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부역으로 만든 신작로1968년 창경원으로 간 영주늑대

①도강서당 ②백로 서식지 ③상석초등학교 ④선바위 ⑤인수정
①도강서당 ②백로 서식지 ③상석초등학교 ④선바위 ⑤인수정

사람의 공부란 성인을 배움이다. 성인을 배운다는 것은 성인과 같아지려 하는 것인데, 배움에 성인을 표준으로 하지 않고 그 말이나 모양에 그친다면 성현의 가르침을 배운 보람이 없다. - 정산 김동진

의상로(義相路)는 상망동 ‘상망교차로’에서 부석면 ‘소천사거리’까지 가는 935번 도로이다.

롯데시네마에서 시내 원도심 거리를 지나온 광복로가 ‘상망교차로’에서 봉화 통로인 파인토피아로와 갈라져 영광고등학교 앞을 지나 부석 쪽으로 간다. 그리고 진우(眞友), 감곡(甘谷), 상석(上石), 우곡(牛谷)을 지나 부석면 소재지인 소천리에 도달한다.

수식에서 감곡으로 오는 둑길
수식에서 감곡으로 오는 둑길

의상로는 신작로(新作路)

부석으로 가는 ‘의상로’는 고개도 많다. 웃보름골을 지나자마자 진우마을로 가려면 마근댕이고개를 넘어야 한다. 그리고 진우마을을 지나 양지마 앞에서 조와천(助臥川 )이 끝나자마자 갈가리재이다.

이 고개에 올라 대마산목장을 보고 고갯길을 내려서면 너운티고개, 배남쟁이고개 등 크고 작은 고개가 계속된다. 그리고 우곡을 지나 소천에 들어가려면 마지막 고개인 낙하암(落霞巖)을 지나야 한다. ‘예전부터 이 많은 고개를 넘는 길을 어떻게 만들었을까?’하는 생각이 절로 난다.

초중학교 시절, 감곡에 살았던 이도선(73)교수는 1960년대 초에 이 길을 닦았다면서, 직접 참여하여서 생생하다고 전한다.

“중학교 졸업하고 부역(賦役)을 나갔어요. 그 전엔 산판길 정도였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 길을 다 만들었지요.” 원래 이곳으로 들어오는 길은 봉화 도촌에서 골내와 수식을 지나 감곡으로 들어오는 통로, 즉 낙하암천을 따라 들어오는 둑길이었는데, 1960년대에 와서 이 신작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북쪽으로만 문을 낸 공북헌
북쪽으로만 문을 낸 공북헌
백로 서식지
백로 서식지

‘공북헌(拱北軒)’ ‘인수정(因樹亭)’ ‘구두들‘

문득 10여년 전에 도촌 ‘공북헌(拱北軒)’에서 감곡 ‘인수정(因樹亭)’, 단산 ‘구구리’까지 돌아보았던 생각이 났다. 그때도 낙하암 둑길 따라 승용차로 다닐 수 있을 정도의 길이었다. 애초의 목적지는 인수정이었다.

1615년(광해5년)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귀양을 보내고 죽이려고 했던 계축화옥(癸丑禍獄) 때, 서슬퍼런 그들에게 외롭게 그 부당성을 꾸짖다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했다는 선비의 표상도 표상이었지만, 『 영주지(榮州紙)』를 최초로 편찬한 이여빈 의 거처에 가서 그 분의 체취(體臭)라도 느껴보고 싶어서였다.

인수정
인수정

인수정은 ‘나무에 기대어 집을 만든다.’란 뜻이란다. 그렇게 나무 뒤에서 말없이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셨을까?

그런데 ‘공북헌’과 ‘구두들’을 함께 돌아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 주인공들이 모두 이여빈의 할아버지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여빈의 고조부인 ‘이수형(李秀亨)’은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화를 참지 못하고 도촌으로 들어와, 3면을 벽으로 막고 북쪽으로만 문을 낸 집을 만들어 공북헌(拱北軒)이라 이름 짓고, 영월에 있는 단종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살았던 분이고, 또 이수형의 고조부인 ‘이억’은 고려가 망하자 단산면 구구리에 들어와 은거하였는데, 요동정벌을 함께 했던 옛 동료를 회유하기 위해 아홉 고을을 식읍(食邑)을 준 이성계의 마음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아 낟가리 아홉 더미를 만들어내면서 ‘구두들’이란 마을 이름을 생겨나게 한 장본인이었다. 참 별나고 대단한 유전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낙하함천은 도촌에서 내성천과 만난다
낙하함천은 도촌에서 내성천과 만난다

버스의 추억

길이 만들어지고 몇 년 뒤 버스가 다녔다고 한다. 2〜30리 길은 예사로 걸어 다니던 시절에 버스는 대단한 새 문명이었다.

“고등학교 때, 영주에서 자취를 했는데, 어머님이 장물을 한 병 담아주시는 겁니다. 그땐, 그걸 들고 가는 게 부끄러웠던 모양이지요. 안고 가지도 못하고 다리 사이에 끼고 가다가 그만….” 비포장길을 달리는 버스가 덜컹거리는 바람에 병이 구르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버스 안은 간장 냄새로 가득하고…. 이도선 교수는 “그래도 차장이 야단도 치지 않고 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하며 회상을 한다.

토요일 오후, 버스를 타지 못하면 모두들 모여서 집까지 걸었다고 한다. 집까지 가려면 서너 시간은 걸어야 해서, 날이 어두워져서야 집까지 갈 수가 있었다. 서로 모여서 가야 했던 것은 늑대 때문이었다. 해가 지면 너운티고개와 배남쟁이고개 쯤에서 늘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것은 늑대들의 소리였다.

골내마을
골내마을

1968년 이런 신문 기사가 났다.

“보호(保護)대상이 된 해수(害獸).

해수(害獸)로 퇴치의 대상이 되어왔던 늑대가 이제는 멸종 위기에서 보호 대상이 되고 있다. 창경원에서 사육중인 이 한국산 늑대는 ’68년 경북 영주군에서 생포된 것.”

창경원으로 간 영주늑대(1968년)
창경원으로 간 영주늑대(1968년)
늑대를 생포한 너운티고개와 배잠뱅이 고개
늑대를 생포한 너운티고개와 배잠뱅이 고개

이 늑대는 바로 이 '의상로' 길가에서 생포된 것이었다고 한다.
아기 소리를 내는 늑대의 울음은 1960년대에만 해도 밤이 되면 쉽게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그 시절 ‘모듬’이라는 놀이가 있었다. 모두 쌀 한 움큼씩 내어서 밥을 해 먹고, 밤늦도록 사치기를 하면서 노는 것이 전부였지만, 늘 기다려졌던 것은 밤참이라고는 없던 시절에 허기를 때울 수 있는 우리나름의 즐거움이 아니었을까?

놀이를 마치면 외진 곳에 사는 친구들을 함께 바래주어야 했다. 늑대울음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강서당
도강서당

도강서당과 동계구곡

상석리 마을회관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상석교 너머로 멀리 백로 서식지가 보인다. 그리고 부석 쪽으로 200여m를 가면 서쪽 산기슭에 도강서당이 있다.

1999년 경상북도기념물 제131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건물이 대단한 것도, 역사가 오래된 것도 아닌데, 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이 서당에서 제자를 기른 정산(貞山) 김동진(1867-1952) 때문이 아닐까? 정산 김동진은 한말 독립운동가였으며, 소수서원(紹修書院) 원장을 3번이나 지낸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유림이었다.

동계구곡 3곡 "회고대"
동계구곡 3곡 "회고대"

일제강점기에는 1913년 대한독립의군부 설립에 가담하였고, 1919년에 일어난 파리장서사건을 적극 지원하였던 지사(志士)였다. 그리고 동계구곡(東溪九曲)을 만들고 그 구곡원림(九曲園林)을 경영하였다. 어쩌면 도강서당은 주자(朱子)가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만들고 그 안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지어 제자를 기른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을까?

”배움에 성인을 표준으로 하지 않고 그 말이나 모양에 그친다면 성현의 가르침을 배운 보람이 없다.” 고 한 선생의 가르침을 새겨 본다. 그리고 3곡인 회고대(懷古臺) 아래를 지나다가 차를 멈춘다. 문득 내 마음속의 스승을 찾아본다. 참 부끄럽기 짝이 없다.

동계구곡 8곡 "옥간대"
동계구곡 8곡 "옥간대"

상석초등학교

도강서당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새로 난 길을 따라 차를 몰다가 지나쳐버린 상석초등학교가 떠오른다. 1939년에 시작하여 2002년 통폐합을 했다고 한다. 63년의 세월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거쳐갔을까?

1970년쯤에는 한 학년에 세 반씩이나 있었다고 한다. 이젠 학교도 없다. 아기들의 울음소리도 그친지 오래다. 새로 잘 난 길로 “휭-”하면서 관광버스가 지나간다.

김덕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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