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로 욱일기를 몰아낸 자리, 아픔을 이겨낸 76년의 세월

영주 구도심 광복로
영주 구도심 광복로

우리가 할 일은 민족의 역량을 기르는 일이지 남과 연결하여 남의 힘을 불러들이는 일은 아니다. 나는 씨앗이 땅 속에 들어가 무거운 흙을 들치고 올라올 때, 제 힘으로 들치지 남의 힘으로 올라오는 것을 본 일이 없다. - 남강 이승훈

광복로는 롯데시네마 앞 삼거리에서 상망교차로에 이르는 길로서, 영주시가지에서 가장 오래된 도로이다. 1905년 11월 6일 일본군이 욱일기를 앞세우고 영주관아를 점령한 지 40년만인 1945년 8월 15일 태극기를 흔들며 광복을 맞이했던 길이다.

영주읍내전도(1926년)
영주읍내전도(1926년)

2021년 8월

이제 8월이 다 갔다. 참 편하지 않은 8월이었다. 코로나도 그랬지만, 펜데믹에 치루어진 올림픽은 옆에서 보기에 불편했다. 이전의 올림픽은 우리 선수들의 선전(善戰) 소식도 소식이지만, 젊음의 향연은 우리를 TV 앞에 앉게 만들었었는데 이번은 달랐다. 일본의 파렴치한 행위들이 즐거운 소식들의 이면(裏面)에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난 100년을 자꾸 돌아보게 만들었다.

2011년 본지에 게재된 ‘언론인 박하식의 평생 살아도 모르는 영주 이야기’가 생각났다. ‘해방되던 날 경찰서 앞 풍경’이란 글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영주장날, 일본 초등학교 1학년인 나는 어머니와 함께 영주초등학교 앞 느티나무 밑에 앉아 있었다. 젊은 청년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려 하고, 일본 순사가 못 들어오게 총을 쏘는 것을 해방이 뭔지 모르는 나는 보고 있었다.”

광복의 그날, 영주시민들은 이 길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경찰서로 몰려갔다. 1905년 11월 6일 일본군이 욱일기를 앞세우고 영주관아를 점령한 지 40년 만에 맞이하는 그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

옛 관아 자리에 들어선 관공서와 학교
옛 관아 자리에 들어선 관공서와 학교

누구를 지키는 수비대인가?

이 길의 중심에는 원래 영주관아가 있었다. 그런데 1916년 지도에 보면 관아 자리에 ‘수비대’라고 표기되어 있다. 수비대는 우리 군대가 아니라, 의병을 소탕하러 온 일본군대였다. 그들은 관아를 차지하고, 스스로 수비대라고 불렀다. 무엇을 지킨다고 수비대라고 했을까?

구한말 의병 항쟁은 단발령,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을사늑약 등 역사적 사건마다 의연히 일어났다. 그리고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 이후엔 13도 창의군을 결성하게 된다. 영주도 1896년 1월에 의병 활동에 참여한다. 하지만 일본군에 밀린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의병들은 소백산에서 최후의 저항을 하게 된다.

영주동 일대의 옛모습(1910년대) 철탄산 아래 가학루가 보임
영주동 일대의 옛모습(1910년대) 철탄산 아래 가학루가 보임

『대한매일신문』 1907년 11월 15일자에 이런 기사가 났다.

“본월 십일 오전 팔시에 신돌석의 거ᄂᆞ린 의병 삼백여명이 봉화군을 습격ᄒᆞ야 관샤를 충화ᄒᆞ였ᄂᆞᆫ데 영천군에 잇ᄂᆞᆫ 슈비대와 경찰관이 급히 갓다하고, 리강년이 거ᄂᆞ린 의병 이백명과 신돌석의 부하가 함께ᄒᆞ야 영춘디방으로브텨 순흥군을 습격ᄒᆞ야 관사와 민가가 일백팔십호를 소화하고 다시 영춘군으로 회군ᄒᆞ엿ᄂᆞᆫ데 영천군 슈비대가 쫏차갓스니 의병의 긔세가 창궐ᄒᆞᆷ으로 봉화와 순흥과 풍긔군 등디가 대단히 불안ᄒᆞ다.”

1907년 이강년 부대와 신돌석 부대의 의병 오백여명이 연합하여 순흥에서 수비대와 전투가 있었는데, 수비대에 의해 180호가 불에 타버렸다는 내용이다.

영주보통학교(1930년대)와 전 경북도립도서관 뜰로 옮겨진 석불입상(보물 60호)
영주보통학교(1930년대)와 전 경북도립도서관 뜰로 옮겨진 석불입상(보물 60호)

관아터에 세워진 침략자들의 관청들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순흥(順興), 풍기(豐基), 영천(榮川), 세 군을 합쳐 영주군(榮州郡)을 만들면서 영주에 군청이 세워지게 되고, 1942년에 중앙선이 개통되면서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중심 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우선 수비대가 영주관아를 점령하면서 가장 먼저 만든 것이 우편소였다. 그것은 각 지역 수비대와의 통신망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영주 지도(1916년)
영주 지도(1916년)

우편소는 현재 영주문화파출소 자리인데, 이후 우체국과 전신전화국으로 발전하다가 1972년 영주2동과 휴천3동으로 각각 이전을 하고 난 뒤, 영주경찰서의 파출소 건물을 짓게 된다. 지금 건물은 그때 지었던 모습 그대로이다. 이 형태는 당시 경상북도 도내에 지었던 파출소의 정형화된 모습이다.

경찰서의 위치는 현재 영주1동 행정복지센터 자리였다. 2015년 경찰서가 가흥동 현 청사를 새로 지어 이전하면서 파출소의 역할도 없어진다. 하지만 건물은 그대로 지켜 문화파출소로 사용하고 있다.

영주군청(1910년대)
영주군청(1910년대)

수비대가 있던 자리에 서부소학교와 고등소학교가 들어서는데, 그 자리는 현재 영주초등학교이다. 영주초등학교는 1911년 영주향교에서 개교했다가 1921년 현재의 자리로 옮기게 된다. 그리고 학교 뒤편, 철탄산 아래에 일본 신사가 만들어진다.

학교의 동쪽으로 맨 안쪽에 군청이 세워지고, 군청 앞에 법원 등기소와 헌병대가 들어선다. 군청은 1981년 영주시로 승격이 되면서 영풍군청으로 사용되다가 1994년 영주시와 영풍군이 다시 합치면서 영주시의회로 사용된다.

등기소와 현병대 자리는 현재 영주시의회 주차장이 되었다. 그리고 현 영주시청소년문화의집 자리엔 영주금융조합이 있었다. 1964년부터 영주교육청으로 사용하다가 2003년 가흥동으로 이사를 갔다.

영주경찰서(1937년)
영주경찰서(1937년)

수비대, 군청, 경찰서, 학교, 금융조합, 헌병대, 법원 출장소, 우편소…. 모두 일제강점기 우리의 아픔을 이끌어내던 공간이었다. 그런데 영천(영주)관아를 헐어내고, 관아 건물 목재를 백성들에게 팔았다고 한다. 그 안타까운 과정에서 관아의 문루였던 ‘가학루’는 뜻있는 유지들이 구성공원으로 옮겨 지어 현재까지 지켜오게 된다.

영주면사무소(1937년)
영주면사무소(1937년)

이젠 만행을 기억하고 이겨내야 할 때

의병들을 진압하며 관아를 점령한 수비대가 떠나자 그 역할을 경찰이 맡게 되었을 것이다. 영주는 항일운동을 끊임없이 해 온 곳이다.

대한광복단의 결성(1913년)과 군자금 모집을 위해 거점으로 개설한 ‘대동상점(현 동림당한의원)’(1915년), 3.1 만세운동(1919년), 1920년에 시작한 영주공립보통학교의 영주청년회, 기독내매학교의 영매엡윗청년회, 사회주의 계열의 영주청년동맹, 1927년 영주신간회 결성 등 민족운동을 전개했으며 이 운동은 1930년 영주격문사건을 주도하게 된다.

영주금융조합(1950년대)
영주금융조합(1950년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경찰서 순사들은 이들을 잡아들여 취조하며 고문을 자행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가족들과 친지들은 광복로 한편에서 경찰서를 바라보면서 잡혀간 이들을 걱정하면서 그들의 만행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광복을 맞이하던 날, 영주시민들이 이 거리로 몰려나온 것은 그간 우리를 짓누르던 그들을 향해 터뜨린 절규였을 것이다.

영주우체국(1960년대)
영주우체국(1960년대)
영주중앙파출소(1970년대)
영주중앙파출소(1970년대)

그래서 신사를 부수고, 곳곳에 있던 일본의 흔적을 지웠다. 영주초등학교 앞, 도로원표 옆에 있는 이정표를 보면 비석 뒷면에 ‘소화〇〇’인 듯한 표기가 시멘트로 발라져 있다. 그때의 한을 아직도 볼 수 있다.

이제 76년의 세월이 지났다. 아직도 우리 삶 속에서 남아있는 일본의 흔적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젠 지우기보다 잊기 않기를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일본을 이겨야 할 시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김덕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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