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삼켜버린 마을과 길의 추억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예고개

내성천교와 평은리교 그리고 평은리 이주단지가 보이는 영주호
내성천교와 평은리교 그리고 평은리 이주단지가 보이는 영주호

자유를 지키는데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만이 자유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 - 더글러스 맥아더

평은로는 예전 평은면을 지나 예고개까지 가던 국도5호선이었다. 하지만 예전 평은면 소재지였던 기프실을 지나던 평은로는 볼 수가 없다.

영주댐 건설로 물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제 영주호 건너편에 새로 조성한 평은면 소재지에서 예고개까지 길을 평은로라고 새로 명명했고, 옛길 위쪽에 만든 운문교차로에서 강동교(江東橋)까지의 길을 금강로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국도5호선은 영주·안동간 자동차전용도로인 경북대로가 그 몫을 다하고 있다.

아스팔트 공사를 막 끝낸 평은로(1978년)
아스팔트 공사를 막 끝낸 평은로(1978년)

내성천교와 경북대로

2004년 소수박물관에서 김흠조부부의 의상을 보았다. 영주 평은간 국도 공사 중에 나온 유물이라고 했다. 500년이나 된 의상이 잘 보존되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옷이 참 크다.’라는 것도 지울 수 없는 생각이었다.

그 무렵 평은을 지나면서 내성천에 세워지는 교각(橋脚)을 보며, ‘무슨 다리를 저리 높이 만들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길은 그렇게 산과 산을 그대로 이어버리며 고가도로처럼 만들었다.

영주와 안동 사이는 잘 만들어진 길만큼 가까워졌다. 그리고 길이 다 만들어질 무렵 ‘송리원댐’이 ‘영주댐’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주민들이 반대할 겨를도 없이 바쁘게 진행되었다.

평은면 소재지 기프실(1970년대)
평은면 소재지 기프실(1970년대)

이제 영주호(榮州湖) 속으로 사라진 평은면 소재지였던 기프실, 이름이 깊어서였을까? 이제 물속 깊이 들어갔다. 하지만 예전에 이 길을 지날 때마다 강과 들이 참 여유롭다는 생각을 했었다. 안동에서 영주로 올 때, 예고개의 협곡을 빠져나와 평은유원지와 평은교를 지날 때쯤에서 느꼈던 ‘환하다’라는 인상이 남아있었기 때문일까?

최고의 백사장 평은유원지

평은유원지의 첫 기억은 1986년 2월이다. 연극연습을 하며 야유회를 왔었다. 겨울에 이곳을 찾은 것은 서울에서 연극 지도를 위해 온 연출가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에게 너른 백사장를 자랑하고 싶었을 것 같다. 그날 야외에서 연극연습을 했었다.

잉어바위가 보이는 백사장(2014년)
잉어바위가 보이는 백사장(2014년)
평은 유원지(2014년)
평은 유원지(2014년)

1995년 여름엔 전국연극인대회를 ‘영풍청소년수련원’에서 개최하면서, 작은 운동회를 이곳 백사장에서 열었다. 전국에서 모인 연극인들은 하얀 모래를 밟으며, 그 보드라운 촉감에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2012년이었다. 안동에서 공연한 ‘부용지애’ 뮤지컬을 보러온 서울 친구들 때문이었다. 내성천이 잠긴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가자고 했다. 아마 1995년의 추억 때문인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찾은 것은 2014년이었다. 물에 잠기기 전, 운포구곡 사진이라도 찍어둘 요량이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5, 6, 7, 8곡은 물에 잠기거나 훼손이 심해서 볼 수가 없었다. 9곡도 새길을 만들면서 흘러내린 흙더미로 많이 허물어져 있었지만, 잉어바위는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영주호 이주단지. 문화재단지와 동호이주단지, 멀리 금강이주단지가 보인다
영주호 이주단지. 문화재단지와 동호이주단지, 멀리 금강이주단지가 보인다

다시 찾은 금강리

2021년 금강리를 다시 찾았다. 이번엔 김인한선생과 동행을 했다. 퇴직 후, 이주단지에 거처를 마련하여 사는 토박이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장 많이 생각나는 것 중의 하나가 내성천에서 멱감던 일이라고 했다.

“더위가 한창인데, 군인들이 행군을 하는 거죠. 해마다 그 무렵이었어요. 우리는 물속에서 미군들을 향해 팔뚝 욕을 했죠. 그런데 미군들은 우리한테 초콜릿과 과자를 던져 주었어요.” 그때 초콜릿을 처음 먹어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6.25를 떠올렸다고 한다. 6.25를 상기하며 훈련을 하는 것일 거라고.

동호교가 보이는 풍경(건물 철거 직전)
동호교가 보이는 풍경(건물 철거 직전)

평은초등학교에서 귀한 옛 사진을 발견했다. 중앙선도 그려넣지 않은, 막 포장된 1978년 사진이었다. 길이 포장되기 전엔 해마다 롤러차가 길을 다지곤 했다고 한다. “롤러가 지나간 자리에 부서진 탄피나 굳은 화약가루가 나오곤 했어요. 화약가루에 불을 붙이면 폭죽이 터졌지요.” 참 철없던 시절이었다고 하면서, 동호교를 사이에 두고 전투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동호교을 건너면 방골이다. 바로 예고개로 가는 협곡이다. 아마도 후퇴를 하던 국군이 여기서 항전을 하였을 것이다. 6.25 때에 소년병으로 참전을 했던 강복원(90세)옹도 같은 얘기를 한다.

새 동호교와 옛 동호교(2014년)
새 동호교와 옛 동호교(2014년)

“1950년 입대를 해서 1956년 제대를 하고 돌아오니, 마을 친구가 달봉산에서 전투가 있었다고 해요. 버려진 총도 있고…. 그래서 돌아봤지요. 하지만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어요.” 풍기 전투에서 후퇴를 하던 국군이 내성천을 사이에 두고 달봉산(방골 뒷산)에서 항전을 했으리라.

그 후, 2019년 유해 발굴 조사단이 다시 그곳을 살폈지만, 유해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선생은 수몰 이주단지 뒷산인 달배이 산에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그중에 주인 없는 산소가 많았다고 전한다.

기프실 풍경(건물 철거 직전)
기프실 풍경(건물 철거 직전)

문화재 이주단지

영주호 옆엔 이주단지가 있다. 길 입구에는 동호리 주민들의 이주지이고, 그 앞엔 문화유적 이주지이다. 그리고 제일 안쪽엔 금강리 이주단지이다. 동호리와 금강리는 이미 생활을 잘하고 있는데, 문화재단지는 아직 공사가 한창이다. 이제 괴헌고택과 덕산고택만 지으면 마무리가 된단다.

문득 1999년, 『영주문화』 22호를 준비하며 평은을 다녔던 생각이 난다. 곳곳에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농민 죽이는 송리원댐 건설 결사 반대’, ‘조상 대대로 내려온 땅 수몰이 웬 말인가?’ ‘댐, 댐, 댐 God Damn’…. 인쇄한 현수막도 있었지만, 그냥 손으로 써 내려간 현수막도 많았다.

지서와 학교가 있던 자리(수몰 직전)
지서와 학교가 있던 자리(수몰 직전)

그중에 가장 가슴이 찡했던 것이 ‘70-80 노인 타향살이 웬 말인가’ 하는 강동2리 주민들이 만든 것이었다. 하필 그 현수막 앞을 지나는데 80이 넘어 보이는 한 어른이 그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동막마을과 옛길의 흔적
동막마을과 옛길의 흔적

예(禮)고개, 옛(古)고개?

예고개는 남쪽에서 영주로 들어오는 관문이다. 영주로 첫 발령이 난 딸의 자취(自炊) 살림을 가지고 예고개를 넘으면서, 가도 가도 산속으로 들어가서 눈물을 흘렸다는 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 고개를 넘어 방골이란 협곡을 지나 내성천을 건너야 한다. 영주로 들어가는 관문이 꽤 드센 셈이다. 조선 시대엔 왕유리에서 옹천으로 바로 넘어갔다고 한다. 예고개도 1930년대에 신작로가 나면서 생긴 새 길인 셈이다. 그런데 옛고개일까?

순흥안씨 종친회에서 만든 『순흥안씨대감(順興安氏大鑑)』에 예고개의 유래가 나온다. 1730년 안복준(安復駿)이 부친의 부음(訃音)을 받고 안동 와룡으로 귀가 중, 이 고개에서 ‘국가의 정사를 논의하고자 하니 급히 환궁하라.’는 왕(영조)의 전서(傳書)를 받고, 선친의 시신을 향해 곡예(哭禮)를 올리고 환국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예곡현(禮哭峴)이 되었고, 그 후 예(禮)고개가 되었다는 것이다.

벌써 오랫동안 불려온 이름이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서 오늘은 ‘예고개’라 적어 본다.

김덕우 작가

기프실의 골목 공사(1980년대)
기프실의 골목 공사(1980년대)
비어있는 식당에 걸린 조기(弔旗)
비어있는 식당에 걸린 조기(弔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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