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보물을 찾아서[42] 이여빈의 용사록(龍蛇錄) ①

취사 선생이 평생 학문하던 마을(부석면 감곡리 감실)
취사 선생이 평생 학문하던 마을(부석면 감곡리 감실)

‘용사록’은 임진왜란 전황과 역사적 사실, 영주지역 상황 기록
“고을 수령은 도망가고 피난 가는 백성들 행색이 참담했다”
국립중앙도서관·대학도서관·미국 버클리대 등이 소장한 세계유산

취사(炊沙) 이여빈(李汝馪, 1556~1631,우계 이씨)은 우리 사는 영주를 가장 아끼고 지키고 사랑했던 조선의 선비요 유학자요 시인이었다.

그는 1556년 9월 도촌(봉화) 옛집에서 태어나 이후 부석 감곡(감실)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어릴 적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통달하여 신동(神童)이라 하였고, 1585년(30세) 소수서원에 입원하여 수학했다. 1591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지역유림 지도자가 되고, 1592년(37세) 4월 임진왜란 발발 이후 8년간 영주와 나라가 혼란에 빠졌을 때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쓴 일기인 『용사록』을 후세에 남겼다.

1605년(50세)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등을 지냈고, 1625년(70세) 이산서원 원장 재임 시 「영주지(榮州誌)」를 집필했다. 1631년(76세) 3월 감곡 석양와(夕陽窩) 안방에서 세상을 떠났다.

용사록을 집필한 인수정(감곡)
용사록을 집필한 인수정(감곡)

후세 사람들은 그를 “평생 학문하면서 독선(獨善)과 겸선(兼善)의 진퇴를 조종하였고, 스스로의 수양과 진덕(進德)에 힘쓴 참 선비였다”고 그 위업을 추모했다.

선생의 일기를 용사록(龍蛇錄)이라 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임진년(壬辰年)의 진(辰=龍)에서 용 용(龍)자를 따고, 임진년 다음 해인 계사년(癸巳年)의 사(巳=蛇)에서 뱀 사(蛇)자를 따 ‘용사록(龍蛇錄)’이라 했다 한다.

「용사록(龍蛇錄)」은 취사선생문집 6권 3책 중 권3에 수록되어 있다. 1831년에 간행된 취사문집은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한 각 대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해외로도 나가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다. 이와 같이 취사 선생의 「용사록」은 세계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는 ‘한국의 고문서’다.

취사선생문집 표지(한국국학진흥원 소장본)
취사선생문집 표지(한국국학진흥원 소장본)

임진왜란 발발(勃發)

이여빈의 ‘龍蛇錄’은 「萬曆二十五年壬辰. 卽宣祖二十五年夏四月十三日」로 시작된다.

임진년(壬辰年,1592,선조25) 4월 13일 왜구들이 부산포로부터 상륙하여 부산진 수군을 공격하여 정발(鄭撥) 첨절제사가 전시하고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도 전사한다. 병마절도사 이각(李珏)은 부산진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영을 버리고 언양과 양산으로 물러가 숨었다.

감사 김수(金晬)는 우도독병마절도사로 있으면서 전쟁이 점점 다가오자 가야산을 향하여 도피할 계획을 세우고, 도내 선비들에게 “집안 집기들과 소금 및 간장을 깊이 묻고 멀리 산골짜기로 피난하라”는 명령을 전달하였다.

내(취사)가 의성향교에 있으면서 15일에 처음으로 난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고, 의성군수 이여온(李汝溫, 1547~1616)은 곧 군사를 조병(調兵)하였다.

22일 의성군수 이여온이 자신이 통제 아래에 있는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병마절도사에 배속시키고 돌아오다가 관청으로 가지 않고 민가에 물러나 있었다.

이날 내가 의성으로부터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는데 의성은 이틀 걸려 갈 수 있는 거리인데도 이 발걸음이 급박한 까닭에 장차 이튿날 아침에 닿으려고 겸정(兼程)하여 출발하였다.

마침 신강립(辛剛立)을 만나서 그와 함께 가는데 샛길을 따라가다가 신강립은 자기 집으로 들어가고 나는 밤이 이미 이경(밤9-11시)쯤 되어서 도촌(道村,봉화)에 이르렀다.

취사선생문집서(序)
취사선생문집서(序)

급박해진 영천(영주)고을

23일 정오에 감곡(鑑谷)으로 돌아왔다. 처남이 장차 피난을 하려고 이미 먼저 와 있었고, 밤새도록 피곤하여 누워 있다가 밤 이경쯤 장인(丈人)께서 백암(柏巖)으로부터 달려오셨기에 내가 놀라 일어나 옷을 입고 나가 절하니 곧 크게 소리치며 말씀하시기를 “일이 급박하네”라고 하셨다. 풍기군수 윤극임(尹克任)이 저녁에 읍내를 지키다가 말하기를 “일을 어찌할 수 없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군수 이한(李澣)은 이미 포위 가운데 들어가 있어서 생사를 알 수가 없었고, 왜적들은 지금 쳐들어와서 이르니 읍내의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목이 막히도록 달아나 도피하니 관청과 여염(閭閻)집이 한결같이 텅 비었다. 서울에서 온 장교와 사졸들이 공억의 재물과 장막의 등속을 기다리다가 버려두고 간 것이 낭자(狼藉)하였다고 말하더라.

취사선생문집 6권 3책 속 용사록(제1면)
취사선생문집 6권 3책 속 용사록(제1면)

피난 가는 백성들 행색이 참담

24일 이른 아침에 가족을 이끌고 장인(金勖)을 모시고 임곡(부석)으로 갔다. 임곡은 곧 인의(引儀)로 있는 장인의 형님 농막이 있는 곳이다. 나도 또한 도촌으로 돌아왔는데 우리 집에서도 피난을 결정하려고 하였다.

피난길에서 보니 과연 피난하는 백성들이 있었는데 혹은 말을 타고 혹은 걸으면서 무수(無數)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옷을 끌고 발을 구르며 걸어가는 행색이 참담(慘憺)하여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오후에 도촌으로부터 딸아이를 데리고 감곡으로 돌아왔다.

인심은 무너지고 사람들은 흩어져

25일 왜적이 이미 영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영주군수는 미복으로 변장하고 피난을 와서 박환(朴桓)의 집에서 잠시 쉬다가 상황이 분망하여 도리어 나가버렸다고 한다. 나는 나가서 보지 못하였다.

정오에 모친을 모시고 왔는데 아우 여온(汝馧)과 여암(汝馣) 등이 각각 그 처자를 거느리고 내 집으로 피난 왔다. 삼종대부(三從大父)인 참봉 이주(李柱)는 와서 보고 서로 위로하며 낭패를 당하여 거의 죽게 되었다는 정황을 스스로 말씀하셨다.

공이 처음에 향임(鄕任)을 맡고 있음으로 해서 군사를 이끌고 전쟁터에 달려갔는데 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군수가 삼운군(三運軍) 가운데 도망자가 많이 있으니 흩어진 군사들을 도로 거두어 오라고 독촉하여 명하니 이미 도망간 군졸들은 마치 땅에 쏟은 물이 물병으로 돌아올 형세가 없는 것과 같았고 창졸(倉卒) 간에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해 잡으러 가지 못하였다.

봉화(烽火)는 서로 통하지 않았고 척후병은 믿을 수가 없어서 인심은 무너지고 흩어져 가히 수습할 수가 없었으며 길짐승과 날짐승들처럼 분주하게 내달려서 마을에는 거주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더라.

용사록 내용(제2면)
용사록 내용(제2면)

고을 수령들 모두 도망치다

4월 27일 방어사(防禦使)가 영주로부터 풍기로 돌아와서 “창고의 곡식을 모두 흩어버리고 모아서 쌓아둔 곡식도 모두 불태워 버리라”는 명령을 전하였고 “민가에 저장해 놓은 곡식들도 또한 모두 흩어버리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이 한번 내려감에 숨어있던 백성들이 일어나 도적이 되어 관청의 곡식을 죄다 훔쳐가 버렸고 또한 부유한 백성들이 저장하고 쌓아 둔 것을 공공연하게 대중들을 모아서 얼굴을 마주하고 약탈하고 훔쳐 가도 관청에서는 능히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주인들도 능히 그 종들을 제지하지 못하여 남쪽 오랑캐와 같고 서쪽 오랑캐와 같아서 기강과 법도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처삼촌인 참의(參議) 김륵(金玏,1540〜1516)이 안집사의 명을 받아 이날 비로소 부임하였는데 무너지고 흩어진 것이 이와 같아서 다시는 손을 댈 곳이 없어졌다.

풍기로부터 샛길을 따라서 대부인(大夫人)이 피난할 장소를 나아가 살펴보니 방어사와 제공들이 모두 죽령을 넘어 가버려서 한 도의 안이 다시 주인이 없어져 버렸고 상황이 급박하자 여러 고을의 수령들도 모두 더 머리를 싸매고 쥐구멍으로 쥐처럼 도망쳤다. 영주군수도 또한 영월군의 경계로 들어가서 강원도로 도망을 가버렸다.

한참 뒤에 곧 임금님(선조)이 평양으로 몽진(蒙塵)한 사실을 알았고, 평양 사정이 급박하여 또 의주(義州)로 몽진한 것을 알았다.

왜적들, 죽령 꺼려 조령 진격

죽령(竹嶺)의 길이 더욱 심하게 험난하고 좁아서 왜적들이 이것을 꺼렸다. 드디어 조령(鳥嶺)을 거쳐 진격하니 경상우도의 군과 읍이 많이 함몰됐다. 당시 경상우도방어사 이일(李鎰,1538〜1601)이 상주에 이르러 병사와 백성들을 불러 모았는데 겨우 2,000명을 얻었다.

대충대충 진영을 꾸렸으나 행세를 갖추기도 전에 갑자기 왜적들이 들이닥치니 마치 산이 계란을 누르는 것과 같아서 우리 군사들이 모두 섬멸되고 왜적들은 마침내 조령을 넘었다.

신립(申砬,1546〜1592) 장군도 충주에 와 있었는데 성을 버리지 않고 탄금대(彈琴臺) 아래 나와서 배수진을 쳤다. 왜적의 행세가 승승장구하여 그 형세가 비바람과 같아서 우리 군사들이 모두 쓰러져 감히 버틸 수가 없었다. 교만해진 왜적들은 행군을 멈추지 않고 곧바로 서울을 들이치고 나아가 선조가 계신 행재소(行在所)를 핍박하니 오호통재라(嗚呼痛哉).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