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36]도산서원 소장 「소수서원 입원록(入院錄)」

소수유림들이 소수서원 강학당에서 백록동규를 성독하고 있다.
소수유림들이 소수서원 강학당에서 백록동규를 성독하고 있다.

총 입원자 735명 중 사마입격자 301명, 문과급제자(등용자) 83명
전국 각지 유생 모여 영천(영주) 171, 풍기 133, 안동 120, 서울 47명
병술년 도산서원에서 ‘서얼사건증빙’에 쓴다며 빌려 간 뒤 안 갚아

소수서원 입원록

지난 5월 22일 소수서원 강학당에서 소수유림 연수회가 열려 동참했다. 이날 뜻밖에도 ‘소수서원 입원록’이 ‘소수서원에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도산서원에서 빌려 간 뒤 안 갚았다는 것이다. ‘입원록’이란 서원 유생들의 입원 기록이다.

소수서원에 있어야 할 소수서원 입원록이 ‘소수서원에 없다?’고 하니 ‘이게 웬일일까?’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이갑선 전 소수서원운영위원장님께 여쭈니 “입원록 1권을 병술년 3월 20일 도산서원에서 빌려 간 뒤 돌려주지 않고 있다”면서 “그 후 여러 차례 반환을 요구했으나 현재 까지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 입원록은 소수서원이 간직한 여러 보물 중 하나이다. 그래서 그 연유를 밝혀보고, 입원록의 내용과 그 속에 담긴 인물들의 면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도산서원 소장 소수서원 입원록(25.3×36)
도산서원 소장 소수서원 입원록(25.3×36)

도산서원으로 간 연유

이 입원록은 소수서원의 전신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창건되던 1543년부터 1672년까지소수서원에 입원 수학한 유생 735명의 이름을 기록한 명부이다.

이는 당시 소수서원의 현황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문서이기도 하고, 소수서원의 세계유산 등재에도 크게 공헌한 소중한 증빙자료이다.

소수서원 입원록은 1권(1543∼1672), 2권(1660∼1691), 3권(1721∼1760), 4권(1725∼1846), 5권(1790∼1888)으로 편철돼 있었다.

그중 2, 3, 4, 5권은 소수서원이 소수박물관에 기탁 관리하고 있으나 1권은 없다. 없어진 1권은 소수서원 창건 이후 1543년∽1672년 사이 130년 동안의 유생들의 입원 기록으로 소수서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소수서원지(2007.12.20 발행) 14. ‘입원록(入院錄) 1543~1696 도산서원 소장본’편에 의하면 이 책(입원록)은 《院錄謄本(원록등본)》 1책과 함께 도산서원 소유로서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 보관되어 있다.

도산서원으로 유입된 연유에 대해서는 《紹修書院任事錄(소수서원임사록) 三(삼권, 1794〜1897 기록본)》 표지 이면에 「入院錄一卷 卽退陶先生院規 合二卷 丙戌三月二十日 奉去陶山 儒生李彙鳳 庶類疏誣至花府査實之時」라고 쓴 기록이 있다.

「이는 이 책 및 《院錄謄本》을 도산서원 서얼(庶孼) 변무 사건의 증빙자료로 쓰기 위해 유생 이휘봉이 직접 와서 빌려 간 사실에 대하여 임시 메모 형식으로 기록하여 밝혀 둔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도산서원 유생 이휘봉(李彙鳳)이 병술(1826 또는 1886)년 3월 20일에 서자(庶子) 관련사건 증빙자료에 필요하다며 빌려 간 뒤 반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수서원 입원록 내용 1면
소수서원 입원록 내용 1면

입원록에 등재된 내용

입원록을 보니 표지는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있다. 규격은 가로 25.3cm, 세로 36cm이다. 만지면 부서질 듯한 겉장을 조심조심 넘기니 아무것도 없는 백지다. 한 장을 더 넘기니 세로로 「만력기미(萬曆己未, 1619) 十二月日(12월일) 備藏(비장). 院長權俊臣 有

事李植」이라 쓰고, 중간에「中人庶孼(중인서얼) 雖大小科(수대소과) 勿許濫書(물허람서). 紹修書院上(소수서원상)」이라고 씌어있다.

다음 면 본문 1쪽 1행에 ‘入院錄’이라 쓰고 그 아래 ‘改書冊’이라 썼다. 이는 이 입원록이 만력 기미년(1619년) 12월에 원장 권준신과 유사 이식이 입원록 원본을 보고 개서(베껴)해서 새로운 등본을 제작하였으며, 이후 입원 사실은 여기에 계속 기록한 것으로 보여진다.

입원록은 표지 포함 총 57장(114쪽)이다. 이 입원록은 등본(謄本)으로 유사자(有司者)가 원본을 베껴 쓴 까닭에 萬曆四十七年(만력47년) 己未年(기미년, 1619) 까지는 1면 8행 형식이 잘 지켜지고 있다가 泰昌元年(태창원년) 庚申(경신, 1620)부터는 행수가 일정하지 않으면서 필체 또한 각각 다르다. 이는 유생 본인이 직접 자필로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창건 초기의 입원록은 유생이 직접 이름을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본문 내용은 1행에 ‘入院錄 改書冊’이라 쓰고 2행에 ‘嘉靖二十年 癸卯年’, 3행에 ‘朴承健 子强 順興 癸卯 司馬’라고 썼다. 입원록은 유생의 성명, 자(字), 거주지를 쓰고 그 아래 과거에 등재한 사실이나 관직을 기록했다.

소수서원 입원록 등재사항
소수서원 입원록 등재사항

입원 유생의 수

아주 오래전에 소수서원에 가서 일신재, 직방재를 둘러보면서 ‘예전에 여기서 공부하는 학생이 몇 명이나 됐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 해설사에 의하면 “3~ 20명이 기숙을 하면 공부했다”고 하자, 또 다른 사람이 “그렇게 적었어요? 저는 수백 명을 아니어도 수십 명이 다녔던 학교가 아닐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1547년에 마련된 소수서원 「斯文立議(사문입의)」에 ‘유생 정원은 10명이었다’라는 기록이 있다고 하나 직접 보지는 못했다. 실제 입원 인원이 얼마나 됐는지 알아보기 위해 계묘년(1543)부터 임자년(1672)까지 연도별 입원 유생수를 헤아려 봤다.

유생의 수는 만력 22년 계묘년(1543) 박승건을 비롯한 3인의 입원을 시작으로 갑진(1544) 11명, 을사(1545) 15명, 1546년 18명, 1547년 12명, 1548년 6명, 1549년 24명, 1550년 15명, 1551년 21명, 1552년 2명 등 개원 초 10년간 127명이 입원하여 평균 12.7명이 입원했다.

유생수가 가장 많았던 해는 嘉靖 28년 己酉年(1549년) 24명으로 등재되었고, 가장 적은 해는 癸酉年(1573) 1명으로 등재됐다.

창건 후 30년간 연평균 11명 선을 유지하다가 1570년대 평균 5-6명, 1580년대 7-8명, 1620년대 5명, 1630년대 3-4명 등으로 점차 줄어든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 기간 중 입원 사실이 누락되었거나 임진왜란 등 전란으로 입원이 한명도 없던 해는 다음과 같다.

「임오년(壬午1582) 누락, 계사(癸巳1593)~을미(乙未1595) 임진왜란, 무술(戊戌1598) 정유재란, 갑진(甲辰1604) 누락, 갑술(甲戌1634) 누락, 신사(辛巳1641)~계미(癸未1643) 누락, 을유(乙酉1645)~경인(庚寅1650) 누락, 임진(壬辰1652)∼계사(癸巳1653) 누락, 을미(乙未1655)~신해(辛亥1671)」이상과 같이 입원 사실이 미기재된 경우는 입원자가 없어서 단순 누락인지 또 다른 사유가 있는지 그 연유는 분명치 않다.

소수서원 입원 자격

소수서원의 입원 자격은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 원규에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무릇 서원에 들어오는 선비의 자격은 태학(太學)과 같이 생원·진사를 우선으로 하고, 그 다음은 초시입격자(初試入格者)로 한다. 비록 입격(入格)하지 못하였어도 일심으로 향학(向學)하고 조행(操行)이 있는 자는 유사(有司)가 사문(斯文)에 아뢰고 받아들인다.」

소수서원 입원록 첫머리에도 「中人庶孼(중인서얼) 雖大小科(수대소과) 勿許濫書(물허람서)」라는 내용이 표기되어 있다. 이는 ‘중인이나 서얼은 비록 대소과 급제자라 하더라도 여기에 글을 쓰는 것(입원록에 이름을 적는)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사례들을 종합해 볼 때 당시 서원은 양반들만의 영역이었음을 보여주는 주요 사례라 할 수 있다.

입원록 하단에 기록된 급제 사항을 살펴보면 총 입원자 736명 중 사마입격자 301명, 문과급제자(등용자) 83명으로 나타났다.

유생 거주지역별 인원 수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 사액서원(사립대학)으로 영남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선비들이 학문을 구하여 순흥으로 모여들었다고 전한다.

실제 어느 지역 사람들이 소수서원을 찾아왔는지 거주지별 입원자 수를 조사해 봤다.

순흥에 있는 소수서원에 순흥 사람이 제일 많을 줄 알았는데 야속하게도 순흥 거주자는 2명뿐이다. 이는 정축지변으로 순흥부가 폐부(1457-1682) 됐다가 복원됐기 때문이다.

입원자가 가장 많은 지역은 영천(영주)으로 171명이다. 그 다음 풍기 133명, 안동 120명, 서울 47명, 예안 30명 여천·용궁 각 25명, 예천 22명, 상주 17명, 함창 15명, 봉화 12명, 원주 10명 순이다. 10명 이하 지역으로는 영월 9명, 유신8, 선산8, 울진6, 밀양6, 의성5, 평해5, 제천5, 성주4, 대구4, 진주4, 청도4, 청주3, 충주 3명이다.

보은·순흥·인동·영해·부안·개령·영춘·수원은 각 2명, 군위·삼척·김해·청안·의흥·강릉·청풍·괴산·황산·김해·영산·고산·공주·남원·단양·사천은 각 1명, 기록 누락 5개 지역 등 50개 지역이다. 이상에서 볼 때 당시 소수서원 교육에 대한 유생들의 관심과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입원록에 등재된 유생들 가운데는 정치가로 유학자로 명망 높은 인물들이 많다. 개별 유생들의 면모는 다음 호에 싣는다.

빌려 준 근거
빌려 준 근거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