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 오월에 찾아본 ‘죽곡(竹谷)선생 한시(漢詩)’
360년 전 아들딸을 지극히 사랑했던 아버지의 시(詩)

죽곡에서 내려다 본 문려(마을 어귀)
죽곡에서 내려다 본 문려(마을 어귀)

봉화 해저 출생, 소수서원 수학, 문수 연화산 남녘 잠들다
아들 구 형제와 딸 둘을 두었는데 아들 셋이 문과급제

가정의 달 오월에 가족사랑 시(詩)를 찾아봤다.

가족을 지극히 사랑하는 주옥같은 한시를 후세에 남긴 류인무(柳仁茂, 1581-1659) 선생은 전주인(全州人)으로 호는 죽곡(竹谷)이요 자는 덕장(德章)이다. 선생은 문수면에 있는 종릉(鍾陵)의 주인이면서 영흥도호부사를 지낸 류빈(柳濱,1370-1448)의 7대손이다.

그는 1581년 봉화읍 해저리 절골(寺洞)에서 출생하여 안동 경당(敬堂) 장흥효(張興肴)선생 문하에서 기초를 닦은 후 1610년(광해2) 소수서원에 입원하여 수학했다.

죽곡 선생은 아들 구 형제와 딸 둘을 두었는데 가학(家學)을 계승하면서 자식교육에 힘써 아들 셋이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한 아들은 사마(司馬)에 올랐다. 특히 넷째 아들 경립(經立)은 1654년(효종5)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영남 선비의 위상을 높였다. 선생은 79세로 세상을 떠나 문수면 권선리 연화산 남녘 은석(銀石)에 잠들었다.

죽곡 선생의 시(詩)는 모두 이백 수가 넘는다. 영주 향토사학자 류창수 선생은 2015년 200수를 79수로 줄여 ‘죽곡선생 한시(漢詩) 나들이’이란 제목의 시집을 출판했다. ‘숨겨진 보물’은 그 대표작을 간추려 ‘가정의 달’을 기념하고자 한다.

죽곡선생의 묘, 문수면 권선리 은석
죽곡선생의 묘, 문수면 권선리 은석
죽곡의 고향 봉화 해저 절골
죽곡의 고향 봉화 해저 절골

지극히 딸을 사랑했던 아버지의 시

□ 女兒歸覲卽還(여아귀근즉환) 딸아이가 친정 왔다 돌아감

平生嬌愛女(평생교애여) 평생에 예쁘고 사랑스러운 딸이

相見遠離餘(상견원리여) 마주 보며 멀리 떠나가네.

眉目渾依舊(미목혼의구) 눈과 눈썹은 혼연히 옛날 같건만

鬢毛半已疎(빈모반이소) 귀 밑머리 어느덧 반쯤은 희네.

告歸還促迫(고귀한촉박) 돌아가려는 데 도리어 촉박하고

話別笏晞噓(화별홀희허) 이별의 이야기 갑자기 슬퍼지네.

臨去相垂淚(임거수수루) 헤어질 때 서로 눈물 흘리며

歸期更問渠(귀기갱문거) 돌아올 기약을 다시 물어보네.

*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죽곡선생 한시 나들이(류창수 편저)
죽곡선생 한시 나들이(류창수 편저)

아들(子) 편

□ 세 아이의 과거길

세 아이(형립, 정립, 영립)가 말(馬) 고삐 잡고

나란히 서울로 가네.

며칠 동안 말달려

서울에 도착할꼬?

떠난 후 아무도

편지 한 장 없으니

등잔불과 마주앉아

먼 길만 계산하네.

* 집 떠난 아이들이 어디쯤 가고 있는지? 아버지 마음은 시간 계산만 하고 있다. 이 무렵(1645년) 아들 정립이 문과 급제했다.

□ 정(貞) 아이가 서울로 가네

멀고 먼 천 리길 저 낙성밖에

오늘 아이들 떠나보냈네.

부자간 은혜가 비록 중하지만

군신 간의 의가 어찌 가벼울까?

가정에는 마땅히 효를 다하고

나라에는 가히 충성을 바쳐야 하네.

평생에 업적 힘쓰고 다하여

멀리 떠나는 정 쓸쓸하지 않게 하리라.

*아들 정립(貞立)이 문과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를 때 쓴 시이다. 군신의 의와 나라에 충성을 당부하고 있다.

□ 경립(經立) 아이 문과 장원급제

평생에 이렇게 좋은 일이

몇 번이나 올 것인가?

어찌 이 영광이 여기에

이를 것을 생각이나 했던가?

비단옷에 어사화로 세 아들이 춤을 추니

오늘에야 이 늙으니 팔베개 면했다네.

* 1654년 넷째 아들 경립(經立)이 문과 장원급제 때 쓴 시로 짐작된다. 아버지의 기뻐하는 모습이 떠오르는 시다.

□ 성(成) 아이 생각(1)

성(成) 아이가 무슨 일로

돌아올 기약을 어기는고?

편한지 불편한지

소식을 알길없네

작객(作客)이 언제나

집 생각하리

굶주림은 없는지

질병은 아닌지

모두가 걱정이네.

*성 아이는 셋째 아들 성립(成立)이다. 성립은 선영을 지키기 위해 여주로 가서 살았다.

작객(作客)이란 ‘집 나간 아들’이란 뜻이다.

□ 성(成) 아이 생각(2)

아득한 리능 천 리 길에

떠난 후 얼굴 못본지

어느덧 한 해가 되었구나

일찍 시월에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무슨 일로 못 오는고

낮에는 문려(門閭)에서 기다리고

밤이면 잠 못 이루네.

* 아득한 ‘리능’이란 여주에 있는 선영(先塋)을 뜻하고, 문려는 마을 어귀를 말한다.

아마도 아버지는 마을 어귀까지 나가 아들을 기다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딸(女)과 사위(女壻) 편

□ 딸 아이와 이별

삼 년 만에 한 번 보고 또 이별 하네

늙은 애비 정회를 누가 알까?

멀어져 가는 모습은 머물러도 보이지 않고

먼 숲에 침침한 나무만 나의 슬픔 더해주네.

□ 아들딸을 읊음

일곱 아들은 성심이 깊고 딸 하나는 영특하니

모두가 자오이고 반포의 정이라네.

집이 가난하여 좋은 음식 먹이지는 못했으나

받들기가 어김없으니 이 또한 영광일세

□ 사위 조랑과 이별

며칠간 함께 즐거웠건만

떠나니 언제 다시 만나리.

이별과 머뭄 두 가지 생각인데

모두가 의의하네.

석 잔의 술은 정(情) 다함이 아니요

한 손에 술잔 들고

또 한 손은 옷깃을 당기네.

□ 사위 조랑을 이별하고

사위와 이별한 지 오래되어

이별의 한은 편치 않았네.

산 넘고 바다 건너 천 리 먼 곳은

산과 구름이 가로막혔네.

두견새 소리 듣고 생각에 잠기니

달을 보고 다시 정을 느껴 보았네.

어느 때 다시 만나 손을 잡을고

좋은 노래는 언제 다시 불러볼 건가?

동생(弟氏) 편

□ 동생과 이별

헤어져 오래 사는 걸 한탄하네

동생은 날 찾아 여러 번 와서

시 읊고 노래하며 남은 잔을 마셨지

춤추고 뛰며 옷자락을 휘날렸지

다시 만날 날은 언제일까?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기약을 물어보았네

대문 밖에 나가 떠나보내니

강가의 나무만 저만치 휘어졌네

*이때 형은 67세이고, 동생은 59세였다. 우애 많은 형제이다.

□ 동생 생각(1)

편지가 어찌 이리 드문가?

생각하는 마음은 밤낮으로 이어지네.

동생을 생각하니 슬픈 마음 더해지고

달을 보니 다시 더 쓸쓸하네.

천 줄의 글을 적어 보내고자 하나

한 마리 기러기에 전하기 어려워라

때로는 남향(안동) 사람만 바라보네.

어찌하여 자네는 동변(임동) 사는가?

□ 동생 생각(2)

원곡(임동)과 천성(고향)에

형제가 갈려 사네

달과 구름 같아

견디기 힘드네

무정한 물색이

모두가 감회로다

나는 새 쳐다보니

무리 지어 다시 우네.

가족(家族)과 함께

□ 기축년 정월 초하루

기축년 정월 초하루 새해를 축하하네

고당에 자리 펴고 술상을 마련하고

여러 아이들이 차례로 서니

모두가 순진한 자질이요

여러 며느리 차례로 서니

모두가 숙인(淑人) 일세

두 늙으니 무병하여 자리에 좌정하니

모두들 부모의 장수를 축하하네

아직은 우환 없어 좋으니

이 일은 인간에 소륜일세.

* 이때는 1469년(인조27)으로 69세 때이다.

□ 맏아들 형립(亨立)이 자리를 마련하다

산정(山亭)에 좋은 모임을 여니

높은 나무에 서늘함이 생기는구나.

자리에는 노인들이 가득 모이시니

뭇 신선이 내려온 듯 적성일세.

피리 소리는 즐겁게 들리고

까마귀는 백년동안 정성을 다하네.

지는 해 저무는 걸 탓하지 마라

가을 달이 또 밝혀 주리라.

□ 기축년 정월 초하루 날

여러 아들과 여러 며느리가

한 자리에 모여서 신년을 축하하네.

흰 머리에 술 두루미 마주하고

많은 나이 만년을 빌어주네.

오래 삶은 나의 소원이 아니요

일찍 죽는 것이 나에겐 편하다네.

너희들이 모두 건강하여

복과 경사를 함께 누리길 바라노라.

□ 무자년 섣달그믐 밤에 여러 아이들에게

칠십 년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만큼 빠르니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염량(炎凉)을 얻으리오

고희(古稀)의 나이가 내 어이 한스러울고

다만, 여러 아이 수 누리기 원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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