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역사상 가장 슬픈 사연 담고 있는 단종복위 의거

금성대군 순흥유배 모습
금성대군 순흥유배 모습

2005년 단종복위의거연구회 창립, 「순흥단종복위의거」 출판
금성대군 1456.6.27 순흥 이배, 단종 1457.6 영월로 유배
부사 이보흠·주획 담당 허윤공, 소백산 준령 넘어 영월과 내통

“순흥!”하면 금성대군의 슬픈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순흥 사람들은 단종 복위 실패로 희생된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올해도 지난달 26일(음8.20) 금성대군신단 추향대제를 봉행했다.

금성단은 조선 역사상 가장 슬픈 사연 담고 있는 단종과 단종 복위 운동을 도모했던 금성대군, 이보흠 순흥부사, 관찰사 유귀산·유오산을 비롯한 순절의사들과 순혈을 바친 수많은 백성 등 충절공(忠節公)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추모지소(追慕之所)이다.

t금성단 제향 모습
순흥 사람들은 해마다 춘추로 금성단에 제향을 올렸다.

순흥의 충절공 후손들은 단종 복위 의거 관련 문헌이 거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다가 2005년 그 뜻을 모아 단종복위의거연구회를 창립하기에 이른다.

당시 자료조사위원으로 류창수·이교수·박세우 씨가 활동하였으며, 2007년 류창수 향토사연구가가 흩어진 역사의 진실을 찾고 또 찾고, 현장을 수없이 다니면서 남아 있는 흔적의 조각들을 모아「順興端宗復位義擧(2007.6)」를 출판했다. 이 책 속에는 단종 복위 의거 전말(顚末)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앞으로 관계 기관단체의 깊이 있는 논의를 통해 잃어버린 역사의 맥을 바로 잡고, 단종복위 의거를 재조명하는 데 불씨를 당긴다는 의미에서 그 내용을 4회에 걸쳐 연재한다.

당시 연구회에 참여한 충절공(忠節公) 후손들은 다음과 같다.

허수(회장)·송창환(부회장)·이홍선(부회장)·황춘일(총무)·송장섭·서석호·서용준·우병동·우병태·이갑선·이교수·이도선·이영도·이영상·이종순·전하우·진만식·진홍섭·송영·안병수·안우석·이영국·허건(23명)

금성대군 지위 앞에서 헌관과 축관이 축문을 작성하고 있다.
금성대군 지위 앞에서 헌관과 축관이 축문을 작성하고 있다.

단종 복위 의거 개요

순흥은 조선 태종 13년 도호부로 승격했다. 세종의 손자 단종이 왕위에 오를 무렵은 정치적 수난과 격동의 시기였다.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수양대군(세조)이 군권을 장악했다.

세조 1년(1455) 윤 6월 11일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고 단종은 상왕으로 밀려난다. 세조 2년(1456) 6월 1일 사육신의 단종 복위 사건이 일어났으나 실패하여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을 위시한 수많은 인재들이 희생됐다.

세조 3년(1457) 충절의 땅 순흥에서 단종복위 의거가 다시 일어났다. 순흥으로 유배된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은 장장 1년간 치밀한 의거 준비를 하였으나 관노(官奴)와 시녀(侍女)가 내통한 밀고사건으로 실패하게 된다. 순흥 땅은 관군에 의해 불바다가 되고 남녀노소 구별 없이 백성들은 도륙(屠戮)되고 순흥도호부는 혁파(革罷)됐다.

조선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내외란을 겪어 왔지만 단종복위 의거보다 비참하고 큰 사건은 유래가 없다. 숙종 8년(1682) 순흥도호부가 복설되었지만 죄없이 희생된 백성들은 사당(祠堂) 한 칸 없이 금성단(錦城壇)이 설치되었을 뿐이다.

단종복위의거 자료설명회(2007.6.6)
단종복위의거 자료설명회(2007.6.6)

단종복위 사건일지

▷1413년(태종13) 순흥도호부 승격 ▷1414년(태종14) 문종 출생 ▷1426년(세종8) 금성대군 출생 ▷1441년(세종23) 단종 출생 ▷1450년(문종1) 문종 즉위 ▷1452년(단종1) 단종 즉위 ▷1453년(단종2) 계유정란, 김종서·황보인 제거 ▷1455년(세조1) 세조 즉위, 단종 상왕, 금성대군 경기 삭령 유배 ▷1456년(세조2) 6.1 사육신 단종 복위 실패, 6.3 금성대군 경기광주 이배, 6.27 순흥 이배 ▷1457년(세조3) 6.22 단종 노산군 강등-영월유배, 6.27 순흥 단조 복위 의거 실패-순흥도호부 혁파, 10.21 금성대군 사사, 10.24 노산군 사사, 10.27 순흥부사 이보흠 교살 ▷1518년(중종13) 신하 정국이 금성대군 아들·손자 천역(賤役) 용서 왕에 요청, 대간과 관원의 청에 의해 왕이 천역 면제 ▷1682년(숙종8) 순흥 이정식 등이 도호부 회복 상소, 1.13 순흥도호부 복설 ▷1683년(숙종9) 8.21 순흥부사 韓聖甫 부임 ▷1719년(숙종45) 고을 선비 李基隆(우계인)이 순흥부사 이명희에 알려 제단 설치 및 제사 ▷1738년(영조14) 금성대군 후손 李震秀 탄원-시호 금성대군 貞愍, 부사 이보흠 忠莊으로 신원(伸冤) ▷1742년(영조18) 경상관찰사 심성희 소청-왕명으로 금성단 확충 ▷1791년(영조15) 영월 장릉 배식단(配食壇) 창설 ▷1822년(순조22) 석교리 대평서당 설립 滅門 65가 제사 ▷1906년(고종43) 금성대군 혈석 죽동성황당-두레골로 이안(移安)

세종-문종·금성대군-단종

세종은 1397년(태조6) 태종(이방원)과 원경왕후 사이 3남(충녕대군)으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도(祹), 자는 원정(元正)이다.

▷세종과 소현왕후 심씨 사이 문종(단종의 아버지)·세조(수양대군)·안평대군·임영대군·광평대군·금성대군(6남)·평원대군·영응대군·정소공주·정의공주 등 8남 2녀를 두었고, ▷영빈강씨 사이 화의군 1남, ▷신빈김씨 사이 계양군·의창군·밀성군·익현군·영해군·담양군 등 6남, ▷혜빈양씨 사이 한남군·수춘군·영풍군 등 3남, ▷숙원이씨 사이 정안옹주 1녀, ▷상침송씨 사이 정현옹주 1녀 등 부인 6명에 자녀 18남 4녀를 두었다.

단종은 세종의 손자요 문종의 아들이며 금성대군의 조카다.

조선사 속 순흥도호부

조선 초 순흥은 경상도 북부 중심지역으로 영남 내륙과 수도권을 연결하는 중요한 거점 역할을 수행했다. 태종 13년(1413) 순흥도호부로 승격됐다. 당시 전국에 38도호부가 있었다.

순흥도호부는 동남쪽으로 내성현(乃城縣) 재산(才山)까지, 북동쪽으로는 내성현 춘양면 황지(黃池)까지, 북으로는 강원도 영월군 상동과 하동, 충청도 단양군 일부까지 관할지역이었다. ▷초선 초 호구(戶口) 및 인구(人口)는 알 수 없으나 세종 6년(1424)에 시작하여 단종2년(1454)에 완성한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284호에 1,679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영조(재위 1724∼1776) 때 조사한 인호구에 의하면 3,320호에 16,064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2007년 발간한 「순흥단종복위의거」
2007년 발간한 「순흥단종복위의거」

금성대군, 순흥 유배 내력

금성대군은 세조의 왕위 찬탈 음모를 늘 경계하여 왔으며 세조와 뜻을 같이하는 세력(정인지, 신숙주, 한명회, 권람 등)들과 이념적 대립 관계에 있었다. 이로 인하여 금성대군은 그들에 의해 유배됐다.

▷단종 1년(1453) 10월 계유정난으로 김종서·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안평대군은 강화도에 유배 후 사사 ▷세조 1년(1455) 6월 11일 세조 왕위 찬탈. 단종은 상왕이 되고 금성대군은 경기도 삭령으로 유배 ▷세조 2년(1456) 6월 1일 사육신 단종복위 실패. 6월 3일 금성대군 경기도 광주로 이배. 6월 27일 금성대군 경상도 순흥으로 기족과 함께 이배(移配)

▷유배자(금성대군) 관리 내용 여종(婢子) 4명, 양식·소금·장·술·고기·채소·과일 등은 때에 따라 적당히 지급한다. 매월 1일 15일 부사가 친히 문안한다. 부사는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찰사는 계절마다 중앙에 보고한다.

단종 복위 의거 계획

계유정란(1453)과 사육신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된 금성대군이 순흥에 이배(移配) 되면서 단종 복위 계획이 적극적으로 추진됐다.

-부사 이보흠, 기관 정중재, 품관 안순손·김유성·안처강·안효우 등으로 내실을 다지고, 군사 황 치·신극장, 향리 김근·안당·김각 등으로 군기를 확충하는 한편 의인(義人)을 확보했다.

-영천군을 흡수하는 한편 안동에서 2-3천명의 병사를 확보하고 문경현감으로 하여금 서울로 올라가는 길을 통제케 하며, 풍기 군사는 죽령을 통제토록 하는 등 치밀한 계획을 세워나갔 다. 아울러 군사만 더 모집하면 거사를 성사하는데 어렵지 않다고 판단했다.

-순흥인들은 남녀 귀천 없이 생사를 초월한 동지로 뭉쳤고, 의분의 피 끓는 천하의 의사 협객들이 순흥으로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군사에 능한 무인 김옥겸, 조유례 같은 유능한 인재도 여러명 있었다. 이들은 군비를 모으고 무기를 만들고 군사를 조련하는 등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했다.

-영월에 유배된 단종 임금을 순흥으로 모시고 와서 궁궐을 엄습(掩襲)할 계획을 세웠다.

-전국에 뜻있는 인사들과 민초들의 의분(義憤)이 도처(到處)에 숨을 죽이고 있었으니 힘을 모으는 데 큰 몫을 하였다.

-부사 이보흠과 주획(籌劃)을 담당하던 허윤공(許允恭)은 소백산 준령을 넘어 영월과 순흥 사이 소통의 길을 열었다.

-단종복위 의거 준비기간: 세조 2년(1456) 6월 27일〜세조 3년(1457) 6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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