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가치를 잃어버린 세대
​​​​​​​기억은 인생을 두 번 사는 기쁨

재건주택이 있는 향교골과 논밭뿐인 보름골(1961년)
재건주택이 있는 향교골과 논밭뿐인 보름골(1961년)

훌륭한 기억력을 지닌 사람들의 공통점은 반드시 사물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사람이며, 그것에 집중하고 훈련하는 사람이다. 어떤 사물에 대하여 열심히 알려고 하면 할수록 그 사물은 더욱 잘 기억된다. 그것은 진리이다. -데일 카네기

추억을 찾고 싶어요

“어머님 생전에 한 번 모시고 가고 싶어요.”

지난 봄이었다. 서울에 사는 분이셨는데, 어머님을 모시고 영주에 오고 싶다는 전화였다. 처음 한 말은 국토건설단을 아느냐고 물은 것 같다. 왜 그걸 묻느냐고 했더니, 아버님이 그 일원으로 근무를 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부모님께서 영주에서 신혼을 보내시게 되었고….

“그런데 어떻게 저에게?”

신문사에서 나에게 물으면 혹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며 연락처를 주었다고 한다. ‘길 따라 세월 산책’이라는 글을 연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격주로 쓰는 글이지만, 한해를 넘기다 보니, 영주시가지의 길을 끝내고, 막 풍기읍으로 옮겨가고 있던 무렵이었다.

이 일은 ‘영주문화파출소’라는 공간을 운영하면서 시작하였다. ‘영주문화파출소’는 경찰서가 새 건물을 지어 이건한 뒤, 그 앞 딸려있던 파출소 건물을 고쳐 만든 새로운 문화공간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문화파출소’라고 하니 퍽 생소했던 모양이다. 들르는 사람마다 “뭐 하는 곳이냐?”고 묻는다. 그래서 이 공간도 소개할 겸, 주민들에게 낯선 도로명에 대한 이해도 시킨다는 생각에서 옛날 자료를 찾아 정리를 했다.

처음엔 그냥 ‘길의 역사’였다. 그런데 신문 연재를 준비하면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동네를 돌며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졌는데, 주민들이 자신이 사는 마을의 작은 변화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세월 산책’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글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파트 촌으로 변해버린 향교골과 보름골(2021년)
아파트 촌으로 변해버린 향교골과 보름골(2021년)

기록을 잃어버린 세대

연재는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토박이라는 자만심도 좀 있었지만, 격주니까 준비할 시간이 충분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정년퇴직을 하면서 꿈꾸었던, 지역봉사 속의 여유롭고 멋진 삶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원고 마감에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가장 큰 원인은 정리되지 못한 기록 때문이었다.

특히 해방 이후의 자료는 거의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글을 준비할 때마다, 알만한 이들을 수소문해서 그들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도 자신이 필요한 것만 기억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시외버스터미널 옆에 고가도로가 있었는데, 이태 전 중앙선 철길이 고가철도로 바뀌면서 헐리게 되었다. 그래서 언제부터 있었는지 주변 사람들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엔 10년이 넘는 격차가 있었다. 그 주변 학교를 다닌 친구들에게도 물어보았다. “시기상으로는 우리가 고등학교 때쯤인데….” 하다가 “야! 고가도로는 차만 다니는 길이지. 시내버스도 없던 땐데 어떻게 알아.” 하며 도로 역정을 낸다.

기록물도 이 경우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영주시사』를 뒤져 보았지만, 그 다리가 있었다는 기록밖에 없다. 국토지리원에서 만든 지도도 구해보았다. 하지만 정확한 연대를 알 수가 없다. 예전엔 지리 조사를 하고, 인쇄해서 발표할 때까지 몇 해가 걸렸기 때문이란다.

1970년대-사진
1970년대-사진

변해버리는 강산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사진에 집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필요한 사진은 귀했다. 특히 영주는 더 그랬다. 1961년 영주시가지를 삼켜버린 큰 수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에 덮친 수마에 사람들은 몸만 빠져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사진이나 문서는 물속에 두고 나왔다고 한다. 간혹 맞닥뜨린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 멋들어진 인물 중심의 사진이었다.

그러던 중에 확보한 자료는 국가기록원 사진 자료들이었다. 수해의 상처와 복구를 찍은 기록물이었다. 물속에 잠긴 길, 허물어진 집, 헐벗은 수재민들의 모습…. 그런데 한 사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산 위에 있는 학교는 확실하게 영주여자고등학교인데, 그 사진 속의 모습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히 향교골과 보름골인데, 어디지?’

그 주변에 살았던 사람을 물색해 보았다. 다행히 나보다 한 살 위의 선배가 알고 있었다. 산줄기 하나를 밀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집들이 지어졌고, 얼마 전엔 그 주택마저 허물고 아파트가 들어섰단다.

“초등학교 다닐 때, 몇 년을 두고 불도져가 쉬다가 밀다가 했어. 우리가 그 불도져 위에 올라가 놀기도 했는걸.”

한 살 차이가 무섭다고 했더니, “야 이 사람아. 자네는 산 너머 살았지만, 난 산 위에 살아서 늘 볼 수 있었잖아.” 한다. 그 사진은 수재민들을 위해 재건주택을 지을 향교골의 항공사진이었다. 너무 변해버린 강산은 그 자료를 해석할 기억까지 필요할 지경이었다.

1970년대-사진
1970년대-사진

정리되지 않은 기록들

작년 1월 23일 첫 연재를 시작한 후, 두 해 동안 이리저리 많이도 다녔다. 100년이 되는 세월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곳도 있었지만, 변화해버린 곳도 많았다. 예전엔 새로 짓고, 넓힌 곳이 많았다면, 요즘은 뜯어서 고치는 경우가 많다. 주민들을 위하는 일이니 당연히 해야 한다.

하지만 그 변화에 대한 기록을 어떻게 보관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문화재청에서 진행하는 광복로에서 관사골까지의 근대역사문화거리 사업에 관심이 많이 간다. 보존의 가치를 지키면서 개발한다니, 기록이라는 관점에서 우리가 배울 점이 많으리란 기대 때문이다.

최근 영주문화원에서 근현대사 기록물을 수집하고 있다. 모두가 협조해야 할 바람직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든다. 기록을 관리하는 부서가 있었다면 이 일이 필요 없었을 것이라는….

그리고 기록물의 수집과 함께 자료의 분류와 정리도 중요하지만, 자료 읽기도 중요하리란 생각과 함께, 참 바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제 그 기록물의 내용에 대한 기억을 정확하게 할 수 있는 이들이 줄어들고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사진
1970년대-사진

기억 소환의 즐거움

“아버님은 이미 돌아가셨는데, 어머님께서 그렇게 가고 싶어 하시는 것은 그때 거기서 저세상으로 보낸 누이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그 마을에 대해서 어머님께 들은 말을 떠오르는 대로 말해 달라고 했다. 한적한 마을, 솔숲, 모래펄…. 띄엄띄엄 꺼내놓는 말을 들으며 여기저기를 떠올려 본다. 그리고 1962년, 모래펄, 솔숲이란 말에서 “혹시 지천?” 했더니, “아! 들은 것 같아요.” 한다. 지금 온다고 해도 그 어디에서도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모래펄은 도로와 건물로 메워졌고, 솔숲은 아파트촌으로 변했다.

그 어머니가 영주에 와서 추억의 한 자락을 제대로 잡을 수 있도록 그 마을에 살았던 친구들을 수소문해 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옛날 옛적을 이야기하며 예전의 기억을 소환해 봐야겠다. 우리도 참 즐거울 것 같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인생을 두 번 사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김덕우 작가

1970년대-사진
1970년대-사진
1970년대-사진
1970년대-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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