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 별세 1주기 추모 글

6월 17일은 우리고장 출신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이 숙환으로 영면에 든 지 꼭 1년째 되는 날이다.

6선을 지낸 홍 전 부의장은 지난해 6월 20일 77세의 일기를 끝으로 자신의 고향 순흥면 내죽1리 속수마을 비봉산 북편자락 속칭 버름골에 안식처를 마련했다.

홍 전 부의장은 영주초-영주중-서울대사대부고-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해 중앙일보 기자로 활동하다 지난 1981년 제11대 민주한국당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해 18대까지 6선을 지냈다. 이 중 두 차례(제11대, 제12대 신한민주당)는 영주영풍영양봉화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돼 지역 발전에 기여했다.

민주당 김대중 후보 대선 캠프 대변인, 김영삼 정부 정무 제1장관, 박근혜 경선캠프 선거대책위원장, 한나라당 원내총무(현재 원내대표), KT 고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 등도 홍 전 부의장의 생전 주요 이력이다.

본지는 홍 전 부의장의 별세 1주기를 맞아 고인의 뜻을 다시 한번 되새기기 위해 지역출신 법조, 경제, 언론계 인사들이 보내온 추모의 글을 싣는다. <편집자 주>

 

절충과 타협의 리더십이 그리워
박병대<전 대법관, 풍기출신>

세상사 인연이 사람 뜻대로 되지 않는 줄이야 겪고 또 겪어서 알고는 있으나, 떠나신 어른을 떠올리면 먹먹한 아쉬움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제가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있을 때 홍 부의장님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당신께서 가시기 십 수년 전쯤 되는 것 같습니다.

저야 굳이 정치 쪽 얘기에 귀 기울이지 않더라도 영주와 순흥에 계신 인연 있는 분들의 말씀으로 일찍부터 그분 얘기는 수없이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뵈올 기회가 없던 차에 어떻게 제 얘기를 들으시고 서둘러서 보자셨다고 했습니다.

이후 꽤나 자주 뵈었습니다. 별다른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세상 얘기 나누고, 고향 후배 격려하시는 그런 자리를 따스하게 마련해 주시곤 했습니다.

제가 대법관에 제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렇게 기뻐하실 수 없었습니다. 국회 청문회를 앞두고 몇 가지 조언을 해 주셨습니다. 정치인들 공연히 목소리 높이더라도 담대하게 당당하라, 질문 듣고 대답하기 전에 한 템포 머금고 음미하는 여유를 가지라고 하신 것이 특히 생각납니다. 지나고 나서 되새겨 보니 그 충고대로 따르지 못한 장면들이 다 아쉬운 장면이었습니다.

대법관으로 있던 동안에도 종종 뵈었고, 건강이 썩 좋진 않으셨어도 그냥 그만하셨는데 작년 갑자기 부음을 들었습니다. 인연을 가꾸어 갈 더 긴 시간이 마냥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사람 바람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사인가 싶었습니다. 광풍이 불어도 든든한 버팀목 같고 뙤약볕에 큰 나무 그늘이셨던 부의장님 가신 지 1년이 되었습니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어진 재상이 생각난다는 말(國難思賢相)처럼 요 몇 해 이 나라 돌아가는 모양을 보노라면 옛사람들 생각이 절로 납니다. 그저 평범하게 자기 삶을 살던 사람들조차 분노를 참지 못하고 불안과 걱정을 토해내는 현실을 봅니다. 우국지사(憂國之士)가 이리 많아지는 것은 결코 마음 편한 세월이 못 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소신과 줏대는 지니되 다른 얘기도 귀담아듣고, 생각이 달라도 절충과 타협의 공간을 마련해 보려 애썼던 홍 부의장님 같은 분들의 리더십이 그리워집니다. 편가르기로 갈라치기를 하려 했으면 부의장님이 정치의 중심에 계셨을 때가 아마 훨씬 쉬웠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그 길에 발길을 들이지 않은 것은 바른길(正道)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부가 훌륭하면 명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릴 것이나 재주 없는 자가 몰면 채찍질만 할 뿐 뭇 사람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는 옛얘기가 있습니다(한비자·韓非子).

수레와 말은 그대로인데 한편은 천리를 달리고 한편은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말을 이끄는 재능이 달라서인데, 나라와 백성을 수레와 말에 견줄 수 있다면, 아무리 명마에 좋은 수레가 있어도 마부들이 하찮으면 웃음거리만 될 뿐일 것이니 어찌 걱정하는 분들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내신 책 제목으로 일갈하셨던 “지금, 잠이 옵니까?”, 그 말씀이 지금은 침묵 속에 여운으로만 남아 있지만, 묵여뢰(黙如雷)라고 침묵이 오히려 벼락치는 소리 같습니다. 우리 곁에 계시면 맥을 짚는 원로의 한 말씀을 다시 들을 수 있을 텐데 마음만 무겁습니다. 어른 가신지 1년이 흘렀습니다. 다시 삼가 명복을 빕니다.

 

열린 경청의 자세 그리고 답
전봉욱<기업인,재경 영광고 총동문회장>

나는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님과 친척 관계인 장인 어른 소개로 1980년대 초부터 고인을 알고 지냈다.

의장께서 정치 무대의 정점에서 물러난 2010년 이후 작년까지 가까운 거리에서 모셨다. 수시로 근교 산행 등에 동행했고 사무실과 집(서울 옥수동)에 찾아가 뵈면서 인간적으로 신뢰하고 친해졌다.

홍 의장께서는 6선 국회의원에 국회부의장, 정무장관을 지내셨다. 언론사 기자 출신답게 글도 잘 쓰고, 논리적이었던분이다. 키도 크고 얼굴도 미남이어서 보통 약간(?)의 거리감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으셨다.

오히려 우리 시골 정서 그대로 소탈하셨고 작은 친절에도 감동하셨다. 3~4년 전, 식욕이 떨어졌다는 말씀을 듣고 청양초로 만든 고추장을 작은 항아리에 담아 갖다드렸더니 그렇게 반가와하고 좋아하실 수 없었다.

수차례 전화로 “전 서방 덕분에 입맞을 찾았다”고 고마워하셨다. 혹시나 하던 나로서는 큰 보람과 뿌듯함을 느꼈다.

몇 번인가 “폐렴 때문에 담배를 줄이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린 적도 있다. 성공하신 분일수록 자기 고집으로 역정을 내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지만 홍 의장께서는 늘 경청하시면서 “그렇지. 전 서방 말대로 담배 좀 줄여야겠네”라며 밝게 대답했다. 서민적인 풍모도 많아 칼국수를 무척 좋아했고, 골프보다는 산책과 맨손체조, 등산을 즐기셨다.

특히 사람에 대한 험담을 하거나 직설적인 비판은 좀처럼 하지 않았고, 친구나 선후배를 남들에게 늘 멋지거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또 만남의 자리를 통해 적당한 사람들을 중매, 중개해 주는 역할도 탁월했다. 아울러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반드시 고민하고 숙고한 결과를 잊지 않고 답으로 전해주는 현명한 분이셨다. 다시금 홍사덕 의장님의 명복과 영면을 두손 모아 빈다.

 

항상 덕을 생각하며 의와 선을 실천
송의달<조선일보 선임기자, 전 조선비즈 대표이사>

홍사덕 선배님은 필자의 영주초등학교와 대학교(서울대 외교학과) 21년 직계 선배님 이시다.

대학 신입생이던 1982년 9월,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을 찾아가 처음 인사를 드렸더니 “아이고 이제야 고향 직속 후배가 입학하셨네…”라며 두 손을 붙잡고 몹시 반가워하셨다.

미국 워싱턴DC에서 1년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필자가 <세계를 움직이는 미국 의회>라는 저서를 낸 2000년 가을, 광화문에서 둘이서 저녁을 하던 중 홍 선배님은 이렇게 말했다.

“송 공이 쓴 책을 재미있게 두 번 읽었네. 우리도 미국처럼 국회에서 원내 대표의 실질적인 역할과 위상을 높여야겠어.”

바쁜 와중에도 새까만 후배가 쓴 책을 구석구석까지 읽고 실행 방안까지 궁리하셨던 것이다.

홍 선배께서는 이 말씀을 본인이 원내총무(한나라당)가 된 2003년, 제도로 만들어 요즘 같은 ‘실세(實勢) 원내대표’ 제도가 정치권에 자리잡게 됐다.

2019년 8월 하순, “폐렴 치료 후 많이 좋아졌다”며 퇴원해 계시던 홍 선배님을 종로구 인의빌딩 12층에서 2시간여 만났다.

여윈 몸인데도 몇 개 시나리오를 꺼내며 현 정권이 취하는 북한 정책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온통 나랏일을 걱정하셨다. 그때가 세상에서 마지막 만남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홍사덕 선배님은 물욕과 권력욕을 이겨내고 그것에서 초탈한 77년 생애를 사셨다.

본인 명의의 아파트는 한 채도 없으면서 노숙자와 탈북자들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즉흥적이고 가벼운 언행이 범람하는 요즘세태와 정반대로 항상 덕(德)을 생각하며 의(義)와 선(善)을 실천했다.

홍사덕 선배님이 품었고 보여주신 ‘군계일학’ 같은 고결한 삶과 뜻, 애향심이 불멸의 혼(魂)으로 살아 영주인들에게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고인의 영전에 존경과 감사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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