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정(聖幀) 봉안 날 아침 밥상 9백 상, 구경한 사람 1천 명

성정개모일기 시작 1면
성정개모일기 시작 1면

을해년(1815) 8~병자년(1816) 518일까지 김휘덕의 일기
문선왕(공자), 회헌, 신재, 오리, 미수 등 5위의 영정을 봉안

신재 9세손 주이태, 10냥 가지고 600여 리 걸어서 오다
서원 문밖 행단 좌우에 임시 가옥 20여 곳 만들어 조석 식사

성정개모일기(聖幀改摹日記)는 을해년(1815) 8월부터 병자년(1816) 5월까지 동주(원장) 김희주(金熙周, 대사간, 의성인, 내성망도리)가 문선왕 영정과 회헌·신재 두 분 영정의 개모를 추진할 때 소수서원 유생 김휘덕(金輝德, 선성인, 문단)이 전 과정을 일기로 쓴 소수서원 고문서다.

오늘에 사는 우리는 이 책을 통해 200년 전 우리 선조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중요시했는지를 엿볼 수 있어 그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200년 전 성정 개모를 마치고 봉안 (奉安)하는 날 1천여 명이 참석했다고 하니 이는 동방 역사에 없었던 성대한 행사로 기록되어 있다. 지난 10월 이산서원 이건 복설 준공식 때 도유림(道會) 350명이 참가하여 도유림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라 하였는데, 200년 전 성정 봉안 도회(道會) 때 수백 리 길을 걸어와 1천여 명이 참석했다는 사실은 당시 소수서원의 위상성정의 존귀함을 짐작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일기 내용 중간
일기 내용 중간

회헌(회헌) 영정 모사 시작

병자년(1816) 4.23 비가 종일 내렸다. 유도문이 석교에서 올라왔다. 대평서당(大平書堂)에서 돈 5(3500)을 내어 술을 사 와서 마셨다. 4.24 도청 안협기가 내일 본가에 있는 회헌 영정을 받들고 와서 본원 소장과 참고하여 개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정 개모를 마쳤다. 화공이 영정 머리의 글씨를 쓰도록 독촉하였다.

말을 빌려 빗속에 문단(文丹)으로 보내 서사 유생 김휘덕(金輝德)을 맞이하여 저녁 무렵에 왔다. 4.27 아침 뒤에 비로소 영정 머리의 글씨를 쓰기 시작하였다. 오후에 안응옥(安應玉안이회·안주희·안정황이 문선공 영정을 모시고 들어와 명륜당에 봉안하였다.

본원 소장 영정 족자를 내와서 아울러 걸고 봉심하니, 본원 영정은 살색이 조금 변하였고 본가 소장 영정은 진면목 그대로였다. 이에 화공이 본가본을 가지고 이모하기로 결정하였다.

회헌 안향 영정
회헌 안향 영정

성정(聖幀) 머리 글씨를 쓰다

4.28 성정 머리 글씨를 다 썼다. 비로소 회헌 영정 모사를 시작하였다.

화공 김재정이 김도청과 함께 족자 비단에 비단을 붙이고 또 성정 뒤에 종이를 붙였다.

이날부터 김건종은 오로지 족자를 꾸몄다.

화공이 빨리 돌아갈 작정으로 종일 쉬지 않고 작업을 하여 갑절의 성과를 내었다.

김건종은 명륜당 방에서 모사를 하고 김재정은 일신재 방에서 족자를 꾸몄다.

회헌 영정의 초본(綃本) 작업을 마치고 내일 비단에 올릴 계획이다. 김휘덕이 돌아가려고 하니 화공이 만류하면서 내일 비단에 올린 뒤에 회헌영정 찬문(贊文)을 써야 한다고 하였으므로 그대로 머물렀다. 4.29 회헌 영정을 비단에 올렸다.

신재 주세붕 영정
신재 주세붕 영정

신재(愼齋) 초본을 개모하다

드디어 신재 초본을 개모하고 부본을 내어 틀에 달아놓고 우모시(牛毛柴)와 어교(魚膠)를 달여 윤색하였다.

5.1 회헌 영정 머리 글씨를 썼다. 원장 손사백(孫思百)과 서간발(徐榦發서형렬·홍과·홍익·서간덕이 들어왔다가 오후에 나갔다.

5.3 신재 영정에 비단을 올렸다. 회헌 영정의 족자를 만들었다.

5.7 화천(花川) 가이(加耳)에 사는 양인 공사로(孔思魯)가 소주와 삶은 개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와서 도청에 바치고 건어 두마리를 화사에 폐백으로 올렸다.

5.9 신재 영정의 족자가 이루어졌다. 화공이 돌아갈 날짜가 내일로 다가왔는데 안씨들은 아직 화공 위문을 온 이가 없다. 도청 안협기가 개 한 마리를 가지고 와서 화공에게 대접하였다.

오리 이원익 선생 영정
오리 이원익 선생 영정

화공(畫工)이 떠나는 날

5.10 묵본 영정 족자가 이루어져 새로 만들 4건의 족자를 일신재에 걸었다. 또 오리(梧里, 이원익미수(眉叟, 허목) 두 선생 영정을 명륜당에 걸었다. 고을 사람으로 온 자들과 동시에 참배하니 실로 우리 동방에 일찍이 없었던 성대한 일이다. 내일이 바로 화공이 돌아가는 날이다.

세목(細木) 2, () 2, 백지 20, 건문어 2마리, 건대구 2마리, 건홍어 2마리, 전복 2, 생청 3, 230(1600만원)을 화공의 폐백으로 마련하고, 30냥으로 고을에서 말 3필을 빌렸다. ()의 빚 200냥을 3푼의 이자로 빌려왔는데도 화공을 돌려보내는 데 드는 자금이 부족하니 안타깝기 이루 말할 수 없다.

5.11 화공이 떠났다. 모든 재료구입에 든 비용이 310(2천만원)여 냥이다. 동주와 고을 장로들이 경렴정에서 송별하였다. 김도청이 두 화공을 데리고 소혼대(消魂坮)에 올라 말하기를 이곳이 바로 옛사람이 작별하던 곳이다하고 술과 안주를 갖다 놓고 권한 뒤에 작별하였다.

5.12 봉안 도회(道會)18일로 정하고 좌우도에 통고하였다. 5.13 저물녘에 좌도 수전도청 사촌(沙村) 김해진이 의성·군위·비안·하양·경산·자인·신령·영천·대구·청도 열 고을에 배정된 돈 62냥을 거두어 그의 집 종을 직접 보내 전달하니, 그 부지런함과 능력이 가상하다. 그런데 청송은 흉년이 들었다는 이유로 보낼 의사가 없다고 하였다니 개탄스럽기 그지없다.

5.15 성주 도청 진사 이형진(李亨鎭)이 성주·개령·금산·지례의 돈 20냥을 거두어 그 집 종을 보내 전하였다. 3백리 먼길이니 그 부지런함과 능력이 가상하다.

5.16 여천(呂泉) 변시협·병산서원 원장 유광조, 풍기 김세목, 원장 김시련 등이 도회 참석차 도착하였다.

미수 허목 선생 영정
미수 허목 선생 영정

성정(聖幀) 봉안 전날

도회(道會)가 내일로 다가왔다. 도내 유림들이 어제부터 많이 왔다.

조석 식사를 서원에서 장만하여 접대하는 것이 어려움이 있어 읍내에 사는 사람 10명을 불러 1상에 5(700)으로 값을 정하고 서원 문밖 행단 좌우에 임시 가옥을 만들어 오늘부터 거행하기로 하였다.

임시 가옥마다 유사 2,3명을 정하여 주관하고 살피게 하였다.

먼저 일기유사(日記有司)에 유학 김재욱과 진사 서성렬, 접빈유사 홍과·허순 등 52, ·담배 담당에 각각 5인을 정하여 서원 벽에 차례서를 써 붙이고 각각 임무를 보게 하였다.

임시 가옥 20여 곳을 배열하였고, 매 가옥마다 30여 상씩 차리도록 하였다. 오후에 새로 모사한 영정을 일신재에 걸었다. 처음 도착한 사람들로 하여금 건복(巾服, 옷과 갓)을 차려입고 참배토록 하였다.

저물녘 칠원 유생 주이태(周以泰)가 신재의 9세손으로 돈 10냥을 가지고 600여 리 먼 길을 왔다. 감탄하고 칭송할 일이다. 이날 도내 유생이 매우 많이 와서 일기에 기록하기 어려워 시도유사 6인에게 행단 밖과 제월교 가에 나누어 시도기에 빠짐없이 기록하도록 하였다. 이날 저녁 식사로 800여 상이 나갔다.

성정 봉안 및 도회(道會)

병자년(1816) 5.18일은 영정 봉안하는 날이다. 아침 전에 명륜당에서 당회를 열고 봉안할 때 집례(執禮)로 상주의 남한호, 조사(曹司)에 본향 서동렬·성문교, 봉영정(奉影幀)에 김영하·진사 서성렬·진사 박종교·생원 윤도종을 뽑았다.

또 회헌위 봉영정에 이해옥·김재정, 신재위 봉영정에 박춘형·주이태, 오리(梧里)위 봉영정에 김원명·권재장, 미수(眉叟)위 봉영정에 이천호·이휘련을 뽑았다. 또 봉향에 김재인·황석린, 봉로에 생원 김석련·유학 손진일을 뽑았다. 차례로 이봉하여 명륜당 위차에 게시하였다. 여러 현인들의 영정도 그 아래로 서쪽 벽에 걸었다.

선비들이 대열을 지어 서고, 동주(김희주)가 분향례를 행하였다. 향교 집사가 네 번 절하도록 외치니 뜰에 가득한 선비들이 모두 엄숙히 절하면서 누구하나 실례하는 사람이 없었다. 예를 마치고 재생들이 차례로 마루에 올라 봉심하되 건복을 갖추어 입지 않은 자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도회(道會)를 열다

아침 식사 후에 도회를 열었다. 동주와 성언근·김청하와 도내 장로(長老)들이 주석에 앉았다. 집례 남한호가 도회 조사 권재정·정광주·김휘덕·유명철을 정하고 공사원에 생원 이장우·유학 김영희를 의망하여 뽑았다. 상읍례를 마치고 열읍 유림의 부조가 도착하지 않은 건으로 통문을 보내기로 결의하고, 제통(製通)에 유학 김재인, 사통에 생원 박시인을 정하였다.

또 욱양서원에 대하여 도내에서 다같이 높이는 일로 통문을 보내기로 결의하고 제통에 권재장 사통에 박정순을 정하였다. 이윽고 개좌를 마쳤다. 도내 인원들이 차례로 흩어져 돌아갔다. 오후에 영정실에 봉안하였다.

이날 아침에 차린 밥상이 9백여 상이었다. 좌우도와 기호와 관동의 선비들도 멀리서 소문을 듣고 와서 서원 문 주위로 둘러서서 구경한 사람이 1천여 명이나 되었으니, 이는 실로 전에 없었던 성대한 일이었다. 주이태가 원중의 고적을 열람하기 위해 남아 있으면서 저물녘에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동주와 고을 장로에게 올렸다.

또 도청에 인사하기를 이토록 수고하여 큰일을 마쳤으니 감사하고 두려움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먼 곳에 사는 잔약한 후손이 도움을 드리지 못하니 부끄러움과 한스러움을 어찌 다 말로 하겠습니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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