 거지 행색으로 돌아오는 시아버지는 집에서는 문밖을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권상익(權相翊)과 전우(田愚), 심산(心山) 김창숙 등 극히 제한된 사람과 교유할 뿐이었고, 거지 행색의 나그네(후일에 보니 독립애국지사들)만 사귀며 가사를 팽개치고 있어서, 집안과 이웃에서는 별난 사람으로 경원시 당했다.

해방 후, 광승은 아랫동네 윗동네가 좌우익으로 갈려 싸웠다. 기려자의 민족정신을 이어받은 손자는 좌익은 아니었지만, 친일파를 업고 정권을 재창출하는 친일정권을 반대하는 편에 섰다가 스물두 살에 총살당했다. 갓 시집온 아내와 첫 돌도 안 된 아들 그리고 어머니를 두고 억울한 삶을 마감했다. 두문의 할머니는 먼저 저세상으로 간 아들을 원망하며 젖먹이 손자와 홀시아버지를 모시고 살아온 고독과 그리움으로 가득한 삶을 눈물로 호소했다.

“시아버지 원고뭉치를 콩 단지에 넣었다가 땅에 파묻었다가 숨기느라고 고생을 했는데, 죽을 고생만 하고 독립유공자 포상도 못 받고 있어요.”

그 이듬해 찾아갔을 때는 빚에 쪼들려 집을 팔고, 경북전문대학 앞에 전세를 얻어 이사를 간 뒤였다. 모든 책임은 두문의 부인인 장사정(張師貞․43)의 몫이었다. 96세 할머니와 폐인이 된 병든 남편과 딸 4형제를 데리고 하숙을 치며 살고 있었다. 그때 두문의 병은 깊어 동창생을 만나도 잘 알아보지를 못했다.

당시 영주경찰서 정보계장이었던 임동규는 두문과 같은 동창이었다. “기사를 아무리 써도 소용없네. 기려자의 손자(두문 아버지)가 좌익으로 죽어서 연좌제법 폐지가 되기 전에는 독립유공자가 될 수 없어.”하며 잘라 말했다. 나는 “기려자의 손자가 좌익이었지, 기려자가 빨갱이 었느냐? 그런 빌어먹을 법이 대한민국헌법 규정 어디에 있느냐”고 따져 물었다.

유공자포상을 못 받은 독립지사/1983. 3.1. 매일신문

30년간을 역사적 사명인 큰 뜻을 품고 죽장망혜(竹杖芒鞋) 괴나리봇짐을 걸머지고 삼천리강산 방방곡곡을 과객노릇을 하고 돌아다니며 애국선혈지사들의 항일투쟁사를 기록한 “기려수필”에는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이시원의 사적으로부터 -중략- 상해에서 일본 대장 백천을 죽인 윤봉길 등 큰 사건은 물론 작은 사건들까지 총233명이 수록되어 다른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외국 독립지사들의 활동상황도 첨가되어 있는 귀중한 독립사료이다. 특히 “기려수필”에 기록된 인물 중 30여명이 “기려수필”을 근거로 해서 해방 후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기까지 했으나 당사자인 송상도선생은 현재까지 포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송상도선생의 아들과 손자는 모두 타계했고, 증손자 두문 씨 가족이 남아 대를 이어가고 있는데, 두문씨는 정신이상 신병으로 바깥출입도 못하는 딱한 실정이어서, 증손부 장사정씨는 넉넉지 못한 형편에 노 증조모를 모시고 어렵게 살고 있다. 두문 씨는 “기려수필이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지만, 저자에 대한 당국의 배려가 너무 야속하다”며, “독립유공자 지정을 못 받음은 후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다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송지사의 포상신청은 그동안 여러 차례 벌려왔으나 끝내 이루지 못해, 이제는 거의 포기한 상태이다. 문중의 대표겪인 송시익씨(宋時翼․72)는 “송상도지가가 독립유공자포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신상과정에서 당국이 상훈법상 저촉되는 부분이 있어서라는 회신을 해온 것으로 보아 송지사의 손자가 한때 좌익 활동에 휩쓸린 적이 있어 그것이 이유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송씨는 “송지사의 업적을 평가해 포상은 당연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며 하루빨리 원호대상자로 지정, 늦었지만 유일하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며느리가 죽기 전에 이루어져, 며느리의 가슴에 쌓인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영주 朴河植기자)

작고 후 40년 만에 받은 독립유공자 건국포장

기사를 쓰도 아무 반응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경북전문대학 최현우 학장님이 나를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달려가니 최석채 조선일보 주필과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내 기사를 본 최 학장님이 최 주필에게 얘기를 한 모양이다. 나는 됐다 싶었다. 두 어른이 주는 술잔을 연거푸 마신 다음, 두문의 혼이 내게 전이된 듯 숨이 막히는 심정으로 말했다. “이런 법이 어디에도 없어요.”

“벌써 포상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우리나라에 항일독립사 기록은 황현의 「매천야록」과 송상도의 「기려수필」 뿐이고, 또 그 자료로 많은 사람이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았는데 ….”

행시를 합격하고, 젊은 나이에 영주경찰서장으로 부임했던 최석채는 자유당 정부에서 내려오는 부정선거를 지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위해제 된 적이 있다. 그는 그길로 매일신문사로 가서 사설을 쓰기 시작한다. 자유당의 부당성을 비판하는 지적은 전국으로 전파되면서 다른 신문들도 동참하게 된다. 그 후, 자유당이 무너지고, 최주필은 언론계에 혜성처럼 등장한다. 그 후 매일신문 논설주간에서 서울로 올라가 조선일보 주필이 됐고, MBC사장이 된다.

그 짧은 만남이 있고 난 뒤, 최석채는 조선일보에 “불우한 기려자”란 칼럼을 쓴다. “국내 건국공로자의 심사 자료로 쓰이는 책의 저자가 공적서훈에서 빠져있다는 것은 모순이다. 조국을 위했던 삶이 생전도 불우했는데, 사후까지도 불우하다. 90세를 넘긴 자부가 아직 생존해있는데, 생전에 원호대상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유가족은 야속한 세상에 항거하듯, 송 선생이 남긴 또 하나의 귀중한 사료인 「조선왕조사」의 원고를 다른 사람 손에 넘기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칼럼은 지방신문과는 위력이 달랐다. 연좌제법을 뛰어넘어 국무회의 의결로 독립유공자 건국포장 2급을 수여받게 만들었다. 작고한 지 40년이다. 하지만 며느리 김창규할머니(97)는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건국포장을 살아서 보지 못한 채 타계했고, 폐인이 되어 조국을 원망하며 방황하던 증손자 두문이도 죽고 없었다. 또 두문의 부인마저 영주서 살길이 없어 딸 4자매를 데리고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가고 없었다.

그리고 1987년 영주교육자들은 23개 초‧중‧고‧대학생 3만3천3백82명과 경향각지 유지 1백 명의 성금으로 영주공공도서관 앞에 기려자의 기념추모비를 세운다. 1990년에는 “애국장”을 추증 받고, 1991년에는 묘소를 대전 국립 현충원으로 이장해 모셨다.

공공도서관 앞에 홀로 선 비석은 오늘도 흘러간 그 옛날을 추억하며 쓸쓸히 서 있다.

글 박하식 소설가 / 정리 김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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