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의 공주이씨 가문에 전해오는 두 가지 이야기

명나라 황제가 지어 준 집이라고 전해지는 이석간 고택
명나라 황제가 지어 준 집이라고 전해지는 이석간 고택

대대로 구전(口傳)되어 오던 이야기를 1950년대 중반 문서로 작성
공주이씨 이병하 종손이 들려준 이야기를 故 김영하 작가가 엮음
두 이야기 1982년 KBS ‘전설의 고향’에서 ‘천하명의 이석간’ 방영

‘천하명의 이석간-①’ 보도(2022.1.6) 후 영주에 사는 한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경기도 파주 민통선 안에 동의보감으로 유명한 ‘허준(許浚)의 묘’가 있다. 경기도는 ‘허준의 묘’를 경기도문화재(기념물, 제128호)로 지정(1992년)하고, 성역화사업을 추진한 결과 지금은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관광지가 되었다고 한다.

영주의 ‘천하명의 이석간의 묘’도 늦기 전에 문화재로 지정하여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또 다른 시민은 “‘이석간의 묘’ 인근에 조선 왕릉에 준하는 ‘류빈(柳濱)의 묘(墓) 종릉(鍾陵)’이 있다. 이 두 곳과 무섬마을을 연결하는 관광코스를 만든다면 색다른 볼거리가 될 것 같아 말씀드려 본다”고 했다.

이석간(1509生)과 허준(1539)은 동시대를 살았던 조선의 명의로 이석간이 허준보다 30년 먼저 태어나 활동했다.

이석간이 천도복숭아 씨를 도포자락에 넣어 가지고 와 만든 술잔
이석간이 천도복숭아 씨를 도포자락에 넣어 가지고 와 만든 술잔

이석간의 두 가지 이야기

‘천하명의 이석간-②’에서는 영주의 공주이씨 가문(家門)에서 전해 오는 두 가지 이야기 즉 몸이 점점 작아지는 ‘왜소병(矮小病) 환자를 치료해 준 이야기’와 ‘명나라 황태후(皇太后)의 병을 고친 이야기’를 소개한다.

‘천도쌍잔’을 비롯한 문중전적(門中典籍) 등을 보관하고 있다가 소수박물관에 기증한 이석간의 후손 이석우(87, 16세손, 대구) 씨는 “이 이야기는 구전으로만 전해오고 있었다”면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부터 전해오는 이 이야기를 저는 할아버지께 들었고, 나는 또 손자에게 들려줬더니 손자가 커서 의사가 됐다.

구전(口傳)이 문서화 된 것은 1950년대 중반쯤인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공주이씨 영주문중 이병하(李柄夏, 1928生, 16세손) 종손이 독립운동가요 교육자인 김영하(金永河, 1919生) 선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김영하(작가) 선생은 이 이야기를 받아 적은 후 정리하여 글로 쓴 것이 지금 두 이야기의 원전(原典)이 된 셈”이라고 말했다.

후손 이영도(77, 하망동) 씨는 “초등학교 다닐 때쯤 종손 병하 형님으로부터 이석간 선조의 천하명의 이야기를 들었다”며 “당시 김영하(영주중) 교감 선생님께서 이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자 KBS 전설의 고향 작가가 영주에 와서 이 이야기를 복사해 갔고, 몇 해 후 ‘전설의 고향’에 방영됐다.

지금은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상상력을 보태 재미있게 만드는 것 같다”고 말했다. 후손 이태영(70, 영주동) 씨도 “천하명의 이야기는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진지하면서도 재미있게 들었고, 관심이 많았다”며 “KBS 전설의 고향에서 ‘천하명의 이석간’이란 제목으로 방영할 때 재미있게 보았다. 그때가 아마도 1982년 가을로 기억된다”고 말했다.

이석간 고택의 사랑채(1929년에 고쳐 지은 근대한옥)
이석간 고택의 사랑채(1929년에 고쳐 지은 근대한옥)

어른이 아이 되는 병

지금부터 500여 년 전 영천군(옛 영주) 뒷새라는 마을에 이석간이란 의원이 살고 있었다.

그는 학식이 높고 성품이 어진 선비로 널리 인술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난치병도 그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척척 고쳐 ‘천하명의’란 명성을 얻었다.

하루는 젊은 부인이 찾아왔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습니까?”라고 묻자 부인은 “저는 혼인한 지 일 년쯤 되었는데 남편의 몸이 날이 갈수록 작아지더니 지금은 이와 같습니다”라고 하면서 품속에서 작은 인형 하나를 꺼내 놓았다. 새까만 눈동자가 반짝이고 수염이 난 것으로 봐서 어른임에 틀림이 없었다.

석간은 너무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다. “내가 한 달 동안 치료법을 연구해 보겠으니 가서 기다리시오”라고 했다. 부인은 “꼭 고쳐주십시오.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인형 같은 남편을 다시 품속에 집어넣고 일어섰다.

이석간은 눈앞이 깜깜했다. 의서란 의서는 다 찾아봐도 이런 병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느덧 한 달이 지나가고 그 부인이 또 찾아왔다. 더 작아진 남편을 품 안에서 꺼내 놓았다. 석간은 울상이 되었고 “한 달만 더 여유를 달라”고 했다. 실의에 빠진 석간은 몸져눕게 되자 의원을 그만두고 도망칠 생각을 하게 됐다.

석간은 의관정제(衣冠整齊)하고 집을 떠나 소백산 죽령 고개로 망연(茫然)히 걸어갔다. 그때 “영차! 영차!”하면서 이상한 사람이 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등이 붙은 두 사람이었다.

“여보시오 선비, 혹시 조선의 명의 이석간을 아십니까?” “알지요. 그런데 이석간은 병자를 고치지 못해 도망치고 없는 줄 아옵니다만 ……” “허참! 그럼 천하명의란 헛소문이었군요. 먼 길 허행할 뻔했군. 우리는 집으로 돌아갑시다”라며 발길을 돌렸다.

이때 석간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치는 그 무엇이 있었다. 석간은 그들을 따라가 다급하게 물었다. “여보시오, 이석간이 못 고친다는 병은 어른이 아이가 되는 병인데 의서에도 없고 보도 듣도 못했던 병이랍니다. 좋은 방도가 없겠습니까?”라고 하니 그들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건, 어릴 때 젖배를 주린 것이 원인이 되어 나타난 병이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하고 물으니 “첫아이 낳은 1천 집 모유를 서 말 세 홉 모아 세 번 목욕시키면 낫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석간은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와 등 붙은 사람이 가르쳐 주는 대로 했더니 그는 정상인으로 돌아와 남편 구실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 후 젊은 부부는 이석간을 아버지라 부르며 한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명나라 황태후의 병을 고치다

이석간의 명성은 멀리 중국까지 알려졌다. 하루는 중국 사신이 우리(조선) 조정에 와서 말하기를 “영천 땅에 살고 있는 ‘의원 이석간’을 중국에 보내 달라”며 황제의 친서를 내놓았다.

조선 임금님은 “이석간을 중국으로 보내도록 하라”는 어명을 내렸고 석간은 사신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중국 황궁으로 가서 황제 앞에 서게 됐다.

“의원 이석간은 못 고치는 병이 없다고 들었소. 황태후(皇太后, 황재의 모후)가 병이 깊어 중국에 있는 명의란 명의의 약을 다 써 봤으나 소용이 없었소. 이제 이석간 천하명의를 불렀으니 꼭 고쳐 주기 바라오”라고 했다.

이석간은 황제의 안내에 따라 금은보석으로 장식한 황궁의 여러 방을 지나 황태후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머리가 희끗한 모후가 누워 있었는데 얼굴은 떠오르는 달 같고 손은 백옥 같아 아무 병도 없는 것 같았다. 진맥하니 맥박도 정상이었다.

“폐하, 황태후는 아무런 병이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고하니 황제는 황후의 이불을 걷어붙이며 “이것을 보시오”라고 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모후의 하반신이 뱀같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석간은 깜짝 놀라 아무런 말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황제는 “고칠 수 있겠는가?”라고 다그치니 석간은 ‘못 고친다 하면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 “예, 한 달의 여유를 주시면 치료 방안을 마련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석간은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고 연구와 고민을 거듭하다가 문득 죽령 고개에서 만난 등이 붙은 사람이 생각났다. 석간은 천지신명께 ‘등 붙은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고 밤을 새워 기도를 이어갔다.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어느 날 꿈에 등 붙은 사람이 나타나 “나는 소백산 산신령이다. 지난번에는 (어른이 아이 되는)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었는데 이번엔 또 무슨 도움이 필요한가?” “예, 소백산 신령님, 황태후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처방을 내려 주십시오”

소백산 산신은 “황후는 오랜 황실 생활을 하다 보니 기(氣)가 막혀 하반신이 뱀과 같이 변하고 있다. 금침(金鍼)을 배꼽에 꽂아 두면 기(氣)가 살아나 병이 나을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석간이 잠에서 깨어보니 손에 금침이 쥐여져 있었다.

석간은 그길로 황제를 알현(謁見)하고는 당장 모후 치료에 들어갔다. 십여 일을 꼬박 치료한 결과 황태후의 몸은 서서히 회복되어 갔고, 한 달이 되는 날 거의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황제는 매우 기뻐하며 석간을 불러 놓고 말하기를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자 석간은 “저는 아무 소원이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집이 없어 곤란을 겪고 있으니 작은 집이나 한 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석간은 6개월간 중국의 명산대천을 구경하고 전의(典醫)란 벼슬을 받아 귀국길에 오르게 됐다.

귀국하는 날 황제는 송별연을 베풀고 금은보화와 비단도 하사했으며, 황실의 귀한 술과 천도복숭아 등 진귀한 음식상을 내놓았다. 석간은 난생처음 맛본 천도복숭아가 얼마나 맛있는지 그 씨를 도포 자락에 넣어 가지고 와 술잔을 만들었는데 후손들은 그 술잔을 귀하게 여겨 혼례 때 의례용 잔으로 사용도록 하였다.

석간이 압록강을 건너 여러 날이 걸려 영천의 집에 도착하니 전에 살던 집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금방 지은 99칸 큰 기와집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명나라 황제가 지어 준 집이다.

경인교대 김호 교수는 이석간이 명나라에 가서 황태후를 치료했다는 구전(口傳)에 대해 “이석간은 봉화의 충재(沖齋) 권벌(權橃)의 외조카(외종질, 외종사촌의 아들)로 권벌이 명나라에 개종계주청사로 갈 때 이석간과 파주에서 만나 개성까지 동행한 기록은 확인됐으나 명나라까지 갔다는 기록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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