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을 배경으로 달리는 꿈같은 길, 산골 애환을 길따라 옮겨주던 오일장

올해 5월2일 소백산에 눈이 내렸다. (소백로를 따라 히티재에서 풍기IC 쪽으로 내려가다 찍은 사진)
올해 5월2일 소백산에 눈이 내렸다. (소백로를 따라 히티재에서 풍기IC 쪽으로 내려가다 찍은 사진)

새로운 한 걸음을 가는 것, 새로운 말을 내뱉는 것,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소백로는 예천군 감천면 포리교차로에서 출발하여, 봉현·풍기·순흥·단산·부석을 지나, 봉화군 물야면 오록리로터리까지 가는 길이다.

면소재지를 지나는 중심도로인 이 길은 소백산을 곁에 두고, 그 줄기 아래로 달리는 예쁜 길이다. 931번 도로인 이 길은 감천면에서 충효로(28번 도로)와 만나고, 물야면에서 문수로(915번 도로)와 만난다.

감천면 포리교차로
감천면 포리교차로

경상북도 최북단(最北端)의 길

소백로는 위도 상으로 경상북도의 가장 북쪽에 있는 길이다. 그래서 경상북도 도청이 대구에 있었던 1980년 이전에는 이 도로와 인접한 학교에 발령을 받으면 근무를 포기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도청 소재지에서 가장 멀리 있는 이곳은 그만큼 두메로 여겼던 모양이다. 기차를 타고 영주에 와서, 또 버스를 갈아타고 임지까지 오면 하루가 지나던 시절이었다.

“기차를 타도, 버스를 타도 계속 산 속으로 들어가기만 했어요, 그리고 이제 다 왔다고 내리니 눈바람 확 덮쳐오는 거예요. 해거름에 앞을 막고 서있는 소백산엔 아직 눈이 하얗고.”

사실 4월까지 눈발이 휘날리는 이곳이 남쪽에서 온 새내기 교사들에겐 유배지와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그 땐 이 길을 따라 오일장이 섰었다. 장돌뱅이들은 이 장에서 저 장으로 트럭으로 물건들을 실어 날랐고, 주민들은 모처럼 이웃 마을 사람과 만나는 소통의 자리가 되었다. 부석장이나, 풍기장은 소백산 너머 단양사람들까지 오는 큰 장이었다.

하지만 21세기가 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소백산은 등산과 힐링의 장소로 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부석사, 소수서원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따라 새로운 여행지로 떠오르고 있다. 또 부석-영월 간의 소통을 위해 뚫고 있는 남내리 터널은 또 다른 변화를 만들어 낼 것이다.

물야면 오록리 로타리
물야면 오록리 로타리

근대화의 통로, 신작로(新作路)

영국 여성지리학자 비숍은 『조선여행기』에서 “인천에서 서울까지는 하루 낮이 걸린다. 도로의 너비는 겨우 1m 내외로 논둑 밭둑을 지나는 길고 꼬불꼬불한 돌멩이투성이 길이다.”라며 얘기하고 있듯이 옛길은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던 길로서, 그저 사람들이 걸을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신작로는 차량통행이 용이하도록 만든 직선에 가까운 길이다. 그래서인지 신작로를 생각할 때, 뙤약볕과 미루나무, 먼지가 날리는 자갈길이 먼저 떠오른다.

신작로와 미루나무(1960년대)
신작로와 미루나무(1960년대)

신작로는 한일합방 이후, 일본인들의주도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츰 차량 이용이 빈번해지면서 길이 변해간다. 1933년 이런 기사가 있다.

“직통도로착공 / 【영주】 경북 영주군은 경북의 가장 주요지임에도 불구하고 종래에 교통이 불편하야 도(道) 군(郡) 당국에서는 오래동안 현안 중이던바 금년 여름부터 향청 서천의 두 교량의 개축에 착수하야 서천교는 거의 완성을 보게됨에 따라 각처의 교량을 모조리 개축하는 일밖에 풍긔예천간 도로의 이천원의 보조를 어더가지고 지난 팔일부터 공사에 착수하엿다 한다.”(조선일보 1933. 10. 16.)

여기서 ‘풍긔예천간 도로’는 봉현면 노좌리를 지나는 931번 도로를 의미한다. 그 당시 예천 가는 길이 중요한 이유는 1931년 김천에서 예천을 지나 안동까지 가는 경북선을 완공하였기 때문이다.

1942년 중앙선이 개통하기 전까지 서울이나 부산으로 가는 최선의 길은 김천에서 기차를 타는 것이었다. 그 때 예천은 그 중요한 통로였다. 하지만 일본은 중앙선 개통 후, 문경-안동 철길을 철거해 버린다. 그 뒤 문경-예천-영주를 잇는 경북선 공사를 다시 시작하여 1966년에 개통한다.

풍기에서 바라 본 천부산과 히티재
풍기에서 바라 본 천부산과 히티재

히티재 너머 마을

봉현면행정복지센터는 오현리에 있는데, 의용소방대는 유전리에, 치안센터와 우체국은 노좌리에 있다. 히티재 너머에 있는 유전과 노좌에 중요한 관공서가 자리잡고 있는 것은 지리적 여건 때문이다.

도솔봉 뒤편에 있는 묘적령(1020m)에서 옥녀봉, 천부산, 자구산, 매봉산을 거쳐 예천군 호명면 한천과 내성천 합수하는 지점까지 가는 산맥을 자구지맥(子求枝脈)이라 한다 그리고, 천부산(852m)에서 용암산(635m)으로 새로운 줄기가 갈라져 나와 시루봉과 주마산으로 이어진다.

이 갈라지는 지점에 잘록한 곳이 히티재이고, 그 너머에 유전과 노좌가 있다. 이 마을은 큰 산줄기 아래 숨어 있는 모양새이다. 그리고 이 마을에서 예천으로 가는 길은 열려있지만, 풍기로 오는 길은 히티재라는 큰 고개를 넘어야 한다.

금계교에서 바라 본 동양대학교. 예전에 931번 도로의 주 통로였다
금계교에서 바라 본 동양대학교. 예전에 931번 도로의 주 통로였다

이 재너머 마을은 한동안 예천으로 가는 길목으로 번성을 하였다. 하지만 중앙선과 경북선이 생기고 이 마을은 재너머 섬처럼 숨어버리게 된다. 그래도 한동안 영주에서 예천을 거쳐 김천으로 가는 정규 버스가 있었지만, 1980년대를 지나면서 이제는 영주여객과 예천버스가 번갈아 지나는 정도가 되었다.

또 1999년 초등학교가 폐교가 되고, 그 자리마저 요양원이 차지하면서 이제 아이들이 없는 마을이 되었다. 오일장까지 섰던 노좌리는 군데군데 그 장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이제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이승만 대통령 부석사 방문(1957년)
이승만 대통령 부석사 방문(1957년)

이승만대통령 부석사 방문

길의 변화는 계기가 있어야 한다. 소백로에서 예천 가는 길은 바깥세상과의 소통을 위하여 변화시켜 갔다면, 부석 가는 길은 부석사가 그 변화를 불러온다. 1957년 1월 17일 이승만대통령의 부석사 방문은 변화를 앞당긴다.

대통령은 17일 아침에 풍기역에 도착하여 부석사까지 승용차로 이동한다. 그 당시 여건으로 대통령을 모신다는 것은 대단한 준비가 필요했을 것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그때 길이 확 바뀌었다.”며 당시를 회고할 정도이다. 그리고 그때 웃지 못 할 일화는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다.

“민둥산을 대통령께 보여드리기 싫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다른 데 있는 소나무를 잘라다가 부석사 앞에 꽂았지. 그 아까운 소나무를….”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부석사로 가는 마차(1950년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부석사로 가는 마차(1950년대)

그리고 이 길은 그때 그대로 20년이 넘게 유지된다. 확포장을 한다고 공사는 시작되었지만, 헛세월이었다. 1990년대 초였을 것이다. 영주시가 목포시와 자매결연 하고, 교류를 할 때, 목포에서 온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길이 왜 이래요. 경상도는 전라도보다 나을 줄 알았는데, 우리보다….”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순흥에 선비촌이 건립되면서부터이다.

남원천이 봉현면과 풍기면의 경계
남원천이 봉현면과 풍기면의 경계

외곽도로의 발달

그리고 그 무렵부터 불기 시작한 자동차의 확산은 길의 변화를 촉진한다. 그 중 하나가 외곽도로의 건설이다. 좁은 시가지를 지나지 않도록 새 길을 만드는 일이었는데, 풍기가 대표적이다.

남원천교를 건너, 풍기역 앞을 지나 동양대학교 뒤편 고개인 잠뱅이재를 넘어 가던 길이 원래의 931번 길이었는데, 풍기IC에서 봉현교차로를 지나 봉현로터리와 광복공원 앞으로 큰길을 내면서 순흥으로 가는 길을 만들어 ‘소백로’의 주도로로 포함시킨다. 그리고 예전의 길을 ‘풍기로’, ‘동양대로’로 새 이름소백을 붙여준다.

풍기에서 바라 본 천부산과 히티재
풍기에서 바라 본 천부산과 히티재
시외버스 주차장(현 국민은행 자리)에서 기사와 조수 그리고 안내양
시외버스 주차장(현 국민은행 자리)에서 기사와 조수 그리고 안내양

동양대학교 현암정사 부근에 서낭당이 있었고, 그 서낭당이 있던 고개가 잠뱅이재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있을까? 그런데 이 재가 예전엔 그렇게 높은 고개였을까?

버스에 차장과 조수가 있었던 1960년대까지만 해도 순흥에서 올 때면, 이 고개 아래서 승객들을 하차시켜 고갯마루까지 걷게 했다.

버스가 못 올라가기 때문이었다. 승객들은 으레 그러려니 하면서 내렸다가 탔다. 그때 고갯마루에 올라서 내려다본 풍기는 하늘 아래에서 참 큰 고을이었다.

김덕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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