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서원 입원록 1권 ② 인물편

소수서원 강학당에서 영주소삼회 회원들이 백록동서원규를 성독하고 있다(2021.5)
소수서원 강학당에서 영주소삼회 회원들이 백록동서원규를 성독하고 있다(2021.5)

최초 입원자 3인, 박승건(순흥)·신원록(의성)·김팔원(안동)
민시원·민응기 부자, 퇴계 1549년 소백산 오를 때 수행

장수희, 퇴계가 ‘최락당’ 써 준 첫 제자, 이산서원 설립 주역
좌의정 지낸 ‘정탁’, 미래 예고한 ‘남사고’, 소수서원 원장 ‘안구’

소수서원 입원록

소수서원은 주세붕 풍기군수(1541.5-1546.3)에 의해 창건되고, 유경장 군수(1546-1548)에 의해 경상도관찰사 안현, 차사원 황준량 등과 결의하여 운영방침이 수립됐다.

군수 이황 (1548-1549)은 짧은 재임 기간에도 소수서원의 사액을 이끌어내 우리나라 효시 서원으로서 위상을 온전히 갖추게 했다. 주세붕은 서원에 자주 나와 유생과 더불어 토론을 벌이는 등 정성을 기울였고, 퇴계 이황은 소수서원에서 직접 제자를 가르쳤다.

이와 같은 교육환경에 힘입어 소수서원 유생들은 창건 초부터 과거급제자를 많이 배출하였고, ‘영남유림’이라는 큰 맥 형성의 초석이 되었다.

소수서원 입원록에 등재된 유생들 가운데는 정치가로 유학자로 명망 높은 인물들이 많다.

입원록 1권에는 창건 이후 130년 동안 소수서원에서 수학한 유명 인사들의 이름이 여럿 등재돼 있다. 이들의 면모를 찾아보기 위해 이갑선 전 소수서원운영위원장, 김선우 소수서원운영위원장, 류창수 향토사연구가, 김장환 소수서원운영위 교육국장께 도움을 청했다.

이분들과 머리를 맞대고 입원록 속에서, 문집 속에서, 족보 속에서, 인터넷 검색창 속에서 영남 선비들의 면모를 살펴봤다. 여기 실린 인물들은 ‘영주(영천·풍기·순흥)의 인물’을 중심으로 ‘영남의 인물’에 초점을 맞췄다.

1920년대 조선총독부 소수서원 방문기념
1920년대 조선총독부 소수서원 방문기념

최초 입원자 3인(1543)

소수서원 입원록에 보면 최초 입원자는 3인이다. 요즘으로 치면 1543년 학번이다. 이 세 사람은 박승건(순흥)·신원록(의성)·김팔원(안동) 3명이다.

▷박승건(朴承健) 영천, 본관은 반남(潘南), 선조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의 중형으로 찰방(察訪)을 지냈다.

▷신원록(申元祿,1516~1576) 의성, 본관은 아주(鵝洲), 조식(曺植)과 주세붕(周世鵬)의 문인이다. 구봉령, 조목, 김인후 등과 교유하였다. 16세기 문향으로서 의성의 중흥을 일군 선비이다.

▷김팔원(金八元,1524∼1589) 안동, 본관 강릉, 삼척 훈도 김적의 아들이고, 퇴계 이황과 신재 주세붕의 문인이다. 1555년 사마시를 거쳐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조좌랑, 성균관전적, 용궁현감을 지냈다.

2기(11명) 갑진년(1544)

▷권응삼(權應參) 풍기, 권순(權純)의 아들이다. 경자년(1540)에 생원시에 합격했다. 학행(學行)이 있었다.

▷금인(琴軔) 영천, 경자사마, 봉화 구만서원(龜彎書院)에 배향되었다. ▷민시원(閔蓍元) 영천, 본관 영천, 정유사마, 퇴계 이황의 큰 형인 이잠(李潛)의 사위이다. 퇴계가 1549년 4월 소백산을 오를 때 아들 민응기와 함께 오르다가 민시원은 학질로 도중에 내려오고 민응기가 끝까지 모시고 산행했다는 기록이 「유소백산록」에 있다.

▷권숙난(權叔鸞) 풍기, 「무릉잡고」에 주세붕이 갑진년(1544)에 청량산을 유람할 때 풍기군 군재(郡齋)에서 전송한 것으로 나온다. ▷조목(趙穆1524-1606) 예안, 임자사마, 본관 횡성, 퇴계 제자, 성균관 관직 거쳐 공조참판, 임진왜란 때 의병 모집, 곽재우와 합세 국난극복에 앞장섰다.

신배 주세붕 초상
신배 주세붕 초상

3기(11명) 을사년(1545)

▷김극일(金克一,1522~1585) 안동, 본관 의성, 김진(金璡)의 아들이고 김성일(金誠一)의 형, 이황 문인, 1546년(명종1)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직강, 성주목사, 밀양부사 등을 역임했다.

▷문명개(文命凱) 영천, 임자사마, 무진급제, 퇴계 이황의 문인. ‘성극재시고’를 저술했다. ▷황수랑(黃秀良) 풍기, 본관 평해, 금계 황준량의 아우. 황준량 사후 금계의 유집을 수습했다. 퇴계에 부탁하여 문집을 편찬했다.

4기(18명) 병오년(1546)

▷민구서(閔龜瑞) 영천 신묘사마, 본관 영천. ▷이극검(李克儉,1508~1560) 풍기, 신묘사마, 본관 공주. ▷김황(金滉) 영천, 병오사마, 판결사 김흠조(金欽祖)의 손자이다. ▷곽한(郭瀚) 봉화, 기유사마, 본관 현풍.

▷황득겸(黃得謙) 풍기, 기유사마. ▷황윤규(黃潤奎) 풍기(희여골), 본관 창원, 황사우(黃士佑,1486~1536)의 아들. 황사우(黃士祐)의 자는 국보(國輔)이고, 호는 용헌(慵軒)이다. 1514년(중종9) 별시에 갑과(甲科) 2위로 급제하여 대사간, 도승지, 부제학, 형조참판, 호조판서, 이조판서, 우찬성 등을 역임했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황윤규(黃潤奎), 황응규(黃應奎), 황서규(黃瑞奎)이다. ▷황응규(黃應奎,1518-1598) 풍기(희여골) 계묘사마, 기사급제, 본관 창원, 주세붕·이황의 문인이다. 1579년에 단양 군수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향병대장으로 추대, 1584년 황준량의 《금계집》 간행, 황섬(黃暹)의 아버지, 영의정 류영경의 장인 ▷이국량(李國樑) 영천, 병오사마, 본관 영천, 농암 이현보의 종자, 퇴계 이황의 문인이자 질서이다.

퇴계 이황 초상
퇴계 이황 초상

5기(12명) 정미년(1547)

▷우세신(禹世臣) 영천, 본관 단양, 기유사마, 임자 식년문과 급제하여 종부시정(宗簿寺正) 등을 지냈다. 취사 이여빈의 어릴 적 스승이었다. ▷남몽구(南夢龜) 영천 신유사마, 본관 영양, 영의공 민의 후손이다.

6기(6명) 무신년(1548)

▷안응기(安應箕) 풍기, 병오사마 선조 때 진사시에 합격. ▷김순필(金舜弼) 영주, 병오사마, 명종4(기유,1549) 식년시 병과 5등으로 급제했다.

7기(24명) 기유년(1549)

▷전응삼(全應參) 영천, 병오사마, ▷김사호(金士皞) 영천, 병오사마, 김사명(金士明)의 아우이다. 문절공 김담의 증손이다. ▷민응기(閔應祺,1540-1578) 영천, 본관 여흥, 이황의 문인이다.

광해군의 사부(師傅), 광해군 즉위 후 좌승지로 추증,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임하던 1549년(명종4) 4월 22일부터 26일까지 소백산을 등산할 때 아버지 민시원과 함께 퇴계를 모시고 소백산에 올랐는데 당시 10세였다.

▷장수희(張壽禧,1516-1586) 영천, 호 과재(果齋), 본관 인동, 조부는 장맹우(張孟羽)이고, 부친은 장응신(張應臣)이다. 외조부는 감천문씨 문경동(文敬仝)이고, 처부는 창원황씨 황사언(黃士彦)이다.

퇴계의 첫 제자, 퇴계는 그의 영특함과 밝은 성품에 호감을 얻어 ‘최락당(最樂堂)’ 3자를 손수 써 주었다. 이산서원 설립의 주역, 형조참의를 증직 받았다.

9기(21명) 신해년(1551)

▷권수(權洙) 예안, 병오사마, 임자급제. ▷구봉령(具鳳齡,1526-1586) 안동, 본관 능성(綾城), 병오사마, 임자급제, 이황의 문인이다. 이조 참판을 역임, 시호는 문서(文瑞)이다.

▷권문해(權文海) 예천인, 본관 예천, 퇴계문인, 문과급제, 관찰사, 대사성 역임. ▷남몽오(南夢鼇,1528~1591) 영천, 계유사마, 1528~1591, 본관 영양, 이황의 문인이다. 김개국·박선장·금복고·김영조의 스승이다.

10기(2명) 임자년(1552)

▷박승륜(朴承倫) 영천, 본관 반남,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의 동생이다.
▷김수일(金守一) 안동인, 본관 의성, 퇴계문인, 문과급제, 성균관 사상역임, 김성일의 형이다.

11기 (14명) 계축년(1553)

▷전응창(全應昌) 대구, 본관 옥산, 문과급제, 사헌부감찰, 함안군수 역임. ▷정탁(鄭琢,1526~1605) 안동, 본관 청주, 임자사마, 무오급제, 호 약포, 시호 정간공, 우의정·좌의정·영중추부사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서원부원군에 봉하여졌다. 옥중의 이순신(李舜臣)을 극력 신구(伸救)하여 죽음을 면하게 했다. ▷권호문(權好文) 안동, 본관 안동, 퇴계문인, 류성룡, 김성일과 교유했다. ▷고응척(高應陟) 선산인, 본관 안동, 문과급제, 풍기군수, 경주부윤 역임.

13기(9명) 을묘년 1555년

▷남사고(南師古,1509-1571) 울진, 본관 영양, 호 격암(格菴)이다. 역학(易學)·천문(天文)·관상(觀相)·복서(卜筮) 등 모든 학문에 두루 통달하였다.

《남격암십승지론(南格庵十勝地論)》에서는 정감록사상의 특징인 십승지지, 이른바 재난이 일어날 때 피신처인 열 군데의 보길지(保吉地)를 구체적으로 예언, 기술하였다. ▷김농(金農) 풍산인, 본관 풍산, 유학자 김현의 아버지, 김영조, 김응조의 조부.

15기(9명) 정사년 1557년

▷안구(安駒) 풍기, 1557년 소수서원 유사(원장) 지냄. ▷안경빈(安敬賓,1526~1574) 용궁, 본관 순흥. 식년문과 급제, 부사(府使) 등 역임. ▷이녕(李甯) 예안, 신유사마, 본관은 진보, 대사헌을 지낸 이해(李瀣)의 아들이며 이황(李滉)의 조카, 군위·지례 현감을 지내고, 초서와 예서(隸書)에 능했다.

-다음 호에 계속-

* 영천은 영주의 옛 지명임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