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정이 낡아 새로 그리는 과정을 쓴 일기「성정개모일기」

「성정개모일기」 반환기념(2021.11.12)
「성정개모일기」 반환기념(2021.11.12)

매학당 종택 소장 「성정개모일기」 소수서원에 반환
개모를 주도한 사람, 김희주 동주(의성인, 형조참판)
70 고을에 통문하여 재정 사정을 알리고 부조 요청

「성정개모일기」 겉표지
「성정개모일기」 겉표지

2021년 11월 12일 부석면 보계리 소재 매학당(梅鶴堂, 金鍌, 1596~1660) 종택 소장 소수서원 고문서 「성정개모일기(聖幀改摹日記)」 1책이 소수서원에 반환됐다.

「성정개모일기」에서 성정(聖幀)이란 문선왕(文宣王, 공자)의 영정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회헌(晦軒)·신재(愼齋)의 영정(影幀)을 포함하고 있다.

개모(改摹)란 비단이 낡고 단청이 벗겨져 다시 그린다는 뜻이며, 「성정개모일기」는 성정을 개모 할 때 일의 발단에서부터 완성하여 봉안할 때까지의 과정을 쓴 일기이다.

일의 발단

을해년(1815) 8월 호평(虎坪) 김참판(金參判, 희주熙周, 의성인, 1760〜1830, 내성 망도리)이 본원의 동주로서 10월 초에 형조참판으로 임명되어 가는 길에 서원에서 묵게 됐다.

이튿날 아침 문선왕·회헌·신재의 영정을 참배한 후 ‘비단이 낡고 색이 바랜 것’을 걱정하면서 자리에 있던 고을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는 5백 년 된 진본입니다. 비단이 낡고 단청이 벗겨졌으니 지금 개모하지 않으면 우리 동방 성인의 영정을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개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모두 말하기를 “이는 우리 고을 선배들이 백 년 동안 논의해온 일로서 손땔 겨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일이 거창하여 지금까지 미루어 왔던 것입니다”고 말했다.

「성정개모일기」 속표지
「성정개모일기」 속표지

개모 준비 단계

11.6. 김참판이 소수서원 강소 훈장 김낙안(金樂顔, 선성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영정 개모에 대하여 대신들에게 품의하여 주상에게 아뢰도록 하니 대신의 말이 ‘문선왕 영정에 대하여 도감(都監)을 설치한 일이 있었다. 하물며 이 영정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애당초 조정에 사유를 고한 일이 없었고, 회헌 본가에서 본원으로 옮겨 봉안하였으므로 개모하는 데 조금 미안한 단서가 있지만, 진상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으니 즉시 개모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일리가 있는 듯합니다.

봄 날씨가 따뜻해지기를 기다려 즉시 개모하겠습니다. 이는 실로 원중의 성대한 일이니 이 편지를 원임 여러분들에게 돌려 보여주는 것이 어떻습니까?” 11.23.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500년 못한 일 지금 이루니 사문의 큰 행운이다” “개모 소식을 듣고 나도 모르게 그쪽을 바라보게 되었다”

70 고을에 통문하다

12.6. 보내온 편지에 “개모 일을 하게 되면 회헌·신재 두 선생의 영정도 똑같이 훼손되었으니 물력이 많이 들어간다고 해서 그대로 둘 수 없다. 향중과 논의하여 알려 주기바란다”

12.12. 서울로 보낸 편지에 “동주에게 품의하여 일의 지속과 여부를 알아보기로 했다”

12.16. 서울서 보내온 편지에 “서원 재정 형편이 애당초 두서가 없으니 도움을 구하여 충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생각에 70 고을에 통문을 내어 충당하기로 한다면 5,6백량은 얻을 수 있으나 사람의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고 일을 시작할 즈음에 들어가는 비용도 적지 않으니 장차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추수로 들어오는 것을 봉하여 두었다가 십분 절약하여 쓰고 나누어 보충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병자년(1816) 1.8. 편지에 “태학에서도 일을 중하게 여기는 도리상 한 번의 큰 모임을 열지 않을 수 없으니, 날짜를 정하고 인근 4,5 고을에 통문을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70 고을에 유림 부조를 배정하고, 열읍의 수전도청(收錢都廳) 15명을 정해 보냈다. 성균관 통문에 팔도에서 물자를 도와 보내는 내용이 들어 있다.

공자 영정(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 소수박물관 소장)
공자 영정(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 소수박물관 소장)

당대 제일 화공 김건종

1816.1.13. 편지에 “근자에 화공 김건종(金建鍾)을 만나보니 이 시대의 제일이었고, 그 또한 기꺼이 달려가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다만 들어갈 비용이 많아 비단과 여러 가지 채색에 거의 40민(緡) 가까이 들어갑니다. 이 또한 넉넉히 계산해야 할 것입니다”

1.16 향중에 수의하니 각소(各所)와 각 당동(堂洞)에 돈을 분배하고 또 열읍에 통문을 보내는 일로 도산서원, 이산서원, 삼계서원, 문암서원, 욱양서원에 편지를 보내 명첩을 구하는 것으로 하였다. 도산서원은 수복(首僕)이 명첩과 회답을 가지고 왔다.

2.2 본향 각소 임원 모임을 열고 개모도감(改摹都監)으로 본향 진사 성언근(成彦根, 1740~1818), 안동현감 김희택(金熙澤) 2명을 의망하여 뽑고, 개모도청(改摹都廳)으로 서홍윤(徐弘胤)·김낙안(金樂顔) 2명을 개모에 관한 모든 일을 주관하게 했다.

1.14 온 편지에 “영정 족자가 오래 보존되도록 하는 길은 오직 배접을 잘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채색 화본(畵本) 화공의 행자로 서울에서 소요되는 비용이 50금에 이를듯합니다”

화공이 도착하고

3.26 저녁 무렵에 동주 행차가 도착하였고 예안의 응교 이구운(李龜雲)과 하양현감 이구성(李龜星)이 동행하였다. 화사(畵師) 2인도 함께 왔는데 하나는 도화서 주부 김종건이고 하나는 주부 김재정(金載鼎)이었다.

경렴정(景濂亭)으로 안내하여 자리를 잡았으나 졸지에 음식을 마련할 수 없어 변변치 못한 술과 안주로 대접하게 되니 주인으로서 두려운 마음 이길 수 없었다. 안주목사 안정선(安廷善) 20냥, 안윤승 20냥의 부조 단자와 안주 정랑 안윤승·현감 안임권·좌랑 안매권 16냥 부조 통문을 내놓았다.

3.28 그리는 도구를 설치하는 일에 대하여 화사와 상의하니 급히 목수를 불러 화기(畵機)를 만든 뒤에 비단을 걸고 일을 시작할 수 있다 하였다. 일부석(一浮石), 이부석(二浮石)에서 바친 판재는 모두 생나무를 켠 것으로 품질이 나빠 쓸 수 없어 송류동(松溜洞)으로 가서 판재하나를 매입하여 즉시 목수를 불러 일을 시작하였다.

3.29 아침에 화공이 본가에 편지를 보내 금니(金泥), 사향(麝香), 소뇌(小腦) 값 10냥을 관청 인편에 보내려고 하면서 직접 만나서 부탁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5성과 10철을 그리다

4.1 아침에 우모시(牛毛柴)를 끊어 비단면에 발라 윤색했다. 문단 김도청의 집에 하인을 보내 큰 병풍과 화연(畵硯)·장척(長尺)·전반(剪盤)을 빌려왔다. 오후에 화상의 궤를 내어 왔다. 새로 만들려고 하였으나 재료를 얻기 어려웠다.

4.2 화사가 부석사를 보고 싶다 하여, 청평(靑坪)에서 2전으로 말 1필을 빌리고 김도청의 말 1필을 이용하여 갔다. 각 별임이 동행하였고 서원 수복 오윤옥도 수행하였다.

4.3 식후에 어교(魚膠)를 달여 비단면에 발랐다.

4.4 식후에 뜰과 섬돌과 마루와 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김도청과 두 화공이 선성의 영정을 받들어 일신재(日新齋)에 모셨다. 유지본을 모사하기 시작하였다. 두 화공이 서로 돌아가면서 작업을 하는데 온 정신을 다 집중하여 털끝만치도 방심하지 못하였다. 종일 모사한 것이 5성과 10철을 그렸다.

모사 마치고 비단에 올리다

4.6 유지본(油紙本)을 모사하여 거의 다 완성하고 내일 비단에 올리기로 하였다.

4.7 모사를 마치고 정오에 비단에 올렸다. 4.8 화사 김재정이 병이 나서 뜻대로 모사하지 못하였다.

4.9 화사의 병이 차도가 없어 의원 이지영(李之英)을 불러 진찰하고 약을 짓도록 하였다.

4.10 정오에 동주가 두 아들 재공(載恭)·재양(載讓)을 데리고 들어왔다. 고을 장로들이 경로회에서 와 경렴정(景濂亭)에 앉아 동주를 만나 보기로 하였다. 향교에서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화공에게 대접하였다.

4.11 정오에 부사가 아우와 조카를 데리고 와서 사당을 참배하고 영정을 첨알하고 돌아갔다.

4.13 열읍에 배정한 돈이 한 곳도 도착한 것이 없어 동주와 임원들이 상의하여 다시 70고을에 통문을 보내기로하고 각읍 도청에서 글을 짓도록 하였다.

4.14 동주가 의성 현감 유심춘(柳尋春)과 자인 현감 허형(許珩)에게 편지를 보내 넉넉히 도와 주도록 부탁하였다.

4.15 안정환이 열읍에 보낼 편지를 가지고 나가기에 내일 떠나도록 하고, 가는 곳마다 배정된 돈을 속히 보내오도록 독촉하고 지나는 길에 도청을 방문하여 시급하므로 속히 거두어 보내도록 당부하라고 부탁하고 전송하였다.

4.16 김휘덕(金輝德)을 영정 머리에 글씨를 쓸 유생으로 정하고 비가 내리는 중에 종과 말을 보내 맞이해 오게 하였다.

4.22 내죽서당(內竹書堂) 임원이 개고기를 삶고 술을 사서 산장과 모인 사람들의 간식으로 가지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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