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복위 의거 실패 원인과 피로 물든 죽계(竹溪)

1456년 금성대군 유배지에 1742년 금성대군 신단설치
1456년 금성대군 유배지에 1742년 금성대군 신단설치

단종복위 격문 초고, 관노가 시녀와 내통-훔쳐 달아나 실패
1457년 6.27일 순흥도호부 혁파, 10.21 금성대군 안동서 사사
10.24 단종 영월서 승하, 10.27 이보흠 평안도 박천서 교살

금성대군이 경기도 삭녕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중 사육신을 중심으로 한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났다. 위기의식을 느낀 세조는 금성대군의 유배지를 경상도 순흥으로 멀리 옮겨 위리안치 시켰다.

단종이 영월에 유폐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금성대군은 이보흠과 힘을 합쳐 단종복위를 계획했다. 그러나 거사를 실행에 옮겨보지도 못하고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죽어 태백산 산신이 된 단종이 영정(고치령 산령각)
죽어 태백산 산신이 된 단종이 영정(고치령 산령각)

세조는 철저한 보복을 시도했는데 실로 그 과정은 처참했다. 금성대군을 사사(賜死)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관련자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살육은 한 달 넘게 계속됐다.

이때 피살된 사람들의 피가 죽계천을 온통 피로 물들게 하여 십여 리까지 흘러갔다. 그 핏물은 지금의 동촌1리까지 이어졌는데 이곳에 이르러서야 핏물이 끝났다고 하여 이 마을을 ‘피끝’이라 부르게 됐다. 이 사건은 정축년에 일어난 참사라고 하여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 부른다.

세조는 순흥부 주민 학살 사건에 관한 모든 기록을 파쇄하여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명령했기 때문에 이에 관한 기록이 많지 않다. 야사(野史)나 구전(口傳)에 의해 전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실록(實錄)에서는 사실을 왜곡, 축소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금성대군의 저항정신을 온전히 기릴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쉽다.

두레골 금성대군당에 안치된 금성대군 혈석
두레골 금성대군당에 안치된 금성대군 혈석

단복 복위 실패 원인

세조 3년(1457) 6월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이 단종복위를 위해 작성한 격문(檄文)의 초고를 관노와 시녀 김련(金蓮)이 내통하여 훔쳐 달아났다. 기천(基川) 현감 김효급(金孝給)이 이를 추격하여 그 격문을 빼앗아 서울에 있는 판중추원사 이징석(李澄石)을 통하여 세조에게 고 함에 따라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다.

세조 3년(1457) 6월 27일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실패로 순흥도호부는 혁파(革罷)되어 풍기군에 속하게 됐다. 이때 마아령(馬兒嶺) 개울 동쪽은 영주(榮州)에, 문수산 개울 동쪽은 봉화에 소속됐다.

단종이 유배된 영월 청령포
단종이 유배된 영월 청령포

의거 실패로 희생된 사람들

세조 3년(1457) 7월 금성대군은 안동으로 압송된 후 10월 21일 사사(賜死)됐다. 그의 나이 32세였다. 가족들은 서인으로 격하시켜 충청도 지역으로 퇴출됐다. 그의 손자 연장(連長)은 청주에서 천역(賤役)을 하며 살았다.

금성대군의 장인 송현수(宋玹壽)는 10월 21일 사사되고, 10월 24일 노산군(端宗) 또한 사사됐다. 부사 이보흠은 서울로 압송 후 장(杖) 100대에 유(流) 3,000리에 처해져 평안도 박천으로 유배됐다가 10월 27일 교살(絞殺)됐다.

관찰사 유귀산과 유오산이 사사되고 동지중추유원사 조유례는 교사되었으며 무인 김옥겸 또한 사사됐다. 향리(鄕吏) 김근(金根)은 장 100대에 유 3,000리, 김각(金恪)은 장 100대, 안당은 장 80대, 순흥기관 정중재(鄭仲才), 순흥 관노(官奴) 정유재(鄭有才), 범삼(凡三), 석정(石丁), 석경, 석구지(石仇知), 범이(凡伊), 정호인(鄭好仁), 풍산관노(豐山官奴) 이동(李同)은 모두 재산을 적몰하고 능지처사(陵遲處死) 후 연좌했다.

순흥관기 김유성(金由性), 안처강(安處强), 안효우(安孝友), 안순손(安順孫)과 순흥 군사(軍事) 황치(黃緻), 신극장(申克長)은 재산을 적몰 당하고 처참(處斬)됐다.

풍기 방면으로 쫓겨간 순흥 사민(士民)들은 교촌동 앞 냇가에서 집단 사살되어 수십 명씩 구덩이에 묻혔다. 죽계를 붉게 물들인 핏물이 10여 리 밖까지 흘러 ‘피끝’까지 흘렀다.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순흥에 살던 수많은 사민들이 흘린 순혈(純血)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안정면 동촌1리 '피끝마을' 전경
안정면 동촌1리 '피끝마을' 전경

순흥도호부 복설 경과

1457년(세조3) 6월 27일 순흥도호부는 혁파됐다. 금성대군과 이보흠 부사는 압송된 후 죽임을 당했고, 순흥 고을 사람들은 수없이 희생되고 고을 전체는 불로 태워져 폐허의 땅이 되고 말았다.

순흥도호부가 혁파된 지 200여 년이 지난 중종(中宗) 무렵 소수서원 원장 김중문(金仲文)이 순흥도호부 회복을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그 뒤 찰방 안홍정(安弘靖)·사민 서후행(徐後行)·박래(朴徠)가 잇달아 상소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1681년(숙종7) 순흥에 사는 유학 이정식(李庭植) 등이 또 회복을 위한 상소을 계속했다.

1682년(숙종8) 1월 13일 드디어 순흥도호부가 복권됐다. 실로 225년 만에 명예를 찾게 된 것이다. 당시 비변사(備邊司)에서는 “이 일은 너무나 중대한 일인지라 수백 년 동안 오래 폐지한 고을을 백성의 소청(疏請)으로 가볍게 허가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숙종 임금은 “오래 폐지했던 고을을 다시 회복시키는 일은 자못 중난(重難)하다. 그러나 상소의 사연이 매우 가긍(可矜)하고 딱하니 특별히 복설을 허락하여 주민들의 간절한 소망에 부(副)하려 하노라”라며 특단의 결정을 내렸다.

그 후 숙종9년(1683) 8월 21일 순흥부사 한성보(韓聖輔)가 부임함으로써 순흥부는 완전 복설됐다.

비운의 땅 순흥

순흥에서 일어난 단종복위의거 사건은 죄가 없음이 만천하에 드러나 숙종 8년(1682) 순흥도호부로 복권되었고, 절의(節義)와 충절(忠節)의 고장으로 명예가 회복되었음에도 구천(九泉)을 떠도는 수많은 사민들의 사당(祠堂) 한 칸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 “영주인으로 크나큰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충절공 후손들은 “지금도 늦지 않으니 순흥지역에 남아있는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관리하고 사민의 영혼을 위로하는 숭모전(崇慕殿) 건립 및 충절을 바친 우리 고장 인물 23인의 유적지를 건립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산교육장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금성대군신단

세조 2년(1456) 금성대군이 이곳 순흥에 유배되어 순흥부사 이보흠과 단종복위 의거를 도모하다가 사전에 탄로되어 참화를 입었다.

금성대군은 사사되고 이 부사는 교살되었으며 이 일에 연루되어 수많은 순흥 사민(士民)들이 희생됐다.

영조 18년(1742) 금성단비를 세우고 제단(祭壇)을 설치했다. 상단은 금성대군신단, 중단은 이보흠부사신단, 하단은 순절의사신단이다.

금성단은 숙종 45년(1719) 이 고을 사람 이기륭(李基隆)이 부사 이명희(李命熙)에게 알리고 제단을 처음 설치하였다.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은 영조 18년(1742) 경상감사 심성희(沈聖希)의 소청에 의해 나라의 승인을 얻어 규모를 확충하고 단(壇)을 설치하였으며, 삼위(三位)의 제단도 예를 갖추어 설치하는 등 나라의 지원을 받았다.

금성대군 혈석

단산면 단곡3리(웃질막) 속칭 두레골에는 금성대군 혈석(血石)을 모신 금성대군당(錦城大君堂)이 있다. 이 당은 순흥 사람들이 금성대군을 순흥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해마다 성황제를 지내는 곳이다. 두레골 성황제의 유래는 단종 복위 거사를 도모하다 죽임을 당한 금성대군의 혈석에서부터 시작된다.

조선 후기 어느 때 순흥 고을에 사는 권씨 부인이 꿈을 꾸었는데 금성대군이 나타나 “내 피묻은 혈석이 죽동 냇가에 있으니 이를 찾아 거두어 달라”고 하면서 돌의 모양도 알려주었다.

이튿날 마을 사람들이 죽동 냇가를 뒤졌더니 과연 그 돌이 발견되었고, 이 혈석을 가까운 죽동 성황당에 안치했다. 그 후 순흥 사람들은 매년 정월대보름날이면 정성껏 제수를 마련하여 제사를 지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인 1930년경 순흥사람 이화라는 선비의 꿈에 금성대군이 또 나타나 “이곳에 일본인들이 나타나 오줌 누고 침 밷고 욕을 하니 내가 있을 곳이 못된다”며 “나를 두레골로 옮겨 달라”고 현몽했다.

순흥 사람들은 다시 뜻을 모아 금성대군 혈석을 소백산 국망봉 바로 밑 두레골로 옮겨서 모시게 되었는데 이때 이 일을 주관한 사람들이 바로 상민(常民) 자치기구인 순흥초군청이었다. 두레골 성황제의 제물은 다른 고장에서 찾아볼 수 없는 황소 한 마리이며, 이때 희생(황소)을 양반 또는 어른으로 의인화하여 제물로 드리는 것이 특이하다.

┃본 내용은 2007년 6월 「순흥 단종복위의거연구회」에서 발간한 『단종복위 의거』 책자 내용 중 일부를 재편집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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