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영주의 비전, 넓은 세계를 무대로 삼아야…”

함기수 박사(재직중인 명지대캠퍼스에서)
함기수 박사(재직중인 명지대캠퍼스에서)

중국 주재원 16년, 세계 보는 안목 키워
퇴직 후 후학 양성...미래 비전 실현 도움

고향의 비전 ‘세계무대에서의 영주’ 강조
고향발전을 새롭게 그릴 넓은 안목 필요

우리고장 인구도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페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물고 있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주>

함기수 명지대 겸임교수
함기수 명지대 겸임교수

“바야흐로 세계화 3.0의 시대이다. 컬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15세기부터 18세기 산업혁명기 까지의 세계화는 국가가 주도했다.

이 시기를 세계화 1.0시대라고 한다. 이후 19세기에서 20세기는 다국적 기업들이 세계화의 첨병이었다.

이 시기를 세계화 2.0 시대라고 한다. 지금 세계화를 주도하는 것은 개인이다.

우리는 어느 곳, 어떤 상황에서도 세계 모든 정보를 세계 모든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생각의 수준과 폭, 넓이이다. 개인이나 조직, 지역의 비전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내 고향 영주의 비전은 보다 넓은 세계를 무대로 했으면 한다”

애향인 함기수의 고향 발전에 대한 비전이다. 그냥 학자의 의견을 빌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말이다.

어릴 때의 꿈을 이루고 다시 꾸는 꿈

많은 사람들이 어릴 때 꿈을 갖고 있지만 꿈을 실현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어릴 때, 나중에 나이가 들면 외국에 나가서 살고 싶기도 했고 교수를 하고 싶기도 했다.

외국에 나가고 싶어 직장생활을 종합무역상사에서 시작해 그 회사의 홍콩지사 주재원, 칭따오지사장, 중국본부장을 하며 16년의 삶을 중국에서 보냈다. 회사에 재직하며 틈틈이 공부하고 퇴직 후 본격 공부로 박사학위를 취득해 현재는 대학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이제 새로운 꿈을 꾸려고 한다. 바로 고향을 위한 꿈이다. 고향을 위해 활동할 구체적 방안이 아니라 비전을 이야기 한다. 고향이 가져야 할 비전으로 ‘세계무대에서의 영주’를 말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세계무대에서의 영주가 구체화되려면 고향 사람들의 많은 참여가 에너지원으로 작용할 것이다. 애향인들의 고향을 위한 기여는 고향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희망이기도 하다.

함기수 박사(젊은시절 고향친구들과 금선정에서)
함기수 박사(젊은시절 고향친구들과 금선정에서)

고향은 어머니의 품처럼 편한 곳

그가 태어나 자란 곳은 풍기읍 서부3리 속칭 참남배기이다. 우뚝 우뚝 참나무가 많았던 곳이다. 어린 아이의 걸음으로는 큰 길에서 한 참을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풍기역에서 멀지 않은 그곳에서 태어나 기차 소리를 들으면서 잠들고 기차 소리를 들으면서 아침을 맞이했다.

풍기북부초교와 풍기중을 마치고 서울사대부고를 졸업했다. 서울대 원예학과를 다니며 경영학을 부전공으로 하고 중국 해양대학교에서 경영학석사, 명지대 유통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석사, 명지대 경영대학원에서 국제통상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닌 학창시절의 기간으로 보면 고향에서 학교를 다닌 햇수 보다 훨씬 더 긴 학창시절을 외지에서 보낸 셈이다.

어린 시절의 날려갈 것 같은 겨울 풍기 바람과 가난, 기찻길 옆 소음은 즐거운 회상거리이다. 풍기바람은 동헌의 기왓장도 떨어뜨릴 정도였다고 옛 기록이 있을 정도인지라 이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또래들의 공통 화제이고 서로 자기네가 더 심한 바람 속에 살았다고 때론 억지(?)를 쓰면서 추억담을 이야기 한다. 그는 지금도 고향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가장 편하다고 한다.

집안 일로는 주로 명절 때에 고향에 들리지만 고향 친구들과의 고향에서의 모임은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다. 생활 터전인 서울에서 만나는 다양한 지인 모임이 있지만 고향 친구들과의 모임이 가장 편안하다고 한다.

요즘 코로나19의 창궐로 친구들과의 모임이 없어져서 참 아쉽다고 한다. 그가 태어나 자란 고향 집과 텃밭은 그대로이나 그 집을 계속 지키며 살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빈집으로 남아있다.

한국 회사의 중국주재원 1세대...비즈니스계 정통 중국통

중국의 개방 후 많은 사람들이 중국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중국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많아졌다. 함기수 박사는 젊은 시절 16년을 중국에서 살았다.

중국과의 수교 전부터 중국 비즈니스 업무를 담당해 중화권 지역 주재원으로 젊음을 바치고 2008년 금융위기 때까지 중국 생활을 했다. 중국의 개혁 개방 전부터 중국 비즈니스를 했다. 중국 개방 전인 1987년 선경(현 SK)그룹의 종합무역상사인 ㈜선경(현 SK네트웍스)의 홍콩지사로 부임해 한국과 중국의 간접교역의 중심에 섰다.

한중 수교 전인지라 당시 홍콩지사가 대 중국 통로이던 시절이었다. 1992년 한중 수교 후 북경 지사로 부임했다. 중국 대륙이 열리면서 한중 비즈니스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홍콩과 대만에 있던 한국 회사의 지사원들 중심으로 중국 본토 발령이 이어졌다. 중국과의 간접 교역지이던 홍콩과 대만 주재 지사원들로 중국 주재 발령을 받아 근무한 사람들은 그들 말처럼 중국에서의 비즈니스를 개척한 중국주재원 1세대였다.

함 박사는 ㈜선경(현 SK네트웍스) 홍콩지사 6년, 북경지사 2년, 칭따오지사 5년, 상하이지사 3년 주재원으로 근무하며 중국본부장까지 올랐다. 16년의 중국 주재원 생활은 격동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현재 한국의 수출 1위 지역이 중국이다. 전무하다시피 했던 한중 교역을 제1교역국으로 만들기까지 그 중심에서 활동했고 현장에서 중국의 변화와 굴기를 생생하게 체험한 것이다.

한중 관계를 역사적으로 볼 때, 그나마 우리나라가 대등한 입장에서 말하고 대우를 받는 시기를 현장에서 만들고 한국 제품이 고급 제품이란 인식을 중국에 심어준 민간 외교관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함 박사의 중국 체험은 대학생들에게 강의 때 마다 강의 소재로 풀려 나온다. 그는 현재 명지대 경영대학 겸임교수이며, 경찰대 외래교수, 한국무역협회와 한국생산성본부의 전임교수로 자신의 연구와 체험을 후학들의 미래 비전 실현에 도움이 되도록 강의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현장 체험을 바탕으로 한 그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면학 분위기 진작 뿐 아니라 의욕을 북돋는 역할도 한다. 지금도 함 박사는 중국에 대해 공부를 하고 중국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을 만나며 변화하는 중국을 파악하고 있다.

강의는 전달 대상이 한정돼 있어 관련 책을 쓰고 칼럼을 집필하고 있다. 저서로 『중국, 주는 만큼 주는 나라』, 『마케터, 마케팅을 말하다』(공저)가 있고 칼럼으로 ‘함기수의 중국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중국진출 한국패션기업의 인적 현지화에 관한 연구」등 여러 편이 대부분 중국 관련이다. 더 엄밀하게 보면 우리나라가 중국에서 어떻게 활동하면 성공적일까에 대한 인싸이트를 부는 책, 칼럼,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원 개발 차출됐다가 쓴 잔 마시기도

함 박사는 자원개발의 전문가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중국본부장을 하면서 많은 자원 개발을 주도했다. 이명박 정부가 자원개발에 힘을 쏟는 정책을 실행하면서 종합무역상사를 중심으로 민간에도 자원개발의 붐이 일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자원개발과 관련된 전문가들이 별로 없던 시절이었다. 중국에서 자원개발 경험이 있던 함 박사는 본사로 부임해 자원개발 책임을 맡게 됐다.

함 박사는 “당시 민간기업일지라도 종합무역상사 등 자원 관련 연관성이 그나마 있는 회사들은 정부 시책에 참여해야 할 분위기였다”며 “정부 시책의 무리한 추진은 부실 자원 인수의 결과도 낳았다”고 말했다. 당시의 무리한 자원개발은 부실 자원 인수로 후에 큰 문제가 됐다.

회사의 자원개발 책임을 맡고 있던 함 박사는 민간기업이 할 수 있는 최소 투자로 회사의 손해를 최소화했지만 마침 불어닥친 금융위기의 여파와 함께 그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자원 개발의 명암과 자원개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체득한 기회였다.

자신의 노하우를 전하는 활동을 하는 것도 이러한 체험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제2의 인생목표를 본격적으로 설계하고 도전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세계화전략연구소 이사로 재직하며 현장 경험만으로는 부족한 학문적인 바탕을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세계화전략연구소는 세계화 시대에 맞는 교육 및 컨설팅을 사업 방향으로 하는 연구소로 국내 기업의 해외진출 프로젝트 등의 사업 실적을 다수 실현한 곳이다. 함 박사는 지금도 이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한 자부심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낀다고 했다.

고향 영주는 지도를 어떻게 그려야 할까

함 박사는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거나 상담을 할 때 자신의 지도를 어떻게 그릴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머릿속에 자기만의 지도를 가지고 있다. 그 지도는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환경과 경험과 지식에 의해 그 넓이와 폭이 결정된다. 산골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풍경화나 상상화를 그리라고 하면 아무래도 산을 그릴 수밖에 없다. 평야 한 가운데서 자란 아이들은 들판을 그릴 것이다. 보고 듣고 아는 것이 그것 밖에 없기 때문이다. 생각의 폭이나 목표는 이 지도를 벗어나기 어렵다”

이 말은 지도를 어떻게 그리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된다는 의미이다. 고향의 발전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고향 영주가 어떤 지도를 그리는지에 따라 영주의 미래가 달려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갖고 그 꿈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중에 성공하는 사람이 나오는 것처럼 지방도 실현하고자 하는 비전을 갖고 그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치열하게 해야 지방 발전의 지도를 제대로 그릴 수 있다.

함 박사는 영주의 비전은 세계를 무대로 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를 무대로 영주의 지도를 그려 나가야 함을 말한다. 세계를 무대로 뛰며 한국을 개척한 종합무역상사 출신의 말이다. 함 박사는 세계를 무대로 뛰며 영주시의 영역을 개척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희망하고 관련 역할을 고민하고 있다.

황재천(프리랜서) / 오공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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