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가 시작된 성지(聖地), 구성공원, 서민의 삶을 살필 수 있는 구성마을

 

구성공원과 그 주변. ①불바위 ②할배목공소 ③할매묵공장 ④포교당 ⑤청과시장 ⑥소백풍물 ⑦반구정 ⑧가학루 ⑨현대프라자 ⑩서구대 ⑪동구대 ⑫정도전 생가터
구성공원과 그 주변. ①불바위 ②할배목공소 ③할매묵공장 ④포교당 ⑤청과시장 ⑥소백풍물 ⑦반구정 ⑧가학루 ⑨현대프라자 ⑩서구대 ⑪동구대 ⑫정도전 생가터

부석사와 수소서원, 소백산이 있는 우리고장 영주는 도심에도 볼거리가 많다. 후생시장(일제시대 건물)과 중앙시장, 구성마을은 도시재생 사업이 이뤄졌고 그 주변은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역사거리로 지정됐다. 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도시의 찐 매력에 서서히 빠져든다. 본지는 모두 알고는 있지만 무심코 지나치거나 무관심했던 원도심의 새로운 매력을 재조명한다. <편집자 주>

구성(龜城)은 구산산성(龜山山城)을 줄인 말이다. 하지만 이곳을 산성(山城)으로 생각하는 이는 많지 않다. 성의 형태가 거의 사라진 탓도 있지만, 우리가 살았던 시기엔 이미 공원이었기 때문이다. 구산(龜山)이란 말은 그 형태가 마치 거북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인데, 산의 북쪽에 있는 불바위는 영주의 성스러운 장소이다.

예천통로 (1914년)
예천통로 (1914년)

그럼 이 성은 언제 축성되었을까?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경상도지리지』에 홍무갑술년에 돌로 쌓았다고 되어 있다. 홍무갑술년은 1393년으로 조선 태조가 즉위한 지 2년이 되는 해이다. 그런데 이 책에는 시축이라고 했다.

하지만 대대적인 개축(改築)이 아니었을까? 아직 남아 있는 성벽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크기의 돌들은 이 성이 여러 시대에 걸쳐 개축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시기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예천통로-아카데미 모텔에서 찍은 현재
예천통로-아카데미 모텔에서 찍은 현재

구성공원과 성밑마을

구성공원에 오르면 성의 자리로 적격임을 바로 알 수 있다. 영주 시가지를 눈 아래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풍기, 봉화, 안동, 예천에서 들어오는 길과 차의 움직임을 한눈에 살필 수 있다. 또 멀리 동쪽으로 문수산(文殊山)과 일월산(日月山), 남쪽으로는 학가산(鶴駕山), 서쪽과 북쪽으로 소백산(小白山) 연봉들이 파노라마처럼 보인다.

영주로 들어서는 사람들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도 구성공원이다. 그래서 영주사람들은 영주를 떠날 때나 영주에 들어설 때, 구성공원부터 살핀다. 그것은 옛 생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 가지지 못한 게 너무 많았던 그 시절, 영주가 가진 유일한 휴식공간이었다.

삶에 지쳤을 때, 자신의 집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공간이었고, 멀리 부모님이 계신 고향마을의 하늘을 바라볼 수 있던 장소였다. 옛날 사진 중에 공원 안을 배경으로 한 사진보다도 공원에서 보이는 이곳저곳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더 많은 것은 이런 연유가 아닐까?

불바위(1950년대)
불바위(1950년대)

그리고 오늘날도 구산의 동쪽마을을 ‘성밑마을’로 부르고 있는데, 영주의 역사도 이 산성의 조성과 함께 발달한 성 아래 취락인 이 마을과 궤를 같이한 것으로 보인다. 성 아래의 이 마을은 자연스럽게 길의 중심이 된다.

불바위 옆 할배목공소에서 그랜드컨벤션 쪽으로 가는 골목길로 그 흔적이 남은 옛 안동통로와 아디다스 뒤 골목길 사거리에서 소담마을 카페와 아카데미장 여관으로 가는 예천통로는 영주의 중요한 길이었다.

그리고 이 길은 불바위에서 뒷새(두서)까지 이어져 풍기통로가 된다. 하지만 1940년 중앙선 철로가 나면서 이 길은 끊어지고 사람들은 새길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예천통로 영주감리교회와 아카데미장 여관사이에 정도전의 생가인 삼판서고택이 있었다.

1950년대에 현재의 시민회관 부근에서 찍은 동구대와 서구대가 있는 풍경
1950년대에 현재의 시민회관 부근에서 찍은 동구대와 서구대가 있는 풍경

성밑마을과 함께 형성된 ‘재인촌’도 있다. 광대와 백정들이 살던 곳이었다. 그 자리는 불바위에서 영주포교당 사이쯤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우연히 자리를 잡았는지는 모르지만, 구성새마을금고 뒤편에 형성된 청과시장 옆에 소백풍물단이 30년 가까이 터를 잡고 있어서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다.

영주지역의 지명은 내이(奈已), 내령(奈靈), 강주(剛州), 순안(順安)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대동지지』에 고려 성종 때에 구성(龜城)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구성’은 영주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구성은 예부터 영주의 상징이지 않았을까?

아카데미 모텔에서 봉송대 가는 길
아카데미 모텔에서 봉송대 가는 길

구산산성과 구성공원

구성은 나지막한 정상부를 돌아가면서 축조된 퇴메식의 석축성이라고 한다. 전체적인 형태는 부정형이며 구산이라는 이름과 걸맞게 거북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1961년 영주대홍수로 인한 물길 변화가 있기 전에는 서천의 물길이 수직으로 부딪히고 돌아서 흐르는 형세였다.

그래서 성의 서쪽과 북쪽 부분은 천연의 해자(垓字)와 암벽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성의 동쪽과 남쪽도 성벽의 아래쪽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천혜의 요새로서 조건을 잘 구비하고 있다.

예전의 모습은 둘레가 1,191척(360m)이고, 높이는 9척(2.7m)이며, 우물도 하나 있었고, 성내에는 2결 14부(2.14ha)의 농지와 군창(軍倉)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그 어느 것도 찾을 수 없다. 현재 공원 안에 있는 정자와 집은 그 이후에 조성된 것이다.

공원 꼭대기에 있는 정자는 가학루(駕鶴樓)이다. 본래는 동헌 앞 누문(樓門, 현 영주초등학교 자리)으로 건축 연대는 알 수 없고, 1922년 동헌을 헐고 학교를 지으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누각 현판의 남면은 김규진(金圭鎭)이, 북면은 강벽원(姜璧元)이 쓴 것이다. 그래서 1914년에 찍은 사진에는 정자가 없다.

할매묵식당과 묵공장
할매묵식당과 묵공장

가학루 서쪽에 있는 반구정(伴鷗亭)은 고려 말 김해 부사를 지낸 권정이 고려가 멸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1392년 고향인 안동 임하에 낙향하여 세운 정자인데, 1780년 후손들이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원래 이름은 “옛 고려로 돌아온다.”라는 뜻으로 반구정(返舊亭)이었는데, 후학들이 왕의 미움을 살 것을 걱정하며 반구정(伴鷗亭)이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예전엔 옆에 구호서원(鷗湖書院)이 있었는데,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없어졌다.

이 외에도 가학루 북쪽에 춘수당 (春睡堂)과 대은정(大隱亭)이 있는데, 모두 1700년 전후에 지은 건물이다. 대은정의 다른 이름은 아맹정(啞盲亭)이다. 병자호란 당시에 의병을 일으켜 충북 청풍까지 갔을 때, 치욕적으로 굴복했다는 비보를 듣고 산에 올라 통곡하고 귀향 후 벼슬길을 끊고 자호를 아맹(입은벙어리, 눈은 봉사요)이라 부르면서 지은 당호이다. 그리고 춘수당은 제갈공명이 ‘와룡초당(臥龍草堂)’에 숨어 봄날 낮잠을 즐긴 일화에서 유래하였다.

할배목공소
할배목공소

동구대와 서구대 그리고 봉송대

‘동구대(東龜臺)’는 공원의 남서쪽, 아카데미여관 뒤편으로 구성공원 서편 주차장으로 가는 길 왼편에 우뚝솟은 바위 봉우리이다. 서구대(西龜臺)는 중앙선 철길 건너 영주2동사무소 뒤편 대순진리회 교당 뒤편에 있는 바위 산 둔덕이다.

예전 서천 물길이 시민회관 앞을 지나 상공회의소 앞으로 흘러내릴 때, 동쪽에 있는 봉송대 바위 봉우리가 마치 거북이가 물을 찾는 형상이라 하여 ‘동구대(東龜臺)’라 하고, 대순진리회 교당 뒤편 산 둔덕 바위는 서쪽에 있는 거북이가 물을 찾는 형상이라 하여 ‘서구대(西龜臺)’라 불렀다고 한다.

동구대는 그 옆구리에 굴이 있어 용궁(龍宮)이라하고 석벽에 ‘계심대(溪心臺)’라는 석자가 새겨져 있으며 집의(執義) 송인창(宋仁昌)이 늘 이곳에서 놀았다 하여 ‘집의대(執義臺)’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봉송대(奉松臺)는 동구대 위에 있는데, ‘반구정’을 옮겨 지을 때 다시 지었다고 한다. 봉송대란 말의 의미는 고려의 수도인 송도를 받든다는 뜻이다. 봉송대와 구성공원 사이에 주차장이 조성되고 있는데, 이곳은 ‘구호동’이라 불리던 작은 마을이 있었다.

도시재생과 구성마을

구성공원 북쪽 산자락에 ‘불바위’가 있다. 이 바위 북쪽에 ‘뒷새’마을이 있는데, 그곳에 원인 모를 화재가 자주 발생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유명한 풍수장이가 이 고을을 지나다가 이 바위를 쳐다보고 “바위 봉우리가 활활 타오르는 불꽃 형상을 하고 있어 고을에 화재가 자주 발생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처방으로 바위 서편 아래에 넓고 깊은 못을 파서 물을 가득 채웠다고 한다. 당시 바위 아래 파놓았던 못은 구호(鷗湖)라고 불렀는데, 1961년 7월 11일 영주 대홍수로 인하여 없어지고 지금은 구성마을이 들어서 있다.

‘구성마을’은 영주 수해 때 갑자기 생겨난, 65세 이상인 주민이 74%에 이르는 초 고령화된 마을이다. 건물도 낙후됐지만, 더 큰 문제는 좁은 골목길이었다. 마을 안쪽에 있는 집들은 수리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2014년 영주도시재생사업을 시작하며 구성공원과 접한 마을 안쪽으로 길부터 내면서 마을 살리기 작업을 시작하였다.

“노인이 행복한 구성마을”로 만들기 위해 마을의 어르신들이 힘을 모았다. 그 대표적인 사업이 ‘할매묵공장’과 ‘할배목공소’이다. ‘할매묵공장’ 구성마을 주민들의 참여가 큰 역할을 했다. 할머니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인 ‘묵’을 이 마을의 콘텐츠로 결정하고 새로 난 마을 안길 옆에 공장을 만들었다.

큰 공장은 아니지만 직접 기른 재료에 부모의 마음을 담아 손수 만든 메밀묵과 두부는 입소문을 타고 전국 각지로 판매된다고 한다. 이제 공장 옆에 식당까지 마련하고, 묵과 두부의 생산과 판매를 분업화한 업무체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할배목공소’는 마을 할아버지들이 중앙시장 청년들에게 목공 일을 배워 집수리, 도색, 목공예품 등을 제작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아직 할매들의 인기를 따라가기에는 부족하지만, 열정만큼은 뒤지지 않는다. ‘할배목공소’는 불바위 옆에 있다.

구성마을에서 구성공원 즐기기

구성으로 오르는 길은 세 길이 있다. ‘365시장에서 영주포교당 쪽으로 오르는 길’과 ‘영주서부지구대에서 반구정 앞으로 오르는 나무계단’, 그리고 ‘동구대 위에 서 있는 봉송대 맞은편으로 난 계단길’을 오르는 것이다.

모두 편한 길이지만 옛 물길을 생각하며 걸을 수 있는 반구정으로 오르는 길을 추천하고 싶다. 삼판서 고택에서 서구대와 동구대를 찾아가며 반구정 쪽으로 오른다면 더 의미 있는 걷기가 될 것 같다.

구수산(龜首山), 구학봉(龜鶴峰), 서구대(西龜臺), 동구대(東龜臺), 구성(龜城)으로 이어지는 ‘구(龜)'로 이어지는 길을 걸으며 거북이처럼 천천히 걸어보자. 그리고 반구정에서 봉송대로 가는 산 아랫길로 가면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이란 암각(巖刻)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구성마을에서 묵과 두부를 먹는 것도 별미이다. 그런데 사시사철 싱싱한 과일을 구할 수 있는 청과시장이 365시장에서 영주포교당으로 가는 길 옆에 있다. 청과시장에서 옛 안동통로를 걷다가 현대프라자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예천통로로 꺾으면 바로 오른쪽에 ‘소담카페’가 있고, 그 맞은편에 ‘밀엔슈’가 있다. 그리고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예뜰’이 보인다. 커피향이 참 좋다.

오공환 기자 / 김덕우 작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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