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축지변 후 조선왕실의 움직임과 우리고장 단종절신들

금성대군 추모지소 금성단
금성대군 추모지소 금성단

1457년 금성대군 죽음 앞에 조선왕실은 큰 충격과 슬픔에
금성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한 아미타불이 흑석사에
정축지변 전후 낙향·정착한 우리 고장 단종 절신 22명인

국보 제282호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국보 제282호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단종 복위 의거는 조선사(朝鮮史) 중 가장 참혹한 사건으로 역사적으로는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 부른다.

1457년 단종복위 의거 실패로 6.27 순흥도호부가 혁파되고, 10.21 금성대군은 안동서 사사(賜死)되고, 10.24 단종은 영월에서 죽임을 당해 승하(昇遐)한다.

이 무렵 효령대군을 비롯한 조선 왕실 사람들은 금성대군과 그와 함께 희생된 사람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미타불상을 조성한다.

세월이 흘러 2007년. 단종복위 의거 충절공 후손들은 연구회를 조직하여 그날의 흔적들을 찾고 또 찾고 찾아 작은 조각을 모았다. 여기에 ‘충절을 지킨 우리 고장 인물들’의 이름을 수록한다.

금성대군 추모 아미타불을 봉안한 흑석사
금성대군 추모 아미타불을 봉안한 흑석사

의거 실패 후 조선 왕실의 움직임

조선의 왕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왕은 세종(1397~1450)이고, 가장 불행한 왕은 세종의 손자 단종(1441~1457)이라고 말한다. 세종의 아들이자 단종의 숙부였던 세조(1417~1468)는 억불숭유 정책 속에서도 불교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긴 했지만 부처님의 자비와는 거리가 먼 듯 조카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다.

1457년 순흥에서 일어난 정축지변으로 유명을 달리한 금성대군의 죽음 앞에 조선 왕실은 큰 충격과 슬픔에 잠기게 된다. 당시 왕실의 큰 어른인 태종의 후궁 의빈 권씨를 중심으로 금성대군이 열반(涅槃)의 세계로 갈 수 있도록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모아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조성하기로 한다. 이를 위해 권선문(勸善文)을 돌려 널리 존귀한 사람과 미천한 사람들에게 고하여 그들의 도움으로 열반의 아름다운 뿌리를 내리게 된다.

역사의 기록에는 어디에서 불상을 조성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왕실 어디에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1457년 10월에 시작하여 완성된 것은 1458년 10월이다. 금성대군의 죽음 1주기에 맞춰 불상을 완상하고 그의 명복을 비는 의식이 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죄상(가운데)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죄상(가운데)

시주에 참여한 왕실 사람들

이때 시주에 참여한 왕실 사람들로는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 이보(李補,1396∼1486)와 그의 아들 의성군 이채(李菜, 1411~1493), 세종의 딸 정의공주(1415~1477), 태종의 후궁인 의빈 권씨(?~1468), 명빈 김씨(?~1479), 신빈 신씨(?~1435) 등인데 모두 금성대군과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다.

시주자 가운데 의빈 권씨가 아미타불 조성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이유는 금성대군의 어머니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권유로 의빈 권씨가 금성대군을 친자식처럼 보살폈으며, 금성대군 또한 의빈 권씨를 친 어머니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아미타불 복장에서 나온 복장기
아미타불 복장에서 나온 복장기

정축지변과 흑석사 아미타불

우리 고장 이산면 흑석사에 금성대군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아미타불이 봉안돼 있다. 이 불상은 지금으로부터 564년 전(1457) 효령대군을 비롯한 왕실 사람들이 금성대군의 참혹한 죽음 앞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한 불상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흑석사 아미타불 복장 속에서 나온 복장기(腹藏記)에 자세하게 기록돼 있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이 복장기가 발견된 내력은 다음과 같다.

1986년 흑석사에 도둑이 들었다. 흑석사 부봉스님이 새벽 예불을 드리려 대웅전에 가보니 불상이 없어졌다. ‘큰일 났다!’ ‘상호 큰스님께서 팔십여 리 길을 직접 업고 온 불상인데…’ 즉시 경찰서와 시청에 알리고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그날 오후 절 인근에서 불상과 복장유물이 발견돼 수습했다. 당시까지 복장유물의 존재를 몰랐는데 도둑이 복장유물을 세상에 내놓게 한 것이다. 이후 문화재청과 학자들의 연구와 고증 과정을 거쳐 불상과 복장유물은 1993년 국보 제282호로 일괄 지정됐다.

아미타불 복장 속에 들어 있던 복장기는 옅은 청색으로 물들인 명주(140cm)와 그 뒷면에 이어 붙인 같은 폭의 한지(230cm)로 연결되어 있는데 의빈 권씨를 비롯한 태종의 후궁들과 효령대군과 세종의 사위 안맹담을 비롯한 왕실 종친, 제작에 참여한 장인과 화남(和南)스님 등 275명의 시주자 이름이 기록돼 있다. 그들은 금성대군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과 아미타불(3존) 조성 경위를 복장기에 남겨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미타불 조성 때 왕실에서 작성한 보권문
아미타불 조성 때 왕실에서 작성한 보권문

법천사 아미타불이 흑석사에?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원래 정암산(井巖山) 법천사(法泉寺)에 봉안돼 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 어딘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불교사학자들 중에는 당시 상황에 비추어 순흥 초암사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흑석사를 중건한 상호스님(1895-1986)은 일제 말렵 초암사에서 아미타여래좌상을 처음 만났다. 1949년 소백산 일대에 소개령이 내려지자 상호스님은 초암사 목재를 옮겨 흑석사를 중건하고 이 불상을 짊어지고 와서 흑석사에 봉안했다.

충절을 지킨 우리고장 인물-1

▷유귀산(庾龜山,평산인)은 한성부윤, 팔도 관찰사를 두루 역임하고 순흥 동쪽 봉화 화천에 살았다. 정축지변 때 현장에서 사사됐다. ▷유오산(庾鰲山)은 유귀산의 아우로 문과에 급제하여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형과 함께 사사됐다.

▷사헌부장령을 역임한 동강(東岡) 송계(宋啓,여산인)는 단종이 폐위되자 영주로 낙향하여 화천(禾川,동산교회下)에 숨어 살면서 영월을 향해 절하며 눈물로 옷깃을 적셨다.

▷송계의 아들 송인창(宋仁昌)은 단종이 폐위되자 우분을 달래며 천석에 소요하며 자적했다. 공이 즐겨 유상(遊賞)하던 곳이 구성(龜城) 서쪽 동구대(東龜臺)였다.

▷송원창(宋元昌)은 송계의 아들로 거창군수 등을 역임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영천 화천에 숨어 살았다.

▷허방(許邦,양천인)은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벼슬을 버리고 영월로 달려갔다. 단종이 승하하자 엄흥도와 함께 관곽(棺槨)을 준비하여 단종을 동을지(東乙旨) 서쪽 산기슭에 장사지냈다.

▷허윤공(許允恭)은 허방의 아들로 금성대군이 써준 글을 가슴에 품고 소백산을 넘어 영월에 여러 번 오갔다. 거사를 주획(籌畫)하고 격문을 초고하여 널리 의사들를 모으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허윤공의 아들 허지(許智)는 보령 현감 재직 중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영월로 달여 가던 중 도중에 병을 얻어 증세가 위독하니 “나를 영월의 산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졌다. 유언대로 영월 동쪽 계족산에 장사지냈다.

▷의령 현감, 예천군수를 지낸 서파(西坡) 안리(安理, 순흥인)는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분연히 벼슬을 버리고 순흥 남쪽 대룡산에 숨어 살았다.

▷안리의 아들 안계문(安季文, 부사직)은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대룡산에 내려와 어버이를 봉양하며 임천에 자적했다.

충절을 지킨 우리고장 인물-2

▷서한정(徐翰廷,달성인)은 성균관 유학 중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청운의 꿈을 접고 순흥 등강촌에 숨어 살면서 독서로 생애를 자적(自適)했다. ▷우원도(禹元道, 단양인)는 문과급제하여 돈령부정에 재임 중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절조를 지켰다.

▷전희절(全希哲, 옥천인)은 무과에 급제하여 문종의 신임이 두터워 상장군을 역임했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가솔을 거느리고 영천 휴천에 숨어 살면서 울분을 달래며 임천에 자적했다.

▷세종-중종 때 평시령을 역임한 이수형(李秀亨, 우계인)은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비분강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순흥부 도촌에 숨어 살았다.

▷홍천 현감을 역임한 이수형의 아들 이대근(李大根)은 금성대군이 귀양 와 거처하던 자리를 순흥부에 알리고 그 자리를 봉축(封築)하게 했다.

▷단종 때 중부시첨정을 역임한 권산해(權山海, 안동인)는 1456년 성삼문 등이 단종복위 운동을 도모하다 실패하자 비분(悲憤)하여 자결했다.

▷임파 현령을 역임한 이진(李畛, 공주인)은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비분하여 벼슬을 버리고 영주 두서에 숨어 절의를 지켰다.

▷예빈시부정자를 지낸 황지헌(黃智軒, 창원인)은 계유정난에 연루되어 영주 창보로 귀양 왔다가 귀양이 풀려 서천 서쪽에 살면서 서울 살 때 마을 이름인 ‘배고개’를 그대로 따와 마을 이름을 ‘배고개’라 칭했다.

▷황석동(黃石同, 창원인)은 황지헌의 형 황의현의 아들이다. 계유정난에 연루되어 1454년 8월에 순의(殉義)되어 아버지와 함께 장릉 별단에 배향됐다.

▷예문관 직재학을 지낸 진유경(秦有經,풍기인)은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분연히 벼슬을 버리고 낙향(봉현 노좌)하여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한성판관을 역임한 진흠조(秦欽祖,풍기인)는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벼슬을 버리고 노좌에 숨어 살았다. ▷이기륭 (李基隆, 우계인)은 당시 우리고장 유림대표로 숙종 45년 부사 이명희와 나라에 상소하여 금성대군과 부사 이보흠 그리고 의인의 제단을 처음 설치하였다.

이 기사는 2007년 6월 ‘순흥 단종복위의거연구회’에서 발간한 『단종복위 의거, 편집 류창수』 책자 내용에 근거하여 재편집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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