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으로 영주의 근대화를 이끈 길
​​​​​​​이제 유산이 된 예전의 첨단 문화

 

 서천교 ②부용공원 ③영광여중 ④영광여고 ⑤철도관사 ⑥문화주택 ⑦이석간고택 ⑧영광중 ⑨영광이발관 ⑩풍국정미소 ⑪대영지업사 ⑫현대함석다트 ⑬제일교회
1. 서천교 ②부용공원 ③영광여중 ④영광여고 ⑤철도관사 ⑥문화주택 ⑦이석간고택 ⑧영광중 ⑨영광이발관 ⑩풍국정미소 ⑪대영지업사 ⑫현대함석다트 ⑬제일교회

부석사와 소수서원, 소백산이 있는 우리고장 영주는 도심에도 볼거리가 많다. 후생시장(일제시대 건물)과 중앙시장, 구성마을은 도시재생 사업이 이뤄졌고 그 주변은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역사거리로 지정됐다. 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도시의 찐 매력에 서서히 빠져든다. 본지는 모두 알고는 있지만 무심코 지나치거나 무관심했던 원도심의 새로운 매력을 재조명한다. [편집자 주]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는 영주의 근대생활사를 보여주는 역사문화공간이다. 2018년 8월 6일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720호로 지정되었다.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는 철도역사와 그 배후에 형성된 철도관사(제720-1호, 제720-2호), 이석간고택(제720-3호), 영광이발관(제720-4호), 풍국정미소(제720-5호), 제일교회(제720-6호) 등 지역의 근대생활사 요소를 간직한 건축물이 모여 있는 관사골과 광복로 일대의 거리(두서길, 광복로 일원 2만6377㎡)이다.

그런데 ‘선(線)·면(面) 단위 등록문화재’란 용어가 눈길을 끈다. 이 제도는 문화재청이 이번에 도입한 제도인데, 기존 ‘점(點) 단위 개별 문화재’ 관리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보완하여, 문화유산의 입체적 보존과 활용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다. 영주에서 그 첫 사례로 운영이 되는 것이어서 더 의미가 있다.

제일교회
제일교회

‘근대(近代)’라는 의미

‘근대’라는 말을 우리에게 익숙하게 만든 것은 1960년대에 많이 들은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말이다. 이 말을 들으면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산업 역군’이다. 그래서 그 무렵 산업역군을 양성하는 공업고등학교에 가면, 이 용어를 교내 곳곳에서 볼 수가 있었다.

이 용어가 관용적으로 쓰인 것은 역사를 ‘고대, 중세, 근대’로 정리하는 역사가들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여기서 근대는 봉건사회를 극복하고, 자본주의 사회로 나가는 시기를 의미했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서 살펴볼 때엔 개항(開港)과 더불어 나타난 도시화, 서구화 현상과 일제 침략이 뒤섞여서, 마치 일본이 우리를 근대화를 시켜준 것처럼 오해할 수 있게 한다.

철도5호관사
철도5호관사

우리의 근대화는 광복과 6.25 전쟁이 많이 이끌었다고 한다. 사회구조적인 것은 여러 차례 선거를 치르면서 우리도 모르게 변해 갔다. 하지만 의식주에서는 잘 드러난다. 자기 집에서 손수 베를 짜서 만들던 옷이 1950년대 나일론이 나오면서 근대화를 시켰고, 짚신이 고무신으로 고무신이 운동화로 바뀌던 시기도 1950년과 1970년대였다.

1960년대 운동회를 할 때, 달리기를 잘하는 아이는 운동화를 신은 부잣집 아이였다. 그래서 운동화를 신은 부잣집 아이를 이겨보려고, 어금니를 물고 맨발로 뛰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도 있었다.

우리들의 집도 많이 바뀌었다. 흙집에서 블록담으로 바뀌어 갔고, 지붕도 초가에서 기와나 슬레이트로 바뀌어 갔다. 그래서 근대역사문화거리에 보이는 낡은 집들은 그 때 지은 블록 벽에 슬레이트 집들이 많다.

이석간 고택
이석간 고택

제일교회와 교육시설들

광복로 일대엔 관공서도 많지만, 학교와 교회도 많다. 영주초등학교 앞 100주년 기념비 앞에서 서서 보면, 동쪽으로 동산교회와 영주여자고등학교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제일교회와 영광여자고등학교가 보인다. 영광여고 아래로 영광중학교와 영광여자중학교가 있고, 영주여고 아래에 영주침례교회가 있다.

또 영주초등학교에서 불과 500m 거리에 중앙초등학교가 있는데, 두 학교 사이에 중앙교회가 있고, 중앙초등학교 앞엔 영주성결교회가 있다. 그렇게 보니, 불과 1km 안에 6개의 학교와 6개의 교회가 있다. 그래서 평일이면 학생들로 활기가 넘쳤고, 일요일이면 교회 가는 이들로 생동하는 거리였다.

풍국정미소
풍국정미소

이런 생동하는 거리는 교육으로 만들었고, 또 교육으로 근대화를 일구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분위기는 지역 사회의 노력도 있었지만, 교회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 기독교 선교가 허락될 때, 당시 임금이었던 고종은 학교와 병원만 운영하는 조건으로 허락했다고 한다. 서울의 ‘광혜원(세브란스병원)-연희전문(연세대학교)-새문안교회’와 대구의 ‘동산병원-계성학교-대구제일교회’가 좋은 예이다.

1909년 ‘영주교회’로 시작한 ‘영주제일교회’도 일찍부터 교육 사업에 참여한다. 1915년 ‘강명서숙’을 설립하여 신앙과 애국애족을 위한 신문물을 가르친다. 그리고 1951년 ‘경안중학교(현 영광중학교)’을 설립하게 되는데, 전 교인들이 합심하여 학교 건물을 건축했다고 한다. ‘영광’이라는 교명은 1954년에 고등학교를 세우면서 ‘경안’이라는 이름을 경안노회로 돌려주고,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근대 산업을 주도한 정미소

영주문화파출소에서 출발하여 제일교회를 지나면 풍국정미소가 보인다. 붓글씨로 멋을 낸 풍국정미소 간판과 범죄신고센타 표지판이 세월을 멈추게 한 것 같다. 2019년 근대건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그리고 이곳은 이미 광복로 동쪽, 동산교회 아래에 있는 ‘신창정미소’와 함께 ‘경상북도 산업유산’으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이제 영업은 하지 않지만 집기나 도정기계들은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2대에 걸쳐 이곳을 운영하고 있는 우수광(84세)씨는 “자식들이 하도 일을 말려서 그렇지 기계는 아직 쌩쌩해요.” 하면서, 판수동저울과 주판, 책상은 일제강점기부터 사용하던 것이라고 자랑한다.

우리나라의 정미소는 인천항 개항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1920년대 일제의 정미기 보급이 본격화되면서 공장의 숫자와 규모가 꾸준히 성장하였다. 교통의 중심인 영주도 영주리와 하망리 일대(현 광복로 부근)에 집중적으로 생겨났다. 조선총독부 식산국에서 만든 1934~1936년 현황을 보면 영주리와 하망리에 있는 정미소는 24개소이다.

그리고 광복을 전후하여 면 단위까지 만들어지게 된다. 우리의 피부에 와 닿는 근대화의 물결이었다. 물이라도 흔하면 물레방아라도 있었겠지만, 그마저도 귀한 동네에서는 집에서 직접 방아를 찧어 쌀을 마련해야 했다. 방아 찧고 밥을 지으면서 하루를 보냈던 그 시절, 여성에게 이 정미소는 그야말로 노동을 해방시켜 주는 공간이 아니었을까?

영광이발관
영광이발관

업(業)을 지켜온 사람들

풍국정미소에서 영광중학교를 지나면 영광이발관이다. 오래된 나무 출입문 옆 타일벽에 ‘경상북도노포기업’이란 청동 팻말이 있다. 1930년대 ‘국제이발관’으로 시작해 ‘시온이발관’이 되었다가 현재 ‘영광이발관’이 되었다.

80년의 역사이다. 이곳의 주인 이종수님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4살부터 50여 년간 이 일을 해왔다고 한다. 가지런히 정리된 이발 기구와 세면도구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이 주변엔 아직도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그 후보가 될 수 있는 옛 건물들이 눈에 많이 띈다. 교회 앞의 ‘협동이발관’과 ‘소소컴퓨터’, 이발소 건너편의 ‘대영지업사’와 ‘현대함석닥트’의 시멘트 벽과 슬레이트 지붕은 그때 그 시절을 느끼게 해 준다.

20대 초반부터 40년이 넘도록 함석을 만지고 있다는 김성교(67세)씨는 이 길에서 오래 되기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면서 자신보다 더 오래 업(業)을 지켜온 대영지업사를 이야기 한다. “이제 80이 넘으셔서 올해만 하고 그만두신다고 하데요.” 하면서 세월엔 장사가 없다고 한다. 대영지업사 앞엔 오래된 차가 있다. 1970년대에 거리를 누볐던 ‘포니 픽업’이다. ‘포니 픽업’만 두 번 째란다.

영광이발관
영광이발관
영광이발관
영광이발관

세월을 따라가지 못한 길

영광중학교에서 두서길로 접어들면 서쪽으로 낡은 집이 보인다. 길 아래에 있어서 더 초라하게 느껴지지만, 예전에는 이 인근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 제720-3호로 지정된 이석간고택이다. 원래 이 집은 99칸 한옥이었다. 이석간은 병 잘 고치는 선비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영광이발관
영광이발관

이 명성은 중국에까지 퍼져나가 명나라 신종(新宗) 황태후의 불치병을 고쳐준 얘기는 전설처럼 전해져 오고 있다. 그때 보답으로 지어준 집이 바로 이 고택이다. 하지만 본채는 헐리고 빌라가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집도 해방 이후, 방 수만큼 학생들의 자취방으로 개조하면서 옛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문화재로 지정을 못 받고 있다가 이번에 ‘근대 한옥’이라는 이름으로 지정되었다.

근대화는 원래 ‘새롭다’ ‘진보했다’라는 이미지였지만, 이 거리에서는 그때 그 시절, 그분들에게 그런 곳이었을 것 같다. 제일교회에서 이석간고택에 이르는 길옆에 있는 건물들을 보면 세월을 분간하기가 어렵다. 해방부터 거의 50년의 세월 속으로 오락가락한다. 그래서 ‘선과 면’이란 재미있는 용어를 만들어 붙여진 것이 아닐까?

이 거리를 산책하기 전에 영주초등학교와 영주1동행정복지센터 사이에 있는 ‘영주문화파출소’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예전에 영주경찰서 중앙파출소가 있던 건물이다. 이제 문화와 지역 안내를 위해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이석간고택의 뒤편에 있는 안영주택의 길 건너편에 있는 ‘관사골카페’에서 커피향을 즐길 수 있다.

오공환 기자 / 김덕우 작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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