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 속에 희망을 다져온 관사골, 옛 친구와 추억을 소환하는 벽화길

 

영광중학교 옥상에서 찍은 관사골 전경. 사진의 왼쪽과 오른쪽 끝에 부용대와 숭은전이 보인다.
영광중학교 옥상에서 찍은 관사골 전경. 사진의 왼쪽과 오른쪽 끝에 부용대와 숭은전이 보인다.

부석사와 소수서원, 소백산이 있는 우리고장 영주는 도심에도 볼거리가 많다. 후생시장(일제시대 건물)과 중앙시장, 구성마을은 도시재생 사업이 이뤄졌고 그 주변은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역사거리로 지정됐다.

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도시의 찐 매력에 서서히 빠져든다. 본지는 모두 알고는 있지만 무심코 지나치거나 무관심했던 원도심의 새로운 매력을 재조명한다. [편집자 주]

숭은전에서 본 부용대와 철도관사
숭은전에서 본 부용대와 철도관사

관사골의 변화

관사골은 영주역과 가까운 이곳에 철도관사가 지어지면서 불리게 된 이름이다. 그 이전에 이곳은 순흥으로 가는 길이 있는 골짜기에 불과했다. 1941년 중앙선이 개통되면서 시작한 영주 철도의 역사는 1960년대 중앙선과 영동선, 경북선의 중심역으로 역할을 하면서 ‘교역도시(交易都市) 영주’로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관사골의 역사는 훨씬 이전이다. 밭만 있었던 텅 빈 골짜기에 관사가 만들어진 시기는 1941년 영주역이 영업을 시작하기 전인 193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기는 철도의 노선을 결정하던 때이다. 경경선(현 중앙선) 철로를 만들기도 전에 철도관사부터 지어졌다는 얘기다.

부용대에서 본 숭은전과 철도관사
부용대에서 본 숭은전과 철도관사

1954년 항공사진을 보면, 골짜기엔 관사만 있고, 산등성이에는 밭의 흔적만 보인다. 그리고 본채와 별채, 두 채의 이석간고택과 한 동뿐인 영광중학교가 있다. 산비탈의 다닥다닥 붙은 집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1988년 항공사진에는 집들이 산등성이에 가득하게 들어서 빈틈이 없다.

이 변화의 시작점을 영주시가지가 거의 물속에 잠겼던, 1961년 ‘영주대홍수’로 추정한다. 그때 많은 집들이 물에 잠긴 탓도 있었지만, 수해 후, 영주 곳곳에서 벌어진 수해복구 공사라는 대역사(大役事)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근 지역에서 공사판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산기슭에 집을 짓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1970년대가 되면서 비교적 터가 너른 관사부터 시작해서, 집집마다 장소만 있으면 방을 달아내어 셋방을 만들었다. 그 셋방엔 영주에 일자리를 찾으러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영주종고(현 제일고), 영광여중고, 영광중고 등 인근 학교의 자취생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등하교시에는 마을 앞길은 학생들로 빼곡했었다.

부용공원 올라가는 길 옆에 있는 관사골 안내도
부용공원 올라가는 길 옆에 있는 관사골 안내도

관사골 가는 길

2018년 대한민국 국가등록문화재 제 720-1호와 2호로 등록된 관사골 5호관사와 7호관사는 1936년에 건립된 영주역 관사이다. 큰 대지에 동서로 길게 지은 일본식의 목조 단층집이다. 이 건물은 건립 당시부터 다른 가옥들과 크게 달랐다.

일본식이라는 외관도 외관이지만, 집 안에 화장실이 있었고, 목욕 시설까지 갖추고 있어, 주변 사람들에게 그 집에 사는 이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1960년대만 하여도 20여 채(40여 가구)의 관사들은, 사는 이들의 직급에 따라 크기가 차이 났지만, 거의 비슷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현재엔,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된 두 채를 제외한 다른 관사는 형태가 조금씩 개조가 되어서 문화재로 등록할 수 없었다고 한다.

2대에 걸쳐, 5호 관사에 살고있는 강영묵씨(66)는 “관사가 개인에게로 불하(拂下)된 70년대를 지나면서 많이 개조한 것 같아요.”하면서, 관사의 대지(垈地)가 비교적 여유가 있었던 까닭에 빈터에 방들을 달아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두 칸밖에 되지 않는 방은 7〜8명이 되는 가족이 살아가기엔 비좁은 탓도 있었겠지만, 세(貰)를 내기 위해 방을 달아낸 경우가 더 많았을 것이다.

벽화, 말타기 놀이를 하는 풍경
벽화, 말타기 놀이를 하는 풍경

추억의 벽화길

영광중학교 사거리를 오른쪽으로 끼고 돌면 바로 ‘두서길’이다. 두서길을 따라 학교가 끝나는 곳에서 만나는 두 갈래 길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이 관사골로 가는 길이다. 갈림길에 서면, 동서 양쪽 산줄기 끝에 두 개의 정자가 보인다. 동쪽 영광여고 앞에 있는 것은 숭은전(崇恩殿)이고, 서쪽은 부용대(婦容臺)이다. 마치 새가 양날개로 마을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관사골로 접어들면 빨간색 지붕의 1호 관사가 보인다. 1호 관사는 영주역장 관사였다. 류시언씨(67)는 “1호 관사 앞에 있는 주차장 자리엔 큰 바위가 있었어요. 물이 닦아놓은 반들반들한 바위에서 미끄럼을 탔지요.”하면서, 길을 확포장하면서 추억을 덮어버렸다고 아쉬운 듯 빙긋 웃는다.

벽화, 제기차기를 하는 풍경
벽화, 제기차기를 하는 풍경

1호 관사를 지나면 벽화가 나타난다. 2020년 영주미술인들이 조성한 ‘관사골 벽화길’이다. 많은 이들이 참여한 탓에 다양한 벽화를 감상할 수 있다. 기차를 소재로 한 그림이 많은데, 눈길을 끄는 것은 아이들이 놀이하는 모습이다. 기차 놀이에서 말타기, 굴렁쇠, 엿치기, 제기차기, 비석(옥대)치기, 연날리기, 팽이치기 ….

“예전에 담이 없어서 골목길이 지금보다 넓었지요, 그래서 7호 관사와 8호 관사 사이에 오징어를 그려놓고 놀았어요”라며 강영묵씨는 아이들이 많아서, 동네가 다 놀이터였다고 그때를 회상한다. 어릴 때엔 ‘숨바꼭질’이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주로 했는데, 차츰 커 가면서 ‘오징어 게임’이나 ‘말타기 놀이’를 많이 한 것 같은데, 여자아이들은 거의 ‘공기 놀이’나 ‘고무줄 놀이’였다고 한다.

부용대와 어울림 마당
부용대와 어울림 마당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아가야 나오너라 달맞이 가자….”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 나직하게 노래를 하면서 하는 고무줄 놀이는 구경하는 남자아이들에겐 경이로운 동작이었다. 특히 물구나무를 서면서 고무줄을 낚아채는 기술은 신기에 가까웠다.

문득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이 생각난다. 모두가 잘 아는 놀이여서 더 재미있게 봤다. 하지만 우리 놀이의 현실과 드라마 속의 현실의 차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가령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드라마에서는 죽음으로 게임이 끝이 나버리는 것이 되었지만, 우리 놀이에서는 죽은 자를 살려내면서 놀이가 계속 진행되는 ‘부활’의 의미가 더 강한 것이 아니었던가?

또 ‘달고나’에서도 드라마에서는 복불복(福不福)으로 형태를 부여받고 있었지만, 우리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다시 주어지는 기회가 사라지더라도 친구들에게 솜씨를 자랑하려고, 스스로 어려운 형태를 선택하는 ‘도전’의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벽화, 건널목이 있는 풍경
벽화, 건널목이 있는 풍경

숭은전(崇恩殿)과 부용대(婦容臺)

추억을 끄집어 내며서 벽화를 즐기다보니 ‘부용공원’으로 오르는 오르막길이다. ‘부용(婦容)’이란 이름을 지은이는 이황이라고 한다. 풍기군수를 하던 시절, 과거에 급제한 지역 젊은이들의 이 근처에서 모임을 갖는데, 이름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 ‘부용대’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전해온다.

그런데 그 부용대는 원래 산 아래에 있던 바위이다. 하지만 지금은 새로 난 철길 아래의 흙더미 속에 있다.

지금의 부용대는 2013년 부용공원을 조성하면서 만들어진 정자인데, 정자에서 관사골 쪽으로 ‘부용계기념비(婦容契紀念碑) 비각이 있는데, 부용대에서 모임을 했던 부용계원들을 기리는 곳이다.

부용대에 오르면 영주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서천(西天) 건너 택지까지 눈 아래 펼쳐진다. 그리고 동쪽으로 숭은전이 보인다. 경순왕의 영정(影幀)을 모시는 전각인데, 전국에 여섯 군데 있다고 한다. 경순왕의 영정이 왜 여기에 모셔져 있을까?

관사골 떡집과 기관차가 있는 풍경
관사골 떡집과 기관차가 있는 풍경

일부 사학자들은 ’신라 김씨‘의 출발지가 영주였기 때문이었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신라 왕들이 정기적으로 영주에 왔는데, 그 이유는 제사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서구대에 있던 무신탑에 얽힌 소지왕과 벽화낭자와 설화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부용공원은 이제 영주에서 멋진 쉼터가 되었다. 인근 어르신들뿐 아니라 멀리서 찾아오는 젊은이들이 꼬리를 잇는다. 얼마전 문을 연 카페 ‘Breeze’는 이제 영주의 명소가 되었다.

한여름에도 땀을 씻어줄 바람이 부는 곳, 참 이름도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뒤편에 새로운 카페가 또 들어설 것이라 한다. 여기서는 시내 풍경도 좋지만, 소백산 풍경도 일품이니 한 번 즐겨보라고 권하고 싶다.

오공환 기자 / 김덕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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