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빈의 용사록(龍蛇錄) ②

불천위 제사를 모시는 취사별묘(부석 감곡)
불천위 제사를 모시는 취사별묘(부석 감곡)

병사들 군기 법도 없어 왜적을 보면 먼저 달아나 숨어버렸다
7.15 왜적 감천까지 침입, 18일 군의 북쪽 애전 생달로 피난
안집사 김륵, 향병장 김개국(영주)·박전(풍기)·이개립(예천)

취사(炊沙) 이여빈(李汝馪,1556~1631)은 부석 감곡 출신으로 당시 지역 유림 대표자로 활동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영주를 지키는 일에 앞장섰고, 만년에는 영주지(榮州誌)를 집필한 사람으로 역사에 길이 빛날 선비요 학자요 시인이었다.

나라의 앞날을 걱정한 기록인 「용사록」은 바로 유학을 공부한 선비로서 국난의 시기에 나라의 미래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시대적 사명으로 인식하고 지은 것이다.

그는 출세를 원하였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지만 혼탁한 세상에 다른 사람들처럼 출세를 위해 도의에 벗어나는 일은 하지 않았고, 고향에 은둔하여 분수에 맞는 삶을 살았다. 즉 그는 시대에 영합하지 않고, 자신의 부귀와 영화를 위해 절개를 굽히지도 않았으며, 선비로서 지조를 잃지 않고 오로지 자신을 수양하며 그 정신을 실천하는 데 집중했다.

취사 이여빈의 묘(부석 감곡 앞산)
취사 이여빈의 묘(부석 감곡 앞산)

왜적 감천 침입, 생달(오전)로 피난

왜적들이 처음에 조령(鳥嶺)을 넘었을 때는 서울을 범궐(犯闕)하는 일에 급박하여 주요 공격로(攻擊路) 곁의 고을에 난입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으나 5월 보름 이후 비로소 용궁현(龍宮縣)과 예천군(醴泉郡) 사이를 불태우고 겁박하였다.

이에 안집사 김륵(金玏,1540~1616)이 곁에 있는 읍의 군대를 조발하여 6월 초 9일에 나아가 왜적을 치기로 하였다. 그러나 병사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고 또한 군기와 법도가 없어서 대략 모두 외적을 보면 먼저 달아나 숨어버렸다. 당시 용궁 현감 오복룡(禹伏龍,1547~1613)과 예안 현감 신지제(申之悌,1562〜1624)가 영주 군수와 봉화 현감이 도망을 가서 숨은 것을 보고 홀로 개탄하며 군진에 머물러 기다리고 있었다.

이로부터 왜적의 무리들이 승승장구하여 용궁현과 예천군 사이가 모두 함락되어 버렸고, 깊숙이 감천(甘泉)까지 침입하여 왔는데 감천은 곧 안동의 속현으로 영주까지는 겨우 30리에 불과하니 사람들이 모두 당황하고 놀라서 분망(奔忙)하게 피난하였다.

취사선생 문집 天(地人 (3책)
취사선생 문집 天(地人 (3책)

집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올라가고 산에 올라간 사람들은 더 깊이 들어갔다. 고을 군수가 모아놓은 양식과 가재도구를 다시 흩어버리고 용궁 현감 우복룡과 더불어 군의 북쪽 애전(艾田)에 있는 생달동(生達洞)으로 피하여 숨어버렸다.

나 또한 집에 있을 수 없어서 18일날 처자를 거느리고 생달동 곁으로 피난하였다. 왜적들은 영주로 들어오지 않고 곧바로 안동으로 달려가니 영주의 한 지경이 특별히 병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감히 산에서 내려오지 못했는데 조석으로 왜적들이 다시 와서 도륙(屠戮)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취사문집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취사문집

의병 조직 및 활동

7월 이후 비로소 곽재우와 제공(諸公)의 의병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경상좌도의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켜 여기에 호응하려 하고 안집사도 이를 따라 그들에게 의병을 일으키기를 권장하였다.

예안에 거주하던 교서관권지(校書館權知) 유종개(柳宗介,1558~1592)와 안동에 거주하던 생원 임흘(任屹,1557~1620)이 비로소 춘양으로부터 의병을 일으켜 수백 명의 장정들을 불러 모았으니 이른바 내성(乃城)의 의병이다.

강원도로부터 불의의 습격을 가해온 왜적들을 갑자기 만나 유종개는 전사하고 임흘은 겨우 몸을 피했다. 강원도로부터 온 왜적이 곶적(串赤)과 눌천(訥川)의 지경을 침범하였는데 곶적은 곧 풍기 땅이고, 눌천은 곧 영주의 지경이다.

문집 6권 3책 중 3권 속 '용사록'
문집 6권 3책 중 3권 속 '용사록'

영주지역 향병 조직

당시 경상좌도안집사 김륵은 승병(僧兵)들을 수백 명이나 불러 모았고, 관군(官軍) 또한 천여 명이나 되었는데 안집사가 곧 그 군사들에게 왜적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였고 또 이웃 고을에 장정들을 징발하여 요해처(要害處)를 나누어 지키니 왜적들이 의병들의 방비가 굳센 것을 꺼려 돌아서 물러가 버렸다.

가을 9월에 이르러 향병을 일으키자는 논의가 일어나 이를 결성하였는데 영주는 곧 성균관권지(成均館權知) 김개국(金蓋國,1548~1603)으로 대장을 삼고 충의위(忠義衛) 박록(朴漉,1542〜1632)으로 부장(副將)을 삼았다가 박록이 사직하여 그를 면직하고 생원 이흥문(李興門)으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안동은 곧 예안과 의성과 의흥과 군위를 합하여 한 군진으로 만들고 전검열(前檢閱)인 김해(金垓,1555〜1609)를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고 진사 배용길(裵龍吉,1556〜1609)과 생원 이정백(李庭柏,1553~1600)으로 부장을 삼았다. 예천은 곧 참봉 이개립(李介立,1546〜1625)으로 대장을 삼고, 풍기는 충의위 박전(朴淟)을 대장으로 삼았다.

영주의 의병(義兵)

내성(乃城:봉화) 의병들은 유종개(柳宗介,1558~1592)가 전사한 후로 임흘(任屹,1557~1620)이 이들을 거느렸고 임흘이 부친상을 당하자 이화가 이를 대신하여 대중을 거느렸다.

전검열인 김용(金涌,1557〜1620)도 또한 백여 명을 수습해 와서 이화와 더불어 합쳤다.

당시 김용이 안동수성장(安東守城將)이 되었는데 부사 우복룡(禹伏龍,1547~1613)이 이르러 옴에 김용이 드디어 와서 만나 서로 더불어서 함창 지경에다 복병(伏兵)을 설치하고자고 하여 당시에 왜적의 수급(首級)을 벤 것이 있었다.

영주의 의병은 처음에 향병(鄕兵)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그 후에 안집사가 안동부사로 바뀌어 제수되었는데 채 부임을 하기도 전에 우복룡에게 옮겨 제수되었다. 우복룡은 용궁 현감으로부터 당상관으로 단계를 뛰어넘어 제수되었고 또 안동부사로 옮겨 임명되었다.

안집사가 이미 임무에서 갈려나와 곧 집에서 거주하고 있었는데 남은 병사들을 모집하여 수백여 명을 얻어서 이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후 다시 안집사에 제수되는 명령을 받아 이에 모집한 병사들을 김개국에게 배속시키고 이들을 총괄하여 의병(義兵)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런데 병사들은 고을 선비들이 모집한 사람들로 모두 밥벌이를 위해 머슴을 살고 쟁기를 잡던 무리들로 활과 말에 익숙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오직 이들로 허장성세(虛張聲勢)를 하고 군사의 위용을 빛내며 날마다 깃발을 펼치고 북을 울리며 지경(地境) 위를 휘젓고 다녔는데 가까운 고을의 의병들도 많이 이와 같이 하였다.

김성일 후임 김륵 안집사

경상우도 감사인 김성일(金誠一)이 진주에 있다가 질병으로 사망했다. 공은 왜란의 처음으로부터 왕의 일에 마음을 다하여 어렵고 험난한 것을 피하지 않았고, 또 능히 백성을 사랑함에 마음을 두고 구황(救荒)하기를 겸하여 지극하게 하였다.

이럼으로써 군사의 사무가 제대로 이루어졌고 백성들도 또한 농사짓기를 폐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온전한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에 이르러 질병으로 죽으니 한 도(道)의 사람들이 친척을 잃은 듯 슬퍼하였다.

이에 안집사 김륵(金玏)으로 김성일을 대신하고 병마절도사 김면(金沔,1541〜1593)이 죽음에 또 의병장 최경회(崔慶會,1532〜1593)로 김면을 대신하게 하였다.

취사 이여빈의 후손들

용사록을 담고 있는 취사선생문집은 셋째아들 서암 이성재(李成材)가 처음 정리하여 간행하였고, 뒤에 증손자 이기정(李基定)이 정리하여 다시 3권으로 간행했다.

7대손 이시묵(李時默)이 재간행하면서 1824년(순조24) 이인행(李仁行)의 서문을 받고, 이시검(李時儉), 이시탁(李時鐸) 등이 1831년에 유심춘(柳尋春) 등의 서를 받아 그 해에 6권 3책의 목판으로 간행했다. 6권에는 취사의 현손 이진만(李鎭萬)의 지(識)가 첨부된 연보가 실려 있다. 이 문집은 오늘날 세계 유수 대학들이 소장하고 있어 세계유산으로 평가받고 있으니 그 후손들의 노력과 숭조정신에 감사와 경의를 드린다.

취사의 후손들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소수학풍 계승을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각계각층 지도자로 꿈을 키우고 있다. 취사의 14세손 이갑선 전 순흥향교 전교는 순흥 유림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다년간 소수서원운영위원장을 지냈다. 이도선 전 동양대학교 부총장 또한 취사의 14세손이고, 현 동양대 이하운 총장은 취사의 15세손이며 이갑선 전 전교의 아들이다. 또 이도선 부총장의 조카 이하원(주손)은 한국전력대구본부 서대구지사장을 지냈다.

「정유년(1597) 12월 명나라군대가 울산의 증성(甑城)에 머물고 있던 가등청정(加籐淸正,1562〜1611)의 군진을 포위하고 13일을 서로 버텼는데 가등청정의 왜적을 거의 포획하였으나 능히 섬멸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로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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