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복위의거 후 충절공과 그 후손들이 남긴 행적과 글

권산해, 사육신 사건 후 자결·이수형, 벼슬 버리고 순흥부 낙향
삼절당, 양천허씨 3대 추모지소·대평서당, 희생된 65家 제향
우계인 이기륭·이명희 순흥부사, 3층 단을 쌓고 융숭한 제사

순흥에서 ‘단종복위 의거’가 일어난 지도 어언 564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이 참사(慘事)는 조선사(朝鮮史) 중 가장 참혹한 사건이었지만, 사건의 전모는 숨겨졌고, 역사는 ‘조선왕조실록’까지 은폐, 왜곡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한 고을이 통째로 불태워 없어지고, 죄 없는 민초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는 가만있지 않았다. 충절공들과 그의 후손들은 당시의 참상을 기록으로 남겼고, 현대의 후손들 또한 선조들이 남긴 흔적을 모아 그날의 역사를 후세에 전하고 있다.

죽림선생실기
죽림선생실기

죽림선생실기

죽림(竹林) 권산해(權山海, 1403∼ 1456) 선생은 문종(文宗)의 손위 동서이면서 단종의 이모부로 성삼문, 박팽년 등과 교유하였으며 사육신 단종 복위 사건이 실패로 돌아가자 뒤따라서 자결했다. 공의 포부는 금속같이 굳었고, 절개는 화살같이 발랐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경주 운곡서원과 예천 노봉서원에 배향됐다. 서문은 정재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이 지었다.

도촌선생실기

도촌선생실기(桃村先生實記)는 단종 절신 이수형의 절의(節義)를 대사간 이헌경(李獻慶,1719〜1791)에 의해 지어진 글이다. 이수형은 고려 절신 이억(李薿)의 현손이기도 하다.

도촌(桃村) 이수형(李秀亨, 1435〜1528) 선생은 21살에 단종 임금이 왕위를 빼앗기자 분연히 벼슬을 던지고 순흥부 도촌(현 봉화 도촌1리)으로 낙향해 숨어 살았다. 공은 이곳 출신인 문절공 김담(金淡)의 사위로 처가 곳이기도 하다. 도촌에 내려와 공북헌(拱北軒,북향집)을 짓고 94세까지 수(壽)하면서 일편단심 단종 임금만 받들었다.

공은 영월의 초혼각(招魂閣)에 이름을 올리고, 동학사의 숙모전(肅慕殿)에도 김시습 다음으로 이름이 봉안되었다. 김시습, 이맹전, 조여 등은 함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킨 사람이다.

공복헌(拱北軒, 봉화 도촌)
공복헌(拱北軒, 봉화 도촌)

삼절당기(三節堂記)

삼절당은 단산면 사천2리 속칭 띄기 마을에 있는 양천허씨 3대 허방(許邦), 아들 윤공(允恭), 손자 지(智)의 충절을 기리는 사당이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비분강개하여 3대가 영월로 순흥으로 낙향해 평생 충절을 바친 인물들이다.

「그때 낭천 현감으로 있던 석헌(石軒) 허방(許邦)은 벼슬을 버리고 영월로 달려갔다. 청령포가 가로막혀 연락이 끊어지니 달려가서 단종을 모실 수 없는 형편이었다. 곧 엄흥도와 모의하여 바가지에 밥을 담고 강을 건너가서 단종의 어공을 이어가게 했는데 단종이 사사 당하자 엄흥도와 더불어 관곽(棺槨)을 갖추어 영월의 산 양지바른 곳에 장사지냈다.

삼절당
삼절당

아들 윤공(允恭)은 단종과 금성대군을 잇는 생명줄을 자처하여 금성대군이 써준 밀지(密旨)를 단종에게 전하고, 단종이 써준 밀지를 금성대군에게 전했다. 금성대군을 도와 거사를 주획(籌劃)하고 격문(檄文)을 초(草)하는 등 단종복위 의거에 적극 가담했다.

손자 보령 현감 지(智)도 영월로 가던 도중 병을 얻어 위독해지자 의관을 정제하고 단종이 있는 영월을 향해 네 번 절한 후 “나를 영월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는 유언대로 영월의 동쪽 계족산(鷄足山) 기슭에 잠들었다.」

삼절당은 허방의 후손 준(準)이 1876년 편액을 걸었고, 1937년 종손 용규가 현재 모습으로 건립했으며, 유학자 권상규(權相圭,1874〜1961)가 기를 지었다.

대평서당기
대평서당기

대평서당기(大平書堂記)

대평서당기는 퇴계의 9대손 이야순(李野淳,1755~1831)이 1822년 대평서당에 와서 정축년에 희생된 65가구의 원혼을 위로하는 제사 모습을 보고 감동해 적은 글이다.

「아! 그 옛날 정축년(1457) 변란에 죽계 일대에 65가구가 모두 뒤섞여져 뜻밖의 죽임을 당한 것은 가히 천고에 들어본 적조차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금성대군과 부사 이보흠의 죽음은 그래도 이름만은 남았지만 저 65가의 억울한 죽음은 무슨 죄가 있었겠습니까? 바람결에 떠돌아다니는 흩어진 원혼들은 추위에 떨고 굶주림의 세월을 보낸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측은한 마음으로 애절하게 생각했지만 수백 년이 지난 그날은 아직도 두려워하고 있다.

따라서 한 잔의 술과 한 그릇의 밥으로 제사를 지낼 사람 감히 누가 있겠는가. 아! 죽계 곁에 대평서당(석교1리 서당마을)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안동권씨와 전주류씨가 터를 잡고 대대로 살아온 곳이다. 모두 옛날을 숭상하고 의를 가까이하는 풍모가 있는 가문들이다.

마침내 매년 곡식을 조금씩 모아가지고 해마다 서당에서 원혼에 제사를 올렸다. 제사를 올리는 날은 부근의 주민들도 참석하여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소수유물관)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소수유물관)

금성단기(錦城壇記)

금성단기는 우계인 이기륭(李基隆,1667〜1751)이 1720년 3월 한식일 단제를 지내던 날 지은 글이다.

「1719년(숙종45) 8월 기망(旣望,16일)에 내가 순흥향교와 소수서원 사이에 있는 제월교(霽月橋)를 지나다가 다리 옆에 황폐한 밭의 들풀 틈 속에 허물어진 담장과 옛 집터가 있었던 흔적을 보고, 그곳이 바로 금성대군의 유배지였음을 직감하고 다리 옆에 말을 세워두고 풀을 헤치고 앉아서 둘러보니 벽혈(碧血)을 뿌린지 많은 세월이 흘러 거친 잡초만 우거진 채 폐허의 땅이 됐다.

슬퍼서 참아 눈뜨고 볼 수가 없어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줄도 몰랐다. 그길로 부사 이명희(李命熙)를 찾아가서 실상을 이야기하니 그는 내말을 듣고 슬픈 안색을 지었다. 이튿날 가마를 타고 그곳에 이르러 나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럴 수가 있느냐? 혼령을 위로하는 절차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관아에서 경내 장정들을 동원하여 조그만 단(壇)을 쌓았다. 단은 삼층으로 쌓았는데 상층은 금성대군의 혼령을 모시는 층이고 중간층은 부사 이보흠을 모시는 층이며, 하층은 당시 순절한 민초들의 층이다. 진실한 제수가 가지런하고 융숭하였으며 행사의 절차와 모양이 큰 향사를 치루는 듯하였다. 그날 밤하늘은 맑게 개이고, 새벽 별빛은 찬란하여 숙연하기가 그지없었다.

지금까지 편히 눈감지 못했던 혼의 존례를 마치고 돌아오니 부사께서 “오늘 행사는 세상에서 드믄 일이기에 매년 거행함이 옳다”고 했다. 단을 관리하는 사람을 두기로 하고 항상 주변을 청결히 하고, 매년 청명일에 존례를 올리도록 규약을 정하고 후인들이 따르도록 조치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러한 경사스러운 일도 있구나! 천고에 드문 아름다운 일이 우리 부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했다.」

금성대군선인신단지비(금성단)
금성대군선인신단지비(금성단)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

금성대군의 단석 옆에 성인신단비(成仁神壇碑)가 세워져 있다. 성인비는 비의 전면에 「유명조선단종조충신(有明朝鮮端宗朝忠臣)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錦城大君成仁神壇碑)」라고 2줄로 종서하고 비의 후면과 측면에 비문을 새겼다. 비문은 영조(英祖) 18년(1742) 경상도관찰사 심성희(沈聖希)가 찬하고 세자 우부솔 송문흠(宋文欽)이 썼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의 휘(諱)는 유(瑜)요 세종의 6남이며, 단종의 숙부(叔父)라 단종이 이미 손위(遜位)하고 공의 집에 순거(巡居)했더니 얼마 후에 성삼문 등 육신이 죽고 단종은 영월로 보내고 공은 순흥에 안치되니 공이 부사 이보흠(李甫欽)으로 더불어 충의를 교결하고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또 죽으며 나중에 사인(士人)도 많이 연좌되어 죽고 드디어 순흥부를 혁파하니 실은 육신이 죽은 지 다음해 정축(丁丑)년이라 공의 사건 본말은 장능지와 모든 야사에 대개 기록되었으나 그 자세한 것은 전하지 않는다.

희(噫)라 이 때를 당하여 천명이 이미 정해져 있고 인심도 돌아가거늘 공이 왕실의 지친으로 순종했으면 부귀 존영이 자연 있을 것이거늘 이에 소사에 진충하고 어려운 일에 힘써 도거정확(刀鋸鼎鑊)의 형벌을 달게 받으니 진실로 취사(取舍)의 의에 깊이 밝지 않았다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이 했겠는가. 그 정충대절(精忠大節)이 가히 일월로 빛을 다툴만하다고 백세 지하에 풍문을 들어도 오히려 사람으로 흥기하게 하니 아! 열열하도다. 이하 줄임」

「단종복위의거」를 마무리하며

「단종복위의거연구회」가 출간한 ‘단종복위의거(2007)’ 내용 중 중요 부분을 재편집해 4회에 걸쳐 연재했다.

이 책자를 편집한 류창수 향토사연구가는 “우리 고장 이곳저곳을 다니며 단종복위 의거와 관련된 대략의 자료를 한자리에 모았지만 아쉬움이 많다”며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먼저 격에 맞는 숭모전 건립, 충절을 지킨 인물의 유적지 관리, 사건과 관련 유물전시관 건립, 금성단 성역화 사업의 조속 추진 등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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