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졌다가 다시 살아난 옛길
‘길’ 로서는 첫번 째 국가명승

죽령옛길의 출발점인 희방사역. 이제 희방사역과 이 철길마저 옛길이 되었다.
죽령옛길의 출발점인 희방사역. 이제 희방사역과 이 철길마저 옛길이 되었다.

일체의 현상적 존재치고 어느 하나인들 있는 듯 사라지고, 오는 듯 가버림 아닌 것이 있으랴. 이래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이르거니 ‘길’이라 하여 어찌 그 이법(理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 송지향

죽령(竹嶺)은 신라 아달라임금 5년(158년)에 죽죽(竹竹)이 개설하였다 하여 ‘죽령’이라 불리어 왔다. 하지만 1933년 국도5호선이 나고, 1942년 중앙선 철도가 개설되면서 이 길은 사라졌다. 아니 걷지 않는 길이 되었다.

그 후 1999년에 영주시가 지역민의 염원으로 다시 길을 살려, 2007년 12월 17일에 ‘국가명승 30호’로 지정되었다. 길로서는 처음이었다.

죽령옛길 행사 중 '죽죽제의'
죽령옛길 행사 중 '죽죽제의'

서른 한 번째 죽령장승제

지난 5월 30일, 죽령마루에서 죽령장승제가 열렸다. 성대하게 열렸던 예년과 달리 딱 필요한 인원만 참가하는 조촐한 장승제였다. ‘코로나 19’ 탓이었다.

이를 주관한 김진식 회장은 “장승은 예로부터 액과 병을 막아주는 수호신으로 오랫동안 우리민족과 함께 한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이라며, 지금의 펜데믹에서 죽령 장승이 영주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는다고 개최 의미를 피력했다. 그리고 여자장승의 입에는 ‘코로나-19’를 형상화한 병원체를 물고 있었다. 장승이 병균을 먹어치우는 모습이었다.

죽령옛길 걷기 행사(2000년)
죽령옛길 걷기 행사(2000년)

소백대장군과 죽령여장군이란 장승의 이름은 1991년, 첫 번째 심은 장승의 이름을 다시 사용했다고 한다. 한 세대가 지났으니 새로 시작한다는 의미란다.

19991년 4월 5일, 1990년 10월 ‘영주문화연구회’가 만들어지면서 첫 번째 행사로 ‘죽령장승제’를 열었다. 영주에서 남자 장승을 만들고, 단양에서 여자장승을 만들어 단양에서 영주로 시집을 보내는 형태로 연출했다.

마침 단양에 ‘양산박’이라는 문화단체가 있어서 가능했다. 첫 행사는 천 명이 훨씬 넘는 인파가 몰려 경찰들이 와서 교통정리를 해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1997년 ‘죽령장승보존회’가 만들어지면서 지금까지 맥을 이어오며, 장승제로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행사로 키워왔다.

그리고 이 장승제는 ‘죽령옛길’ 복원의 시작이었다. 지역문화지인 ‘소백춘추’와 장승제를 주관했던 영주문화연구회가 발간하는 ‘영주문화’가 옛길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영주시는 옛길 복원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죽령주막터(2012년)
죽령주막터(2012년)

길 복원의 시작

소백춘추 24호(1991년 11월 5일)에 편집자는 송지향(1918-2004, 향토사학자)의 “영남-기호의 이음목 죽령옛길”이란 글을 게재하며 편집자는 이렇게 기획의도를 적었다.

“2000년 가까운 세월동안 교통의 대동맥으로 사명을 다하고는 이제 드문드문 희미한 자취만 남기고 사라져버린 죽령옛길. 더 잊혀지기 전에 그 자취나마 되살려 보존하고자 본지에서는 향토사학자 송지향선생님과 함께 죽령옛길을 더듬어 보았다.

논밭이나 농로로 변해버린 옛길, 다래넝쿨, 잡목 숲으로 얼크러진 옛길의 자취를 찾아보면서 우리 고장에서도 문경새재의 옛길 복원과 같은 작업들이 이루어지면 향토사랑을 일깨우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여겨졌다. 나아가 관광자원으로의 활용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2021년 서른한 번쨰 죽령장승제 죽령 여장군이 '코로나-19'를 입에 물고 있다
2021년 서른한 번쨰 죽령장승제 죽령 여장군이 '코로나-19'를 입에 물고 있다

그리고 송지향은 글에서 이렇게 소회(所懷)를 적었다.

“아무리 그렇다해도 이 고장 죽령 옛길은 너무나 허망스럽다. 그 길이 어디 예사 길인가. 우리 국토에서 가장 중요로운 대동맥의 하나로, 영남(嶺南)에서 기호(畿湖)로 통하는 3대 간선(幹線)에서도 가장 맏형 뻘이라면 얼마나 당당한 지체였나. 그 중에서도 ‘영남-기호’의이음목인 죽령대목은 요충(要衝)에서도 요충이었는데….”

송지향과 당시 소백춘추 편집자였던 김경진은 풍기 유다리(풍기소방서 앞) 앞에서부터 직접 걸었다고 한다. 풍기에서 나서 자란 송선생님과 봉현에서 나서 자란 김경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 같다.

송지향이 이 길을 처음 간 것은 열네 살이었던 1931년 봄이었다고 한다. 단양 상선암에서 공부하고 있는 종형(송지영)한테 심부름을 갔었는데, 중앙선은 물론이고 신작로도 뚫리기 전이어서 오가는 행인도 많았다고 한다.

“인간을 위해 태어나 인간에게 이바지함으로 족했을 뿐, 본분을 다하고 살면서 자취를 거둔 그 길이 조금인들 미련이라거나 더 무슨 바라는 것이 있을까마는 우리들이 물 건너고 던져버린 지팡이나무처럼 그 끼쳐준 고마움을 기억에서조차 까맣게 지워버리고 있음을 생각하면 인간의 무심함이 스스로 부끄럽기도 하다.”

1991년 죽령장승제의 모습
1991년 죽령장승제의 모습

죽령옛길 걷기 행사와 소백산자락길

그리고 이 길은 다시 걸은 건 1999년 6월이었다. 송지향선생이 몸이 불편하여 당시 풍기광복회 사무국장을 하던 김진회씨가 선생님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길을 안내했다. 유다리에서 출발하여 예수재림교회 옆길을 지나 두산천변을 걸었다.

그리고 왕건이 견훤의 항복을 받아낸 곳으로 전해지는 둥항성(登降城, 마산), 숲이 울창했었다는 숫거리주막터, 그리고 11개 역(驛)을 거느렸었다는 창락역지를 지나니 희방사역이 나왔다. 여기서부터 고갯길이다.

희방사역 신축(1968년)
희방사역 신축(1968년)

느티쟁이 주막거리, 주점이 있던 주막터, 퇴계와 온계가 만났던 잔운대와 촉령대 그리고 잣나무 숲…. 아직 그 흔적이 뚜렷하다.

길을 걷고 김우출은 “길은 우리에게 삶을 부풀게 하는 그리움이다.”란 기행문을 썼다. 그리고 그 글을 마무리하면서 박이문이 쓴 “길”을 인용했다.

“한 사회, 한 시대의 생활양식의 변천과 더불어 그 사회, 그 시대의 길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옛날 길들에 마음이 끌리고 유혹을 느낀다면, 그것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낭만적 향수나 진보에 대한 거부감에 기인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 남들과의 조화로운 만남 속에서 살아있는 인간으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살아있는 마음’이란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결국 우리의 마음은 그해 가을 길을 복원하게 만들었고, 2000년, 영주문화연구회가 “고을나들이”를 진행하며 이 길을 안내하면서 영주시민들이 가장 많이 좋아하는 길이 된다.

그리고 2007년 12월 17일 ‘국가명승 30호’로 지정된다. 그해 함께 지정된 구룡령 옛길(29호), 토끼비리(31호), 문경새재(32호) 등 4곳은 모두 길이었다. 하지만 길이 생긴 연도와 만든 이가 확실한 곳은 죽령옛길 뿐이다.

그리고 죽령옛길은 소백산자락길 중에서 3자락으로 자리를 잡는다. 소백산자락길은 소백산을 가운데에 두고, 그 산자락을 한 바퀴 도는 143km의 길이다.

2009년 문화관광부가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되면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더구나 2011년에는 “한국관광의 별”을 수상하면서 전국적 관심을 받게 된다. 물론 일을 진행하는 중심에는 ‘죽령옛길’이 있었다.

김덕우 작가

예수재림교회 옆으로 아직 남아있는 옛길
예수재림교회 옆으로 아직 남아있는 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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