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문화 발전을 이끈 역사의 공간
​​​​​​​대동사회를 꿈꾼 유의(儒醫)의 맥

 

①영주향교 ②영주여고 ③영주시의회 ④식치원 ⑤중앙통삼거리 ⑥동성당 ⑦상망동행정복지센터 ⑧하망동우체국 ⑨중앙교회 ⑩중앙초등
①영주향교 ②영주여고 ③영주시의회 ④식치원 ⑤중앙통삼거리 ⑥동성당 ⑦상망동행정복지센터 ⑧하망동우체국 ⑨중앙교회 ⑩중앙초등

부석사와 수소서원, 소백산이 있는 우리고장 영주는 도심에도 볼거리가 많다. 후생시장(일제시대 건물)과 중앙시장, 구성마을은 도시재생 사업이 이뤄졌고 그 주변은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역사거리로 지정됐다. 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도시의 찐 매력에 서서히 빠져든다. 본지는 모두 알고는 있지만 무심코 지나치거나 무관심했던 원도심의 새로운 매력을 재조명한다. [편집자 주]

‘광복로 장소가치 향상사업’ 2019년 부터 광복로 길가의 곳곳에 걸려있던 현수막에 제목처럼 붙어있던 말이다. 2020년 2월 기본계획이 영주시에 보고가 되면서 그 실제를 알 수 있었다.

이 사업은 광복로에 있는 역사 문화적 보존 가치가 있는 자원을 활용하여 문화체험 및 교육공간을 조성하면서 역사문화거리를 구현하는 일이었다.

여러 사업 중에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역사문화거리 거점 조성 사업인데, 대표적인 것이 상망동행정복지센터 옆에 조성하는 ‘한방힐링센터 동성당’과 중앙통 삼거리에 조성하는 ‘시간의 창 프로젝트’이다.

이를 통해 광복로 서쪽 지역(풍기통로)에 조성되는 ‘근대역사문화 거리’와 연결하여 광복로의 동쪽(봉화통로)인 이곳에 거점 시설을 마련하면서 광복로 전체를 역사문화거리로 만들 수 있다는 큰 그림이었다.

영주읍사무소 시절의 하망동(1961년)
영주읍사무소 시절의 하망동(1961년)

영주향교 가는 길

영주향교는 1368년 군수 하륜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정도전의 아버지인 정운경(1305〜1366)이 영주(榮州)와 복주(福州: 안동)의 향교에서 수학했다는 기록이 있어, 창건 시기가 훨씬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후 영주향교는 지역의 변화를 지켜오면서 문화를 이끌어 왔다. 고려말과 조선초의 격변기에 새로운 인재를 키워왔음은 물론이고, 조선이 끝날 무렵에도 많은 역할을 한다. 1881년 영남만인소의 출발지였고, 1911년 영주초등학교, 1943년 영주농업중학교, 1952년 영주여자중학교가 시작한 곳도 이곳이었다.

영주향교는 철탄산 중턱에 있다. 향교로 가는 길은 중앙통 삼거리에서 출발해서, 상망동행정복지센터와 현재 공사 중인 ‘한방힐링센터 동성당’ 사이를 지나 철탄산 동쪽 기슭에 보이는 영주여자고등학교를 보면서 오르면 된다. 아마도 향교를 만들었던 고려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래서 중앙통삼거리에 ‘시간의 창 프로젝트’를 마련하는 모양이다.

상망동사무소 시절의 하망동(2021년)
상망동사무소 시절의 하망동(2021년)

중앙통삼거리를 예전에 ‘소방삼거리’라 부른 적이 있었다. 가든빌딩이 있는 자리에 소방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방서 옆에 홍익대학교 미대학장을 하셨던 고 이두식 화백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집(영주사진관)이 있었는데 지금 ‘백현우외과의원’ 쯤이다. 그리고 도로 건너편 4층 허찬욱이비인후과 자리에는 중국집이 있었고, 건물 옆 골목 안쪽엔 강원연탄 공장이 있었다.

중앙통은 1970년대까지 영주에서 가장 큰길이었다. 일제시대에 영주역(현 중앙시장 자리)을 계획하면서 구 역전통에 서던 ‘오일장’을 이곳으로 유도하기 위해 만든 장터가 길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중앙통은 늘 장사꾼들로 넘치는 큰 시장이었다. 또 가끔씩 밤에 영화를 보여 주었던 ‘가설극장’도 이 거리였다. 낡은 필름 탓인지 화면엔 늘 비가 내렸다.

이제 어떤 영화를 봤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대한 뉴스에서 왼손잡이 권투선수 김기수가 세계챔피언이 되는 것을 본 것은 이곳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더 유명했던 것은 선거유세장이었다. “말 잘한다 ○○○, 돈 잘 쓴다 ○○○, 찍어주자 ○○○”는 소리가 어린 우리에게도 들려올 정도로 선거 바람은 세찼다. 그때 말 잘하는 그 후보가 이번에 떨어지면 죽어버린다고 칼을 단상에 두고 유세를 했다는 일화는 오래도록 유명했다.

중앙통 선거유비(1960년대)
중앙통 선거유비(1960년대)

새로운 쉼터 ‘한방힐링센터 동성당’

‘한방힐링센터 동성당’은 동성당한약방을 역사문화거리로 만들어가는 광복로의 중심센터로 새롭게 조성하는 공간이다. 이 건물의 역사는 100년 쯤 되는데, 고급 술집을 하던 이곳에 이 한약방이 터를 잡은 것은 1970년쯤이었다고 한다. 그 무렵, 이 부근에는 한약업을 하는 곳이 많았다.

현재 가까이에는 중앙교회 앞에 있는 태형한의원과 하망동우체국 건너편에 삼성한의원이 있지만, 예전에는 동성당에서 중앙통 삼거리 사이의 큰길 가에 보원당한약방과 대동한의원이 있었고, 좀 멀리로는 화생한의원, 재생한의원, 동일당한약방 등이 골목길을 지켰다.

그 시절 한약방은 특별한 공간이었다. 그냥 한약재만 파는 곳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하는 공간이었다. 광복 이후 의료 혜택은 모든 이에게 고르게 돌아가지 못했다. 병원이나 약국은 큰 도회지에나 있어서 아프면 큰일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때 우리를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곳, 아프면 찾아갈 유일한 곳이 한약방이었다. 어떤 때엔 한약방에서 보약 한 재 지어서 달여 먹고 낫기를 기다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집집에 약탕기는 하나씩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한의학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고난을 맞이한다. 일본은 우리의 전통을 말살하는 정책들을 많이 시행했는데, 의료 분야도 그중 하나였다. 국립의료기관인 광제원에서는 한의사들을 몰아내기까지 했다. 1915년부터는 한의사의 지위를 ‘의생(醫生)’으로 격하시키고 의료행위를 원천적으로 못하게 했다. 이러한 탄압으로 의생을 비롯한 한의학 종사 인력은 차츰 줄어들게 된다.

의생은 1914년 5천827명에서 1943년 3천327명으로 절반가량 줄었다. 그런데 1914년 조선인 한약종상(韓藥種商) 개업자는 7천601명인데, 1936년 말에는 7천988명이다. 이런 숫자는 당시 의생 3천739명의 두 배를 웃도는 것이다. 그렇게 한의사 지위 낮추고, 한약종상은 인정하면서 우리의 전통, 한의학을 죽여나갔다.

중앙통(2020년)
중앙통(2020년)

유의(儒醫) 정신을 이은 동성당한약방

하지만 우리 한의학의 맥을 쉽게 끊어낼 수 없었다. 그것은 ‘백성을 치유하는 선비 의사’ 즉 유의(儒醫) 정신이 한의학의 맥으로 이어왔기 때문이다. ‘유의’는 직업으로서 돈을 벌기 위해 의술을 사용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치유하기 위하여 의술을 펼쳐야 한다는 소명(召命)이 있었다.

그래서 일제(日帝)를 거치면서 백성들의 의료를 담당하는 본래의 영역을 넘어 더러는 자신의 한의원을 독립군 군자금 확보를 위한 기지로 활용하면서 몰래 헌신했다고 한다.

영주의 ‘유의’의 역사는 깊다. 구학공원에 있는 제민루(濟民樓)는 그 정신을 이어온 상징적인 공간이다. 이름 그대로 백성을 구제하는 누각이다. 세종 5년에 세운 이 정자는 지역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의국(醫局)이고 의약소(醫藥所)였다.

제민루 중수기에 “진기한 약재를 모아서 쌓아두고, 위로는 태의원의 공물을 갖추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병을 치료하니, 누(樓)를 제민(濟民)이라고 이름한 것도 이것이었다.”고 전한다. 태·소백 양백지간에 있던 영주였기에 약재를 많이 확보할 수도 있고, ‘유의’들이 있었기에 이를 운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방 힐링센터 동성당
한방 힐링센터 동성당

이곳을 거쳐간 유의들은 많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황과 이석간이다.

이황은 제민루에서 공부를 했다. 중국 도가의 『구선활인심법(臞僊活人心法)』이라는 심신수련서의 내용을 요약하고, 직접 ‘도인자세도(導引姿勢圖)를 그리고 정리한 『활인심방(活人心方)』을 만든 곳이 이곳이었다. 부인과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불행에도 70세까지 장수했던 퇴계 이황의 건강 비책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또 이석간은 병 잘 고치는 선비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이 명성은 중국에까지 퍼져나가 명나라 신종(新宗) 황태후의 불치병을 고쳐준 얘기는 전설처럼 전해져 오고 있다.

영광중학교 서쪽에 있는 고택은 중국에서 그 보답으로 지어준 집이라고 한다. 『이석간경험방(李碩幹經驗方)』, 『이석간방(李碩幹方)』, 『삼의일험방(三意一驗方)』,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 등 경험방서는 그 당시 우리 한의학의 수준을 가늠하게 해주는 뛰어난 내용이라고 한다.

유의의 활약이 조선 시대에 두드러졌던 것은 의학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백성들을 편안하게 돌봐야 한다는 치자(治者)의 원리를 표방하는 유학의 학문적 지향점과 일맥상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이념은 일제의 탄압 속에 명맥을 유지하여 해방 이후 다시 이어지게 된다. 우리 지역에서 그 대표적인 곳이 ’화성한의원‘이었다.

김동철(金東澈)은 6.25 사변 직후, 현 365시장 안에서 한의원을 시작했는데, 이후 영주향교의 전교(典校)까지 한 유학자이다. 김진영(전 영주시장)은 사랑엔 유림(儒林) 어른들이 끊이질 않았다며 어린 시절의 아버지를 회고한다. 아마도 그 어른들은 사랑에 모여서 지역과 이웃에 대한 걱정으로 하루를 보내지 않았을까?

‘동성당한약방’을 운영한 신문웅도 젊은 시절 화성한의원에서 한의학을 배운 것으로 전해진다. 그 영향이었을까? 신문웅도 한약방을 운영하면서 주말이면 어려운 이웃을 위해 무료 급식을 했다. 그 일은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膾炙)되고 있다. 이 모두가 유의의 맥을 이은 것이 아닐까?

시간의 광장과 중앙통 삼거리
시간의 광장과 중앙통 삼거리

중앙통에서 시간여행

현재 중앙통은 계속 진화한다. 이 길에 새로 생기는 대표적인 업종이 의원(醫院)이다. 이비인후과, 외과, 정형외과, 안과, 가정의학과, 한의원 등 종류별 의원들이 다 있다. 이제 한의와 함께 양의도 여기서 자리를 잡아가는 모양새이다. 또 음식으로 몸을 치유하는 ‘식치원(食治院)’도 동성당 뒤편에 자리를 잡고 있어 금상첨화이다. 그리고 먹거리로 오랜 세월 한 자리를 지켜오는 고마운 곳도 있다.

삼계탕 식당 중에서 영주에서 제일 오래된 ‘풍기삼계탕’(하망동우체국 뒤)이나 고향을 찾아온 사람들이 늘 다시 찾는 쫄면집인 ‘중앙분식’(동산정형외과 옆), 안심하고 찾아간다는 ‘중앙식육식당’(서울치과 옆)은 모두 40년이 넘은 맛집들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시간여행도 가능하다.

그리고 향교를 지나 철탄산에 오르는 것은 힐링 여행이다. 거의 숲속을 걷는 길이어서 도심 속에서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해발 276m의 철탄산과 309m인 성재를 중심으로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철탄산을 오르내리는 시간은 4〜50분 정도의 짧은 길이지만, 경사가 만만하지 않다. 철탄산 정상에 운동기구와 정자가 있다. 시간이 허락하면 성재까지 갈 수도 있는데, 제1성재까지는 8〜90분, 제2성재까지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오공환 기자 / 김덕우 작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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