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심의 기대 속에 지은 중앙시장
​​​​​​​추억 속에서나 찾을 수 있는 영주역

중앙시장이 있는 영주의 구도심. O는 중앙시장
중앙시장이 있는 영주의 구도심. O는 중앙시장

부석사와 소수서원, 소백산이 있는 우리고장 영주는 도심에도 볼거리가 많다. 후생시장(일제시대 건물)과 중앙시장, 구성마을은 도시재생 사업이 이뤄졌고 그 주변은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역사거리로 지정됐다.

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도시의 찐 매력에 서서히 빠져든다. 본지는 모두 알고는 있지만 무심코 지나치거나 무관심했던 원도심의 새로운 매력을 재조명한다. <편집자 주>

1960년대 영주역과 구도심
1960년대 영주역과 구도심

중앙시장

중앙시장은 1982년 개장했다. 1973년 영주역이, 1981년 영주시청이 신영주(휴천2)에서 업무를 시작하면서 비어져가는 구도심을 살리자는 큰 뜻으로 옛 영주역 자리에 만들어진 시장이다. 지하1, 지상2층의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진 건물에는 중앙에 큰 광장이 있고, 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점포가 130개나 되는 주상복합형(住商複合形)이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이 시장은 제대로 활기를 찾지 못하였을 뿐만아니라 점점 위축이 되어, 130개의 점포 중에 실제로 사용 중인 점포가 50개 밖에 되지 않는, 거의 시장의 기능까지 잃어가는 형편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2015년 도시재생사업 선도지역으로 지정, 4년간 준비하여 재생의 길을 진행했다.

재생사업의 큰 틀은 외관 공사와 주민공동체 운영이었다. 외관공사로 방치되고 있었던 지하공간을 주차장으로 만들었고, 2층에 난간 통로를 만들어 2층에서 서로 통할 수 있도록 개선을 했다.

그리고 옥상에 도심형 캠프촌을 만들었다. 그리고 주민공동체 운영을 위하여 많은 사람을을 모을 수 있는 청년 공예가들을 선정하여 입주시키며, ‘모디라는 공동체도 만들었다. 모든 게 잘 이루어질 듯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터진 코로나라는 펜데믹으로 다시 숨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1982년 개장 당시의 중앙시장
1982년 개장 당시의 중앙시장

영주역과 영주의 변화

19371221일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중앙선 영주역 기지는 오랫동안 철도 당국에서 우물쭈물하고 발표하지 않고 있던 바, 지난 6일에야 건설과에서 영주에 와서 김군수와 전 번영회장 정면장을 대동하고 관계없는 사람들의 수행을 거절하고 읍내를 일주한 후, 읍성 아래서 장시간 돌아보면서 일반의 시선을 끈 다음 마침내 성밑으로 중앙선 영주역을 결정하였는데, 두서(斗西)앞 내새들(乃世平)과 성아래 제방을 횡단하여 예천 통로에 걸치게 된 바, 총 부지 2만평으로 결정되었다.

그 가운데 가옥이 헐릴 곳이 성 아래 농촌진흥조합을 비롯하여 10가나 헐릴 것이라는데, 부지매입에 대해 상당히 고려중이어서 이로써 일반 사람이 궁금해하는 역부지는 결정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1965년 '삭발의 모정' 촬영 현장(영주역 광장)
1965년 '삭발의 모정' 촬영 현장(영주역 광장)

현재 중앙시장의 자리에 영주역사를 짓는다는 내용의 기사이다. 그 때도 부지 선정을 두고 밀고 당기고 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결정된 곳이 두서(현 롯데시네마)에서 구성공원 아래(현 구성새마을금고)까지의 현재 구성로의 구간이었다. 1973년 철길이 현재 장소로 이전하기 전까지 구성로에 중앙선 철로가 있었다.

영주역 건설은 관공서와 학교, 공공건축물이 있던 광복로에 국한되었던 시가지를 영주역 주변에 역세권을 만들면서 도시를 확장시키게 된다. 그리고 1955년 영암선(영동선)1966년 경북선 개통을 하면서 영주역에서 조흥은행(현 신한은행)까지의 역전통시대를 만들어내게 된다.

특히 영동선의 개통은 당시 국가 발전에도 주요한 계기가 되었지만, 영주도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탄광촌에 필요한 모든 물자도 영주에서 들어갔지만, 탄광으로 가는 사람들도 영주를 거쳐야 했다. 또 영동선으로 들어오는 동해의 어물들은 우리의 식탁을 풍성하게 했다. 영주문어, 간고등어는 그때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 중심은 역전통(현 영주로)이었다.

옛 영주역터 표지석
옛 영주역터 표지석

사진으로 읽는 영주역전

1960년대 영주역전은 늘 사람으로 붐볐다. 철로는 외부와 연결해 주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래서 영주역은 영주사람들 뿐만아니라 봉화나 예천 사람도 이곳에 와서 서울로 가야 했다. 그렇게 영주역은 경북 북부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역전통의 가게들은 문전성시를 이루게된다. 대폿집·식당·여인숙들이 잇달아 들어서고, 삼각지 너머로 포목전·어물전·나무전으로 이어진다.

1965년 영주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진다. ’삭발의 모정이란 영화였다. ‘휴가 나온 아들에게 밥 한 끼 제대로 먹이기 위해 어머니가 머리칼을 잘라 팔아서, 따뜻한 밥과 소고기국을 먹이려다가.’ 하는 궁핍한 시절의 이야기였다.

중앙시장 뒷골목, 골목시장과 이어진다
중앙시장 뒷골목, 골목시장과 이어진다

처음엔 신문 기사가 났고, 그 보도를 접한 영화 제작자가 영화를 만들었고, 또 음악가가 가요를 만들면서, 전국을 울음바다 속으로 몰아넣었다. 촬영도 영주에서 거의 이루어졌다. 영주역에서 촬영을 할 때, 그 장면을 보기 위한 인파가 많아 경찰이 질서유지를 위해 통제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사진의 속, 인파 너머로 보이는 대한통운 자리는 현재 기독병원 쪽이다.

이제 중앙시장에는 역의 흔적이 없다. ‘옛 영주역터라는 표지석만 있을 뿐이다. 표지석 옆 골목길을 따라 가 보면 이발관, 보리밥집, 떡집, 과일가게가 이어진다. 중앙시장의 뒤쪽 이다. 여기서 기독병원 뒷길을 지나면 골목시장과 바로 연결된다.

골목시장은 현재 영주에서 가장 붐비는 먹거리 장터이다. 채소가게 골목부터 밑반찬 가게와 어물전, 떡집 그리고 뻥튀기까지 없는 게 없다. 전을 부치는 집도 몇 집이 있는데 여기서는 제수용(祭需用) 전도 만들어준다. 해그름에 이곳을 지나면 막걸리 생각이 절로 난다.

골목시장
골목시장

변화를 준비했던 도시재생

중앙시장은 참 안타깝다. 우선 청년공예가들의 이야기이다. 도시재생사업을 하면서 중앙시장 상가에 입주할 청년공예가들을 모았었다. 경쟁 속에 입주한 이들은 모디라는 공동체를 만들었고, 이들은 이곳에서 상품을 만들어 판매한다는 생각보다, 공예교실을 열어 많은 이들이 중앙시장으로 발길을 돌리게 한다는 착한 마음으로 일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주말마다 중앙 광장에서 먹거리 장터나 나눔 장터를 열면서 변화를 꾀했었다. 하지만 도시재생사업이 끝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코로나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청년들이 설 자리를 갑자기 잃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이들도 있지만, 몇몇 공예가들은 떠나버리고 말았다.

공예 체험 활동 '한지공예'
공예 체험 활동 '한지공예'

옥상 공간은 더 썰렁하다. 옥상에 가면 세 개의 콘테이너와 데크가 있다. 콘테이너는 음악활동을 하는 동아리를 위해 만들어졌고, 데크는 도심에서 즐길 수 있는 캠핑촌으로 만든 것이다. 데크 위에 테트를 칠 수 있게 만들었다. 도심 속에서 음악과 낭만을 즐길 수 있는 장소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운영이 되지 못하고 있다.

중앙광장에서 주위를 돌아 본다. 문을 열지 않은 가게들이 보인다. 그 속에 모든 아픔이 있을것 같다. 재작년, 외지에서 관광을 온 이들을 저 가게로 안내했던 기억이 난다. 사람이 많아서 몇 집으로 나누어 공예 체험을 했었다. 참 친절했던 그 공예가는 아직도 문을 열지 않았다.

빨리 코로나가 끝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중앙 광장에도 많은 사람들이 와서 놀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청년공예가들이 힘을 낼 것 같다. 광장 옆 기둥 한곳에 술래가 머리를 대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면 참 보기 좋을 것 같다. 한 공예가는 아이들과 함께 달고나도 만들면서 놀이를 하고 싶단다.

중앙광장에서 공연 먹거리 장터(2017년)
중앙광장에서 공연 먹거리 장터(2017년)

변화를 준비했던 도시재생

중앙 광장 자리에 역 광장이 있었다. 그리고 구성로 쪽 건물에 역사(驛舍)가 있었다. 대합실은 씽크공장자리였고, 오는 승객들을 맞이하는 출입구는 침대가게쯤 이었을 것이다. 목재로 만든 출입구 너머로 플랫홈으로 가는 건널목이 보였다. 그래서 가는 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던 곳이 여기였다.

옥상 캠핑촌
옥상 캠핑촌

철로가 있던 구성로로 나가 본다. 시장 앞 인도(人道)에 그림 타일이 있다. 부석사, 소수서원, 희방폭포, 소백산이다. 여기에다 영주의 자랑을 새겨 두었다. 영주사람들의 애향심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구성로 북쪽으로 눈길을 돌리니, 노란 은행잎 너머로 소백산이 손짓을 한다.

오공환 기자 / 김덕우 작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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