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골짜기 따라 난 단산로, 무릉도원을 숨겨둔 자개봉

구두들
구두들

길이 없으면 길을 찾아야 하며, 찾아도 없으면 길을 닦아 나아가야 한다.-아산 정주영

단산로는 동촌로터리에서 순흥으로 가는 회헌로에서 갈라져 단산천을 따라 단산면 소재지에 있는 옥대삼거리로터리까지 가는 길이다. 여기서 소백로를 만난다. 그리고 영단로는 영주와 단양을 잇는 길인데, 단산교회에서 소백로와 갈라져 좌석리와 마락리를 지나 의풍삼거리에서 영부로와 만난다.

권득평 가문에 전해 오는 술잔
권득평 가문에 전해 오는 술잔

두 산줄기 사이로 흐르는 단산천

단산로에 들어서면 두 산줄기를 만난다. 서쪽의 산줄기는 국망봉에서 뻗어내려 소수서원 앞을 지나 백산서원에서 끝난다. 그리고 동쪽의 산줄기는 자개봉(紫蓋峰)에서 출발하여 문수면 승문리에서 내성천을 만나는 자개지맥이다.

이 지맥은 부석면과 단산면을 이어주는 ‘그까무재’를 지나 ‘구두들’ 들판을 감싸고 돌면서 ‘대마산’을 넘어, 봉화와 영주를 잇는 ‘샆재’와 흑석사, 유릉산을 지나는 영주에서 가장 긴 산줄기이다. 철탄산도 이 지맥에서 갈라져 나온 산이다.

권득평 효자각
권득평 효자각

이 두 산줄기 사이로 단산천이 흐른다. 단산천에 가면 겨울에 천도(天桃)를 얻은 효자 이야기가 떠오른다. 집이 너무나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어서 어머니가 거의 돌아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시름시름하며 복숭아가 먹고 싶다고 했다.

효성이 지극한 아들은 매일 아침 냇가에 나가 몸을 씻고 기도를 드렸는데, 간절한 기도 덕인지 겨울에 복숭아 꽃잎이 떠내려왔다. 그래서 물길를 거슬러 오랐더니 복숭아 밭이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께 복숭아를 드리고 다시 그곳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많이 전해지는데,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산은 자개봉(子開峰)이다. 자시(子時)에 열리는 봉우리란 의미이다. 단산의 자개봉(紫蓋峰)과 한자는 다르지만, 자개봉 뒤편에 도화마을이 있다는 것도 재미가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더 신빙성이 있는 것은 동원리에 권득평효자비가 있는데, 그 가문에는 복숭아 술잔이 전해져 온다는 것이다.

홍중문 홍살문
홍중문 홍살문

단산천 따라 난 단산로

“예전엔 하천 따라 가는 오솔길이었지요. 그런데 1960년대 초쯤이었을 거예요. 우리 마을에서 대학생시절 농촌봉사활동을 했던 인연이 있는 전동호의장님 36사단에서 중장비를 빌려와 길을 내 주었지요.”

파회(바우)에서 만난 김재돈(71)은 어렸을 적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예전엔 단산천이 더 넓었는데, 그때 둑길을 내며 하천이 좁아졌다는데, 마을 앞 논도 그래서 생긴 것이란다. 그리고 사천까지 합승이 다닌 것도 그 무렵이었다고 술회(述懷)한다.

단산천 따라 들도 넓다. 그래서 형성된 마을도 많다. 학교도 두 곳이나 있었다. 구구초등학교와 단산초등학교이다. 하지만 두 학교는 모두 폐교가 되었다. 단산은 1994년에 구구는 1999년에 없어졌다. 이제 아이들은 면 소재지인 옥대초등학교까지 가야 한다. 하지만 이젠 그곳도학생이 없어서 위기라도 한다. 이제 고인이 되었지만, 10여년 전에 단산면장을 지냈던 이무식 형이 “올해 우리 면에 출생신고가 한 건도 없었다”는 말이 문득 생각이 난다.

구구초등학교
구구초등학교

아홉 개의 낟가리

거북이 머리 모양이라 하여 ‘구두(龜頭)들’이라는 설도 있는데, 아홉 개의 낟가리에서 유래되었다는 옛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이성계의 부장을 지냈던 ‘이억’이란 분이 있었는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자 낙향해 버렸다고 한다.

이성계는 다시 돌아오기를 권했으나 끝까지 나가지 않자, 아홉 고을의 식읍을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억은 그것조차 받지 않아서 이 들판에 ‘아홉 개의 낟가리’가 해마다 쌓이게 되었고, 그래서 ‘구두들’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병산리 갈참나무
병산리 갈참나무

그리고 이 어디쯤 구고사(九臯伺)가 있었다고 한다. 영조29년(1753년)에 구고서당을 창건하고 정조10년(1786)에 구고사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고종5년(1868)에 헐렸다. 그리고 1922년에 복설되었는데, 현재 사천1리로 이건했다고 한다. 여기서 구고라는 말은 ‘학이 구고(九皐)에서 우니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는 시전(詩典)에 있는 말이라고 한다.

구구리를 지나 ‘배나무실’로 간다. 거기엔 ‘홍중명효자문’이 있기 때문이다. 이 문은 경종4년(1724년) 갑진년에 홍유한의 조부인 홍중명이 하사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 문(門)이 이곳에 오게 된 것은 홍유한 때문이다.

홍유한은 유교와 불교에서 발견하지 못한 진리를 가톨릭에서 발견하고 1757년 고향 예산으로 다시 내려가 1775년까지 18년간 혼자 공부하다가 1775년 더 조용한 곳을 찾아 이곳에 와서 1785년 6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신앙심을 키웠다고 한다.

홍살문 안에는 홍중명 비석이 있었다. 그런데 그 뒤에 있는 집은 좀 생뚱맞았다. 고가가 있으려나 했는데, 1970년대 시멘트벽돌집이었다.

옥대삼거리 로타리
옥대삼거리 로타리

병산리 갈참나무

병산리 갈참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85호이다. 높이 15m, 가슴높이 둘레 3m인 이 나무가 천연기념물이 된 것은 학술적 가치 때문이라고 한다. 천연기념물인 수목 중에서 느티나무나 은행나무 노거수는 여러 곳에 흔히 있지만, 갈참나무 노거수는 드문 편이어서 더 가치가 있다고 한다.

매년 정월 보름에 이 나무 아래서 마을 사람들이 길복과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내고 있는 이 나무는 황전(黃纏)이 1426년(세종 8) 이 마을에 와서 심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왜 이 나무에서 동제를 지낼까? 황전이 이 나무를 심은 것은 흉년이 잦았던 그 시절에 구황(救荒)의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은 알고 있지 않을까?

갈참나무를 지나니 폐교가 보인다. 단산초등학교이다. 날씨처럼 을씨년스럽게 보인다. 그리고 단산면 소재지인 옥대리로 들어선다. 옥대삼거리에 만든 로터리는 지날 때마다 헷갈린다. 그러고 보니 요즘 로터리가 부쩍 많아진 것 같다. 그런데 이 로터리들이 편하지만은 않은 것은 로터리가 크기도 하지만 길이 좁기도 하다는 생각도 든다. 새로 만든 소백산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요즘 새로 생긴 맛집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다.

소백산자락길 여행자 숙소
소백산자락길 여행자 숙소

좌석 가는 길

소백산생태탐방원을 지나 자개봉을 옆에 두고 좌석리로 간다. 여기서부터 ‘소백산자락길 11자락’이다. 소백산자락길 여행자숙소를 만들며 운영하던 때가 주마등처럼 스친다. 이곳도 옥대초등학교 좌석분교가 있던 자리이다. 폐교를 그나마 잘 활용하고 있는 곳이다.

좌석 3거리에서 상좌석으로 향한다. 최후의 의병장 김상태가 체포된 곳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1911년 6월 14일 오전 1시 순흥군 단산면 광암리 소백산 기슭에서 일본군 밀정의 제보로 체포되어 동년 9월 21일 대구형무소에서 순절하니 향년 50세였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단산면 광암리’를 찾을 수 없었다.

좌석(너른바위)
좌석(너른바위)

그런데 영주시사 지명유래편에서 ‘너븐바우ㆍ광암(廣岩)’을 찾을 수 있었다. 좌석 북쪽에 있는 마을로 넓은 바위가 있으며 다섯 집이 살고 있었으나 6.25동란 때 소개 당하였다가 다시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바위는 좌석리 472-4번지에 있었다.

그런데 주변은 새롭게 변신하고 있었다. 새롭게 지은 집들이 많았는데, 거의 별장같이 보였다. 문득 구제역이 휩쓸고 지나갔던 2010년이 생각났다. 그때 대한민국 최고의 종우(種牛) 한 마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우사(牛舍)가 이곳이 아니었던가. 최선의 자리를 찾아왔던 의병장은 여기서 잡혔지만, 또 다른 의미의 최선을 찾아온 사람들에 의해 별장촌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김덕우 작가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